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의 길을 끝마치다3
3월부터 제대로 공부를 시작한 이후 『십팔사략』을 7월 13일에 마무리 지은 경험 이후로 두 번째로 맛보는 뿌듯함이다.
그러나 『십팔사략』은 한 권을 제대로 한 게 아니라 우리에게 그나마 의미가 있는 한나라까지만 다루고 멈췄기에 제대로 끝낸 건 아니라는 찝찝함은 있지만 이번의 경우엔 오롯이 마쳤다는 점에서 다르다. 중용 원문, 『중용한글역주』, 『도올선생의 중용강의』까지 세 권으로 함께 공부했기에 그 의미는 더욱 크다.
물론 참고할 서적이 두 권으로 늘어나면서 하나도 제대로 못 봤다는 한계가 표출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기반을 마련한 것이니 다음에 볼 땐 훨씬 수월할 거라고 감히 생각해본다. 그래 이 정도면 됐다. 지금은 완벽完璧이 아닌 미비未備함으로, 하지만 그런 미비함이 쌓이고 쌓이면 그 또한 저력이 된다는 것을 믿고 나가보련다. 중용의 결말을 도올쌤은 ‘성실하게 사는 것’이라 했듯, 그것이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경험해 볼 것이다.
그와 더불어 최근에 유튜브에 업로드된 김용옥 쌤의 영상을 켜놓고 보고 있다. 이미 그의 책에서도 울려 퍼졌던 진심이 영상에선 더욱 더 처절한 외침으로 울려 퍼진다. 그 영상은 2011년에 원강대에서 했던 중용 강의를 담은 내용인데 그렇지 않아도 나도 어제까지 그의 책을 통해 중용을 읽었던 터라 꼭 지금 그 자리에 내가 가서 강의를 듣는 듯한 느낌이 물씬 들었고 그가 하는 얘기들이 이미 책에 모두 쓰여 있기 때문에 무엇을 말하는지도 명확하게 이해됐다.
그 얘기 중에 귀에 콕 박히는 듯 들리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건 90년도에 강의내용을 녹취한 기록물인, 그래서 이번에 함께 업로드 작업을 했던 글과 2011년에 발간된 『중용한글역주』 사이의 괴리였다. 이 두 책의 가장 큰 괴리는 저자 판정에 있다. 이미 뭇 서적들에선 『중용』의 저자는 자사라고 밝히고 있지만 그 당시엔 그걸 비판하셨다. 비판의 논조는 그렇게 이른 시기에 이런 정합성整合性, 체계성을 자랑하는 논문 형식의 이런 글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정도의 얘기를 할 수 있으려면 음양론陰陽論에 기초한 천지론天地論이 발달되어 완숙한 이해의 경지에 이르러야 하며 지인용智仁勇이니 삼달덕三達德니, 구경九經이니 하는 개념에 익숙하고 그에 따라 말하는 분위기가 있어야 하며 그걸 포괄하는 성誠에 대한 논의가 갖춰져야 하니 말이다. 그러니 『도올선생의 중용강의』 때엔 이런 식의 논의가 등장하려면 진나라 이후라고 보았고 그렇기 때문에 자사는 결코 저자가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것이다.
나 또한 그 책을 읽었을 땐 너무도 지당한 말씀이라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2011년에 발간된 『중용한글역주』를 보고 까무라치는 줄 알았다. 그간의 논리를 일순간에 뒤엎고 자사의 저작설을 굳혔으니 말이다. 그걸 증명하기 위해 『공자세가』와 『성자명출性自明出』과 같은 책들, 그동안 위서僞書로 간주되어 온 책들과 비교하며 입증하였다.
책에선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강의를 들어보니 도올쌤이 느꼈던 혼돈, 충격이 확실히 느껴지더라.
무덤에서 자료가 나온 거란 말입니다. 이 자료의 문제가 BC350년 이전으로 다 올라가야 하는 거예요. 그 전에 漢代 이후의 문헌이라고 여러 서적을 참고해가며 몇 백년에 걸쳐서 정교하게 구라를 쫙 펴놨는데 개봉하는 동시에 다 거짓말이 된 거야. 그래서 지금 난리가 난 거야. (중략)
완전히 중국은 개벽이야. BC350년 이전으로 올라가는 문헌들의 수준이 놀랍게 개념적이고 철학적이란 말이야. (중략)
요즘은 우리 중국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완전히 청룡열차를 탄 것 같애. 정신이 없어요. 너무 자료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그런데 한국에서는 나처럼 어지러워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 모르니까. 관심도 없어. 이게 한심한 일이라 이거야. 어느 대학이든 나처럼 청룡열차를 탄 것 같다고 해까닥하는 사람들이 없어.
이게 내 자랑이 아니라 이게 우리나라 학계의 문제예요. 일본학자들은 죽간 자료에 대한 연구에 수백명이 참가하고 있어요. 근데 우리나라엔 한 사람도 없어요. 중용의 근본이 되는 자사의 자료가, 동시에 중용과 똑같은 논의가 되는 자료가, 중용만큼 방대한 자료들이 그냥 나온단 얘기야. 그러니까 중용이 자사의 작이라는 게 입증이 되는 거지.
도올쌤은 ‘청룡열차를 탄 것 같애’라고 표현했다. 그도 그럴 듯이 자신이 여태껏 목소리 높여 주장해왔던 것들이 쌩거짓말이 되고 그런 비판의식조차 없던 사람들이 아무런 내상內傷도 없이 당당하게 있으니 말이다. 자신은 그런 아찔함을 느끼고 학자들도 모두 말로 할 수 없는 혼돈에 휩싸여 있는데 우리나라 학계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다고 안타까워한다. 그 안타까움이 진실한 것이었기에 절절하게 가슴을 울렸다
여기에 덧붙여 학자란 무엇인지에 대해, 공부란 무엇인지에 대해 알려줬다. 귀가 번쩍 뜨이는 얘기다.
중용에 대한 방대한 자료들이 나왔어요. 그러니 옛날처럼 앉아서 공자왈, 맹자왈 하면서 아쿠라 쿠라라고 하면 안 되지. 그것 다 비교해보면서 연구해야 하니까 새로운 관점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중략) 한학을 하면 맨날 뭐 어디 산 속에 틀어박혀서 『주역』을 연구했다고 그러고. 이런 미친 놈들만이 한학자라고 하고 나서니 말야. 이게 진짜 한심한 나라란 말이야.
학문이란 게 그렇게 한학을 한다고 되는 게 아니야. 그런 식으로 오해를 하지 말란 말야. 여러분들이 앞으로 공부를 하더래도 제대로 인문학에 토양을 가지고 인류학적으로, 고고학적으로, 논리학적으로 치밀하게 분석을 해서 하나를 알아도 정확하게 알아야 된단 말야. 그러니 무슨 한학을 한다, 저 사람 한문을 잘 한다 이런 말 절대로 믿지 마세요. 그런 한문은 이제 소용이 없어. 완전히 새로운 자료를 포괄해서 새롭게 안 보면 이게 택도 없어.
우리에게 주어진 사서는 결코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다. 판본문제, 역사흐름의 문제, 그리고 조선조에 받아들여지며 교조화된 문제까지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다. 그런데 그런 흐름들을 거두절미하고 하늘에서 주어진 책인 양 외우고 읽고 있으니, 그게 말이나 되는가? 그래서 도올 선생님은 비판의식, 흐름을 제대로 인지한 상태로 성실하게, 그러면서 새로 나온 자료들을 성실하게 공부하라고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그러니 2018년 닫는 글은 책 편집을 마쳤기에 이 글을 끝내는 의미로 닫는 글임과 동시에 제대로 공부하기 위한, 또 다른 도전을 위한 여는 글이기도 하다. 2009년의 닫는 글은 『개밥바라기별』의 저자 글을 인용하여 답답함을 토로했다면, 이번 닫는 글은 활기찬 미래를 향한 희망을 얘기하며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