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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Jun 19. 2018

건빵, 건빵재를 열다

18년 6월 19일 임용 라이프

드디어 55번 자리에 ‘건빵재’를 열었다. 요즘 나의 카카오톡 프로필은 ‘삶을 건빵하라’다. 이리 봐도 건빵, 저리 봐도 건빵, 건빵 천지다^^.               




대나무에 미친 사내의 이야기

     

박지원의 「죽오기竹塢記」란 글엔 매우 흥미로운 얘기가 나온다. 그의 친구 양호맹梁浩孟은 대나무를 엄청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자신의 호를 대나무 한 뭉텅이라는 뜻을 지닌 ‘죽오竹塢’라고 짓고는, 연암에게 거실에 내걸 편액에 기문을 써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런데 연암은 그게 맘에 들지 않았다. 이미 예전부터 대나무의 덕성에 대해 무수히 많은 글들이 지어졌는데, 거기에 편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걸 보면 연암의 시류에 편승하고 싶지 않아하는 마음도 얼핏 엿볼 수가 있다. 바로 이런 마음 때문에 그는 누구도 감히 지어본 적 없는, 분명히 연행燕行(조선시대에 청나라 사절단으로 청나라를 방문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했고, 그에 따른 여행기는 무수히 지어졌지만 그런 여행기와는 완전히 차별화된 여행기인 『열하일기』를 지을 수 있었던 거겠지. 그래서 연암은 “액호를 바꾸면 기문을 당장 지어주겠다‘는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이쯤 되면 대부분은 액호를 바꿀 것이다. 무에 그리 ‘대나무’에 꽂혔다고 그걸 고집한단 말인가. 더욱이 대나무가 아니어도 자신의 생각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은 무수히 많으니, 그 하나 바꾼다고 자신의 생각이 변하는 것도 아니라면, 연암이 제시한 다른 이름 중에 하나를 선택해도 문제될 게 없다. 

하지만 그는 전혀 바꿀 생각이 없었다. 아니, 대나무가 아니면 정말 안 되었던 거다. 그걸 무려 10년 동안이나 고집하며 자신의 생각을 건실하게(?) 키워갔다고 한다. 이쯤 되면 ‘이 사내, 대나무를 정말 사랑했구나’라고 감탄할 만하다.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연암은 그의 진심을 알게 됐고 결국 기문을 써주게 되었다는 내용의 글이다. 

그런데 연암은 단순히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대나무를 포기하지 않는 친구의 강직한 마음에 감동받아 그토록 거부하던 대나무에 대한 기문을 써준 게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연암의 마음을 잡아 흔든 건 뭐였을까?           



앉으나 누우나 ‘죽오’, 잠깐 사이에도 ‘죽오’. 그리고 매번 글을 잘 쓰는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바로 ‘죽오’를 써달라고 해서 벽에 걸었으니, 벽의 사방이 다 ‘죽오’로 들어찼다. (중략) 이제 이미 10년이나 지났지만, 오히려 조금도 대나무에 대한 생각을 바꾸질 않았다. 천 번 꺾이고 백번 눌렸지만, 그 뜻을 바꾸질 않고 더욱 오래될수록 깊이 간절하여졌던 것이다. 심지어는 술을 부어주며 기문을 써달라 설득하기도 하고 소리의 기세를 더해 윽박지르기도 했다. 내가 문득 침묵하며 응하질 않으면 분연히 얼굴빛을 띠며 삿대질하고 째려보니, 눈썹은 个자 모양으로 떨렸다. 손마디는 대나무의 마른 마디 같았고, 거세고 날카로우며 나뭇가지가 얽힌 듯한 양호맹의 모습이 갑자기 대나무의 형상으로 변했다.

坐臥焉竹塢, 造次焉竹塢. 每一遇能書者, 輒書竹塢而揭之壁, 壁之四隅, 盡是竹塢. (中略) 今已十年之久, 而猶不少變. 千挫百抑, 不移其志. 彌久而罙切. 至酹酒而說之, 聲氣而加之. 余輒默而不應, 則奮然作色, 戟手疾視, 眉拂个字. 指若枯節, 勁峭槎枒, 忽成竹形.      


    

그랬다, 연암이 10년 만에 맘을 바꾼 이유는 그가 진정으로 대나무를 사랑하고 좋아한 나머지, 그의 손마디, 눈썹, 그의 모습이 완전히 대나무와 같아졌기 때문이다. 이걸 들뢰즈는 ‘대나무-되기’라고 표현할 것이다. 좋아한다는 건, 그냥 맘이 간다는 정도를 의미하진 않는다. 좋은 나머지 어느 순간엔 그 대상과 내가 서로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일체가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양호맹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대나무가 되었던 것이고, 어느 날 대나무가 되어버린 친구를 보면서 연암은 그를 위해 기문을 지어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 대나무를 좋아하서 대나무가 되었던 양호맹. 멋지다.




건빵재로 와서 건빵하세요 

    

바로 이 글을 보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던 이유가 이것이다. 대나무에 미쳐 스스로 대나무가 되어갔던 사내가 있다면, 나 또한 건빵에 미쳐 건빵이 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앉으나 서나 ‘건빵’, 잠깐 사이에도 ‘건빵’, 내가 있는 모든 곳이 ‘건빵’, 나 스스로가 ‘건빵’, 사람을 만나도 ‘건빵’, 홀로 공부하고 있으면서도 ‘건빵’이면 충분하다.

저번 주 수요일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카톡이 왔다. ‘민들레 읽기’ 모임은 공부를 그만두고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 방황하던 때 여러모로 도움을 주던 모임이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다양한 공부에 대한 생각도 갈무리해볼 수 있었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생각이 바뀌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희망적인 일인지 느껴볼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여러 다양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과 어울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만으로도 그 시간은 찬란한 우주의 비의를 온 몸으로 흡입하는 양 신선했고 싱그러웠다. 그때 온 카톡은 거기서 알게 된 뭇 인연 중에 한 분인 별나들이님에게 온 것이다. 그분은 나의 프로필을 보고서 어느 부분이 어떻게 좋았는지는 모르지만, 뭔가 삘이 빡 왔나 보다. 그래서 고민할 필요도 없이, 자신이 느낀 그대로의 감격을 전해왔다. 



▲ 과연 이 슬로건이 별나들이님에겐 어떤 의미였던 걸까? 궁금하다. 각자에게 의미가 있어지는 것들이 있다.



그걸 보면서 어떤 문구가, 어떤 글이 꼭 나를 위해 쓰인 것처럼 느껴지던 때가 떠올랐다. 그 순간만큼은 그 글의 유일한 독자는 나인 것이고, 오로지 나를 향해서만 메시지가 전해져 온다. 그렇게 되면 너무 감격한 나머지 도저히 몸을 가만히 둘 수 없게 된다. ‘건빵’이라는 나의 별명도 그런 짜릿한 흥겨움 속에서 만들어졌고 여전히 나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별명인 것이다. 

건빵재가 문을 열던 날, 건빵은 다시 한 번 나에게 ‘건빵재가 오픈했으니, 누구든 찾아와 반갑게 사는 이야기를 나눠요. 건빵이 건빵재를 열고 삶을 건빵하기 위해 오늘도 그곳에서 건빵하고 있답니다.’라고 소곤소곤 이야기를 건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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