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의 길을 끝마치다1
최근에 다겸이는 “시기가 도래한다.”는 말을 자주 쓰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면, “아직 시기가 도래하지 않아서 그런 거지.”라고 하거나, 자신이 최근에 문장을 보는 실력, 방법 등을 달리하게 되면서 “자신에게 맞는 시기가 도래했다.”고 곧잘 말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도 언제라 말할 순 없지만, 그리고 설혹 그러한 변화가 나타났을 때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됐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급작스런 순간들이 있다. 그런 변화에 누구나 의미를 부여하고 싶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살다보니’, ‘무언가 고민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그 변화에 전과 후가 명확히 나누어지는 것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의미를 부여하며 무엇이 어떻게 변했는지 날카롭게 분석하려 한다.
6월 5일(화), 그 날은 지극히 평범한 날이었다. 그 날도 쾌청했고 마음엔 한껏 여유가 깃들어 행복이 마구마구 샘솟고 있었다. 순대국밥을 먹고 오전에 작업한 걸 한 바탕 올리고 한숨 잔 후 올라가려 할 때 2009년에 열심히 작업하여 책으로 만들어놓은 『중용의 길, 나의 길』이란 책이 눈에 들어왔다. 어렵디 어려운 『중용』을 이 책을 통해 그나마 가까이 할 수 있었고 ‘作禮樂’, 문화창조자인 성인이 되기 위한 애씀과 성실함이 무척이나 맘에 들었다. 그건 한 줄기 빛처럼 나를 감싸 안았고 아메바 같이 하잘 것 없는 나도 이 시대를 바꿀 수 있는 인물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선사해줬다. 아마 이 순간 이 책이 다시 눈에 뜨인 까닭은 지금 이 순간에 대한 불안, 두려움 등이 미묘하게 섞여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불현듯 작년 이맘때가 생각난다. 학교에 다니는 게 심드렁해졌다. 무지 편한 곳이고 나에게 시키는 것도 없었지만 일상의 반복, 무료함, 타성에 젖어들었고 심지어 여행조차도 귀찮은 무엇으로 인식될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그냥 하루 종일 공부만 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학교 나오는 것도 귀찮다 귀찮아.’라고 할 정도였는데, 막상 이 상황에 놓이고 보니 공부라는 불안감, 임용이라는 두려움, 결국 날 믿지 못하는 불신이 가득했다는 사실을 인지시키더라. 그런 좋음과 싫음, 희망과 절망, 행복과 불행, 가능성과 막막함 사이에서 헤매다가 다시 2009년 당시에 저 『중용』을 읽으며 맛봤던 뽕맛을 보고자 집어 들고 올라온 것이다. 하지만 그 땐 정말 몰랐다. 그 작은 몸부림이 낳게 될 파장을 말이다.
올라와서 읽다보니 정말 갑자기 어떤 생각이 스쳤다. 어쨌든 『중용』도 공부할 생각이었으니, 이 책도 정리해서 블로그에 업로드를 하고 그 덕에 중용 원문도 함께 공부하면 어떻겠냐고 말이다.
『우리 한시를 읽다』를 정리하여 블로그에 탑재하고 김형술 교수와 수업한 『소화시평』을 정리하여 블로그에 올리다 보니 그로 인해 생각의 변화가 수반되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다. 그건 블로그에 올릴 땐 ‘그래도 의미 있고 누군가의 자료가 아닌 나만의 자료여야 한다’는 생각의 틀이 있었다. 즉, 좀 더 단순히 말하면 그럴 듯한 자료만 올리겠다는 생각이었고 여전히 나에 대한 어떤 이상이 작용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런 두 작업을 하면서 블로그는 하나의 매체일 뿐이며 지금의 나에겐 하나의 노트일 뿐이라 생각하게 됐다. 즉, 이상적인 것만을 심혈을 기울여 담아야 하는 게 아닌, 지금의 별 볼일 없고, 아니 지금 바로 이 순간의 모습, 날 것 그대로를 담아내도 된다는 깨달음 말이다. 완벽한 이상으로서의 내가 아닌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내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의 나를 긍정할 수 있다면, 있는 나로서의 나를 담아내는 데에 주저할 이유가 없겠다 싶었다.
이런 생각의 변화로 블로그엔 지금의 어설픈 해석들도 곧잘 담기 시작했고 『십팔사략』도 그렇게 어영부영 끝을 내긴 했다. 또 하나의 과정을 통과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