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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Oct 11. 2018

안 함과 못함

2013년 6월 27일(목)

오후엔 노래하는 시간이 있었다. 노래방 기기로 노래 부르는 것이 아니라, 유투브의 가라오케 모드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때 대통령 학교 학생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마이크를 잡고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이런 식으로 노래 부르는 것에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아이음을 얼핏 봤을 땐 부끄러움이 많은 학생 같았는데, 실컷 노래를 부르고 방방 뛰면서 제대로 놀 줄 아는 아이더라. 단재친구들 중에 연중과 혜린, 그리고 승빈이만 아이들과 함께 노래 불렀다.               




노래 울렁증인가같이 하고 싶지 않음인가?

     

노래하는 시간이 다가오자, 남학생들은 이미 자기들끼리 합의가 끝났는지 부리나케 자리를 피했다. 강당의 맨 뒷좌석에 가서 앉은 것이다. 그나마 아예 강당을 빠져 나가지 않았으니, 완벽한 반항은 아니라고나 할까. 이향이도 의자에 앉아 나올 생각을 안 했다. 

이 또한 문화 풍토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노래든 춤이든 한국적인 인식은 별반 다르지 않으며, 노래방이 아무리 보편화되었다 해도 노래를 자연스럽게 부를 수 있는 환경은 아닌 것이다. 

나도 노래방에 가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기 때문에 모임 때 노래방에 가자고 하면 손사래부터 치며, 빠지려 무진 애를 쓰곤 했다. 그래서 솔직히 뒤로 빠져 있던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바라는 게 있었다면, 노래는 부르지 않더라도 같이 호응해줄 수는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노래방에 가서 친구가 노래를 부를 때, 박수를 치든, 같이 부르든, 탬버린으로 흥을 돋우든 해야 하는 것과 같다. 그것이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많이 아쉽던 순간이었다.                



▲ 아이들은 앞자리에 자리 잡아 신나게 노래 부르는데, 남학생들은 저 멀리 앉아 참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온 몸으로 보여줬다.




한 번 뿐인 경험그러나 내 생각이 가로막다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A학생은 내일 발표회 때 전통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을 문제 삼았다. 여자들은 치마를 입게 되어 있었는데(A학생이 훗날 귀국하여 그 당시를 회상하며 쓴 여행기엔 ‘큰 망치로 뒷목을 얻어맞은 기분이어서 한참동안이나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대었다’라고 써져 있다), 자신은 치마를 입을 수 없다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걸 어필하기 위해 ‘자신은 치마를 입으면 발가벗겨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까지 말을 한 것이다. 전혀 절충할 수 없는 것처럼 말했기 때문에 고민은 깊어졌다. 

A학생과 비슷했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줬다. 대학생 1학년이던 시절, 전학년 MT를 갔는데 장기자랑 시간에 남학생들은 짙은 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고 섹시댄스를 춰야 했다. 누가 봐도 내 몸매는 전형적인 남자 몸매인데, 그건 통과의례 같은 거였고 당연히 해야만 하는 것이었기에 창피함(모욕?)을 무릅쓰고 했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다. 그저 한순간인데, 거기에 대고 ‘의상도착자처럼 보일까 두려워서 못 해요’라던지 ‘전 여장女裝 같은 건 범죄라고 생각해서 못 해요’라고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MT의 발표회 시간은 어차피 지나가며, 모두의 축제와 같은 의미였기 때문에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의 이와 같은 경험담을 들려주며, 한 번 뿐인 축제와 같은 시간을 함께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다.                



▲ 내일 입게 될 카자흐스탄 전통복장이다. 이 복장 때문에 한바탕 소동이 벌여졌다.




안 하는 것인가못하는 것인가? 

    

하지만 A학생은 자신이 치마를 입는 것은 그런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 식으로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그래서 하려고만 하면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더욱 강도를 높여 이야기한 것이다. 

솔직히 내가 이향이가 되어보지 않은 이상, 이런 식으로까지 이야기되는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는 잘 감이 오지 않았다. 적어도 내 판단은 어떠한 이유에서건 지금은 ‘안 하는 것’이지, ‘못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제선왕이 “안 하는 것과 못하는 것은 어떻게 다릅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맹자는 “태산을 옆에 끼고 북해를 뛰어넘는 것을 사람들이 ‘나는 못하는 것이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진실로 못하는 일이지만, 어른을 위하여 나뭇가지를 꺾는 것을 사람들이 ‘나는 못하는 것이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안 하는 것이지, 못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왕께서 ‘왕다운 왕의 역할’을 안 하는 것은, ‘태산을 옆에 끼고 북해를 넘는 것’과 같은 상황이 아니라, ‘가지를 꺾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맹자』 「양혜왕」 상 7

曰:“不爲者與不能者之形何以異?” 曰:“挾太山以超北海, 語人曰 我不能, 是誠不能也. 爲長者折枝, 語人曰 我不能, 是不爲也, 非不能也. 故王之不王, 非挾太山以超北海之類也; 王之不王, 是折枝之類也. 『孟子』 「梁惠王」 上 7        


  

예전엔 종을 만들 때, 종에 짐승의 피를 묻혀 제사를 지냄과 동시에 종의 틈새를 메웠다고 한다. 이를 ‘흔종釁鍾’의 풍습이라고 한다. 제선왕은 벌벌 떨며 사지死地로 걸어가는 소의 모습을 보며 측은한 마음이 들었던지, 놓아주라고 명령을 한다. 맹자는 제선왕의 이런 측은지심을 간파한 것이다. 그래서 짐승을 향한 그런 측은지심을 확장하고 발휘하면 백성들도 굶주리지 않고 풍요롭게 살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제선왕은 ‘그렇게 하고 싶지만 못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였고, 맹자는 위의 예를 통해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이라 못 박았다. 

물론 가지를 꺾는 것은 쉽지만 나무를 타는 게 무섭다거나, 자연훼손이 싫다거나 하는 등등의 이유로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때의 ‘못하는 것’이란 마음이 만든 벽일 뿐, 현실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 상황이라면 사다리를 타고 오르든, 아예 부러진 나무를 찾든 해결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충분히 할 수 있지만 어떠한 이유로든 할 수 없을 때에 ‘안 한다’라는 말을 쓰는 것이고, 현실 불가능하여 할 수 없을 때에 ‘못한다’는 말을 쓰는 것이다. 



▲ 예전엔 흔종이란 의식이 있었다. 새로 만든 종에 액땜을 하는 의식이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생각해야 하는 건, 그 일이 ‘나와 우리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말해 ‘사람을 때려라’라는 상황이 주어졌을 때, 그걸 하지 않는다고 해서 ‘안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건 윤리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합의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 하는 것’이란 전혀 해가 되지 않고 현실 가능한 일인데도, 어떠한 이유로든 할 수 없을 때에 붙일 수 있는 말이다. 

A학생도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A학생에게 ‘대통령 학교를 들고 한국으로 돌아가라’라고 하던지, ‘매일 치마를 입고 와라’라고 한다면 분명히 못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단지 ‘가방을 들고 한국으로 돌아가라’라고 하던지, ‘공연하는 3분간만 치마를 입자’라고 한다면 그건 안 하는 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A학생의 태도는 완강했기 때문에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A학생이 바지를 입고 전통춤을 추는 것과 그렇게도 안 될 때엔 아예 빠지는 것을 말이다. 이런 판단은 어쩔 수 없이 담당 선생님에게 맡겨야만 했다. 그래서 디아나 선생님에게 이야기를 하니, 자신이 A학생을 설득하겠다며 한참이나 이야기를 하더라. 그러다 결국 안 된다는 것을 알았고, 복장이 통일되지 않아 전체적인 분위기가 망쳐지느니 어쩔 수 없이 빠질 수밖에 없겠다고 말했다. A학생에게 가서 “만약 전통춤 공연에서 빠지게 된대도 괜찮아?”라고 조심스럽게 물으니, 별 고민 없이 “괜찮아요.”라고 대답하더라. 치마 때문에 열심히 연습해온 공연에서 빠져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 상황이 여전히 안타깝게 느껴졌기에 이런 식의 기록을 남겨 놓는다. 



 ▲ 볕 좋은 그렇다고 무지 뜨겁지도 않던 카자흐스탄 탈디쿠르간의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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