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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Oct 11. 2018

『중용』을 석 달 만에 마치며 알게 된 것

중용의 길을 끝마치다2

이쯤에서 잠시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무언가 끝낸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다. 최근에서 더 크게 느끼지만 단순히 하던 일을 마무리 지었다는 의미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끝내보았을 때 알게 되는 두 가지

     

이걸 잘 몰랐을 때는 『논어』나 『맹자』를 어쨌든 다 해석하고 나면 할 게 없을 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에 떨어지면 어쩌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그땐 정말 그랬다. 헐~

그건 어쨌든 한문공부를 일정수준까지는 공부했다는 말이고, 그럼에도 합격하지 못하는 건 내가 자질이 없거나 임용은 글러 먹었거나 한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에 빠지다 보면 급기야 ‘그러니 四書를 이렇게 빨리 끝냈으면 안 됐는데’하는 생각에 이르며 공부를 차일피일 미루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이것이야말로 비합리적인 신념의 끝판왕 격이다.



▲ 후배 민희가 보내준 희망 한 아름이란 선물이다. 기존의 번역서가 있지만 좀 더 깔끔하게 다듬어져서 보기 편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명확히 알게 됐다. 무얼 끝냈다는 의미를 이제야 제대로 음미하게 됐기 때문이다. 

첫째, 끝냈다고 하더라도 끝낸 건 아니다. 그건 기반을 만든 정도에 불과할 뿐, 내가 완벽하게 알게 됐다는 걸 의미하지 않으니 말이다. 더욱이 한 번 했다는 자기 위안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안 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럴 땐 차라리 한 번 보긴 했는데, 여전히 몰라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게 훨씬 낫다. 

‘봤지만 모른다’, 그러니 다시 보고 다시 파고들려는 우직함과 멍청함이 필요하다. 바로 이와 같은 깨달음을 주는 글들엔 김득신의 「讀數記」와 정약용과 황상의 대화인 「壬戌記」, 그리고 중용20의 글, 공자의 증자에 대한 평가들이 있다. 이 글의 내용을 안다 모른다는 가치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멍청스럽게, 알려했고 얼마나 모르는 듯 배우려했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 횟수를 내가 조금이라도 알게 되는 그 순간까지 밀어붙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둘째, 마치는 순간 끝이 아니라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다른 길이 생기고 다른 방법이 강구되며 여태껏 생각해보지 못한 것들이 열린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그것이야말로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끝내면서 어느 부분이든 생각이 바뀐 곳이 있으니, 그건 다른 방향의 변화를 유도하게 되어 있다. 실제로 『중용』을 블로그에 업로드하겠다고 맘을 먹고 나선 책으로 있는 파일, 예를 들면 『시네필 다이어리』, 『비슷한 것은 가짜다』와 같은 책들도 올려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됐고 그래서 아예 카테고리도 만들게 됐다. 

그러니 끝남의 의미를 이쯤에서 새롭게 정의할 수 있겠다. 무턱대고 큰 꿈을 꾸기보다 하나하나 있는 것들을 끝내가기 위해 목표치를 최저로 잡고 해나가는 것이고, 그 과정을 통해, 또는 끝냄이란 결과를 통해 예전엔 전혀 생각도 못해본 것들을 생각하게 되고 실행하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물은 건너봐야만 알고, 나쁜 짓 또한 해봐야만 알며, 한계치를 정하기보다 맘껏 부딪혀 봐야만 무언가가 열린다.                




두 번의 멈칫했던 순간들과  

    

그렇게 여러 생각들이 정리되며 6월 5일부터 내가 썼던 서문부터 시작하여 올리기 시작했다. 그게 어제부로 끝난 것이니, 석 달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고 보면 된다. 체감 상으론 한 달 정도가 걸린 거라 느껴졌는데 무려 석 달이나 걸렸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런데도 올린 시기들을 보다보니 뜸해진 순간들이 보인다. 10을 끝낸 날이 6월 26일인데, 11은 7월 17일에나 시작하고 있고, 18을 7월 31일에 끝냈는데, 19을 8월 23일에나 시작하고 있다. 

처음 멈칫했던 순간에도 무언가를 계속했으니 어떤 이유인지 지금에 와서 농땡이를 폈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일반적인 생각으론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6월 5일의 각오가 한 풀 꺾이기에 최적화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초반엔 확실히 흥미롭기 때문에 막 달려들어 하게 되고, 그게 어느 일정 수준까지는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곧 시들시들해져 버린다(바로 이 마음은 딴 것보다 『카자흐스탄 여행기』에서 적나라게 하게 볼 수 있다. 카자흐스탄 여행기는 지금 와서 다시 올리고 싶었던 것 중 하나인데도 처음엔 ‘하루에 하나씩 올리자’라는 생각이 흐려져 지금은 올릴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고 하는 상황이 됐다). 거기다 이것저것 해야 할 게 늘어나면 더욱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럼에도 초반에 무려 21일이나 버텼다는 건 나름 선방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런 사실이 보여주는 건 무얼 하나 꾸준히 한다는 게 결코 쉽지 만은 않다는 얘기다. 

그러고 나서 14일 간 또 일정을 진행하다가 18장까지 하고 멈칫했다. 그러고 또 20일 정도의 간격이 있는 것이다. 이때는 그래도 최근의 일이라 왜 그랬는지 명확히 기억난다. 『중용』에서 가장 분량이 많은 장은 바로 20이다. 많은 정도가 약간 많은 정도가 아니라 정말 많다. 그건 마치 자전거를 이제 처음 배운 사람에게 서울까지 라이딩을 가자는 격처럼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그런 이유들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무작정 시간이 흐른 것이고, ‘헉 하는 심정’을 넘어 ‘레알하기 싫다는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그러다 양혜왕7을 했을 때처럼 나누어서 부담을 최대한 줄인 상태로 하자는 데에 마음이 쏠렸다. 해야 할 게 많을수록 잘게 나누어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안도감과 성취감을 갖는 것도 중요하니 말이다. 그래서 내용에 따라 나눠보니 크게 5개 정도는 나눠질 것 같았다.                



▲ [사고전서]와 [한어대사전] 등 공부를 위한 도구들이 엄청나게 발달되어 있다. 거기에 한국고전번역원의 글들까지. 참 좋다.




두 번의 멈칫으로 알게 된 것 

    

그렇게 한 고비를 넘고 나니 완전히 수월해졌다. 아래의 표는 두 번의 멈칫이 어떤 차이점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표다.                       





위의 표를 보면 더욱 분명해지지만 난관에 부딪치면 한없이 늘어지지만 한 번 돌파구를 마련하면 진도는 쑥쑥 빠지게 된다. 특히 심적으로 ‘저것은 벽’이라고 느낀 거라면 더욱 그렇다는 점이다. 넘기 전까진 절대로 무너뜨릴 수 없는 성벽, 철옹성으로 작용하지만 넘고 나면 순식간에 그들을 독 안에 든 쥐로 만들어 버리니 말이다. 그러니 위기는 곧 기회라고, 넘어진 그 상황이 곧 더 높이 뛰어오를 수 있는 순간이라고 한 말이 결코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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