2013년 6월 27일(목)
발표회 하루 전이다. 특히 전통춤 공연 연습에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어깨만 덩실거리고 발목을 자연스럽게 교차하며 리듬을 탄다는 게 말이나 쉽지,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들 연습하는 것만 보고 있을 순 없었다. 하더라도 같이 하여 어색하고 뻣뻣한 몸동작을 함께 보며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러 번 무용 선생님은 나에게 같이 할 것을 권유했지만, 연습은 같이 하되 발표회 땐 사진을 찍기 위해 빠지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오늘 일이 터지고 말았다. 자신의 파트너로 내가 춰야한다고 공표했기 때문이다. 도저히 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덕에 내가 무대 전면에 서야만 했다.
얼핏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대학교 1학년 때 합창단 동아리에 들어갔다. 첫 무대는 대강당에서 공연하는 것이었는데, 30명의 합창단원 중 한 명으로 서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긴장을 했는지 다리가 심하게 떨려오는 거였다. 그러다 보니 다리를 신경 쓰느라 노래를 못 부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첫 무대는 나에겐 위압감이었고 부담이었다. 하지만 그 후로 여러 번 무대에 서면서 점차 익숙해졌다.
하지만 춤을 춘다는 것은 내 삶에서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것도 배경처럼 뒤에서 추는 정도가 아니라 전면에 나서서 춰야 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대학교 1학년 때 느꼈던 그와 같은 부담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건 솔직히 말해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제대로 하지 못해 웃음거리가 되면 어떨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누구나 자신이 웃음거리가 되는 걸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걸 자존심과 연결하여 ‘웃음거리가 되는 건 자존심에 상처를 받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완벽하게 어떤 일을 하여 칭찬받지 못할 바에야, 아예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
귀국한 후 8월 7일에 교사연수를 할 때 준규쌤에게 들은 얘기다. 박동섭 교수가 대전에서 교사들과 함께 비고츠키 강의를 했더란다. 내용은 마음이든, 성정性情이든 사람 피부를 경계로 그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건 곧 ‘능력’이나 ‘실력’ 따위의 것들이 개인의 판단기준일 수 없음을 역설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다보면 십중팔구十中八九 교사들은 “그래서 교육현장에선 어떻게 적용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우문愚問에 박동섭 교수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칠판에 ‘Description is a prescription서술은 처방이다’라고 썼다고 한다.
처방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서술자의 서술 속에 이미 있다는 얘기다. 예를 들자면 ‘못 생겨서 이성친구가 없다’고 서술한 사람은 성형수술을 하려 할 것이고, ‘성격이 지랄이어서 이성친구가 없다’고 서술한 사람은 성격 개조에 들어갈 것이다. 어떻게 상황을 서술하느냐에 따라 그걸 해결하는 방법도 이미 그 속에 들어있다.
갑자기 내가 춤추게 된 얘길 하다가, 한참이나 시간을 건너 뛰어 박동섭 교수의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이때의 상황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은 없기 때문이다. 그 말처럼 서술하는 방식이 달라짐으로 ‘도망가고 싶던 마음’에서, ‘맘껏 즐겨보자는 마음’으로 달라졌으니 말이다.
무대 전면에 서야 한다고 했을 때, 엄청난 부담이 밀려왔다. 이미 밝혔다시피 ‘웃음거리가 되는 건 자존심에 상처받는 일이다’라고 서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웃음거리가 되는 것과 자존심에 상처 받는 일은 인과관계가 아니었다. 만약 그런 인과관계가 성립된다면, 모든 개그맨들은 늘 자존심에 상처를 받으며 돈을 벌고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서술조차 내가 그런 상황을 피하고 싶어서 꿰어 맞춘 말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연암은 삼종형을 따라 열하로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다른 사람은 내부의 사람으로 여행 일정에 충실한 스케쥴만을 소화할 뿐, 삐딱선을 전혀 타지 않는데, 거의 덤터기로 따라간 연암은 논외의 인물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밤이면 나가 청나라 지식인들과 필담을 나누며 국제정세를 체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 재밌는 일이 일어나는데 한 점방에 들어가니 벽에 엄청 재밌는 글이 쓰여 있었다. 그래서 주인에게 누구 작품인지, 주인장이 직접 쓴 건 아닌지 물어보니 누구 작품인지도 모르고, 자신이 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자 연암은 그걸 베껴가도 되겠냐고 물었고, 주인이 승낙해주자, 그날 저녁에 함께 동행한 정군과 밥을 먹자마자 돌아와 열나게 베꼈다. 그 모습이 황당해보일 수밖에 없던 주인은 “선생은 이걸 베껴서 무얼 하려오?”라고 묻는다. 그러자 연암이 한 대답이 아주 일품이다.
귀국하여 나라 사람들에게 한 번 읽게 하면 마땅히 배를 움켜잡고 한바탕 웃어재끼며 포복절도할 것이오. 그러면 밥톨이 벌떼처럼 뿜어져 나올 것이고 갓끈이 썩은 새끼 끊어지듯 끊어질 것이오
歸令國人一讀, 當捧腹軒渠, 嗢噱絶倒, 噴飯如飛蜂, 絶纓如拉朽.
연암에겐 웃음은 카타르시스였고 해방구였고, 긴장과 긴장 사이, 체면과 체면 사이를 뛰어넘는 장치였다. 그러니 나로 인해, 내가 써온 글로 인해 누군가 한바탕 웃어재낀다면 그것만으로도 영광이고 행복이었던 거다. 이렇게 연암처럼 웃음에 대해 서술해놓으면 웃음거리가 된다는 건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되고 그걸 꺼릴 이유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그처럼 ‘웃음거리가 된다면 진지한 나로서는 영광이오, 외국인도 이렇게 열심히 자기 나라의 전통춤을 춘다는 것으로 본다면 한국인으로서 영광이다’라고 다시 서술하게 되었다. 외국인이 한국말을 아무리 능숙하게 한다 해도 한국인 입장으로는 어색하면서도 대단해보이고 재밌어 보이는 것처럼, 내 춤이 아무리 능숙해도 어설프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하든 그들에겐 재밌는 구경거리가 될 수밖에 없으니, 잘 하려 애쓰지 말고 멋있어 보이려 부담 갖지 말고 이렇게 주어진 시간들을 즐겨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연암 형님이 사람들을 포복절도하게 만들기 위해 열나게 기이한 문장을 베끼던 그 정신으로, 나도 이들과 함께 웃어보기 위해 재밌게 연습하고 내일 발표회도 잘 해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