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5월 30일 임용 라이프 2
지금 한반도엔 평화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다. 다음 주면 북미정상회담을 할 것이고, 그 다음 날엔 지방선거도 할 것이다. 어쩌면 국내외적으로 많은 변화의 가능성을 담고 있는,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역동적이며 모든 희망을 한 아름 품고 있는 가능성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이런 분위기가 되기까지 무수한 과정들을 지나왔다는 사실이다. 일례로 12월 까지만 해도 이런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남북의 대결모드는 계속 진행 중이었고, 머지않아 전쟁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름하야 일촉즉발의 상황, 북한은 핵실험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보였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로켓맨’이란 비하발언과 함께 격앙된 반응을 여지없이 보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오죽했으면 다른 나라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린다 해도 선수단을 파견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반응이 나왔겠는가.
하지만 북한의 1월 신년사에서 북한선수단과 응원단을 파견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고, 그 논의는 아주 급속도로 진행되어 남북 단일팀 구성, 삼지연관현악단 공연, 김여정(김일성 일가 남한 최초 방문) 방문과 문대통령 회담, 판문점에서의 남북정상회담과 같은 일련의, 하지만 무엇 하나 결코 가볍지 않은 사건들이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평행선으로만 달려가던 두 개의, 그래서 영영 만나지 않을 것 같던 선이 어느 한 선이 약간 편위를 그리며 휘기 시작하여 어느 순간에 마주쳤고 그게 마주친 후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만들며 지금의 상황에 이르게 됐던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변화의 과정들, 그리고 뒤섞임,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클리나멘의 한 단면이라 할만하다.
남과 북만큼이나 후배가 보내준 전공 관련 서적은 나에게 모처럼 클리나멘이란 무엇인지 충분히 느끼게 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면서 첫 번째 클리나멘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턴 두 번째 클리나멘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우선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단재학교에서 근무할 때로 돌아가 봐야 한다. 2011년 10월에 단재학교에 수습교사로 첫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늘 내 꿈이 ‘일도 하고 공부도 하며 모르는 것도 알아가고 사람도 알아가는 삶’이었다. 다행히도 그 당시 대표교사님도 그런 생각에 동의했기에 나에게 “수요일마다 오전에 공부모임이 있는데, 학교에 나오지 않아도 좋아요. 그곳에 가서 공부하도록 하세요.”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었던 것이다. 그래서 참여하게 된 모임이 ‘민들레 읽기 모임’이다.
『민들레』는 격월간 잡지로 학력 경쟁, 성적지상주의, 교과 학습 위주로 휘몰아가는 기존의 교육을 반성하며 여러 다양한 교육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묶어 교육이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잡지였다. 이미 그곳에는 여러 해전부터 독자들이 자발적으로 공부모임을 만들어 진행하고 있었고, 서울에선 매주 수요일 오전에 함께 모여 과월호 하나씩을 선정해 읽고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내공이 쎈~ 분들과 어우러져 굳어버릴 대로 굳어버린 내 생각을 유들유들하게 펴나가는 과정이었다.
이쯤에서 고백하자면 임용을 공부하면서, 좋은 교사상을 꿈꾸다보니, 생각은 더욱 고정되어 갔고 더욱 자임하는 마음은 커져만 갔다. ‘난 ~~한 교사가 되어야 해’라는 생각은 분명히 확고한 자신에 대한 신념이긴 했지만, 그런 생각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좋은 교사상’과 ‘나쁜 교사상’이 있다는 생각으로 나 자신을 한계 지었으니 말이다.
바로 그런 시기에 단재학교의 교사가 되었고, 그리고 이런 모임에 참여하게 된 것이니 행운 중 행운이라 할만하다. 내공 쎈 누님들과 한바탕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내가 구축한 교사상이나 교육상이란 게 얼마나 위태로운 절벽 위에 홀로 세워진, 모래 위에 아스라이 세워진 성채인 지를 여지없이 까발렸다. 즉 그 순간 느꼈던 건 확고한 신념이나, ‘내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자임하는 마음이 아닌, 그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배워가며 언제든 생각의 방향을 바꾸어 나갈 수 있는 열린 마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단재학교에서 여러 유형의 아이들을 만나는 데에 매우 많은 도움이 됐다.
그 모임은 고작 6개월 정도를 나갔고 2012년부턴 나가지 못했다. 학교도 여러 과정들이 정해지면서 나도 영화팀 교사로 새로운 커리큘럼을 만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멀어졌던 게 아쉬워지던 2015년에 불현듯 모임에 참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요일에 하는 건 정기모임이고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엔 1박2일로 모여 단행본 하나를 정해 이야기를 나누는 단행본 읽기모임이 열리는데,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참여하기로 한 것이다.
바로 이 모임에서 앵두님을 처음으로 만났다. 앵두님이라고 하면 그저 흘러 다니는 여러 얘기를 통해 들어봤을 정도로 민들레 모임에선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고등학생 시절에 민들레에 처음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고, 지금은 어디 외국에 나가있다는 얘기들 말이다. 그런 얘길 들으면 ‘그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늘 궁금하긴 했는데, 드디어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보게 됐던 거다. 앵두님에겐 어땠을지 몰라도 적어도 나에겐 익숙했던 그래서 한 번은 만나보고 싶었던 사람을 만난 것이어서 기억에 남는다.
그 후에도 단행본 읽기 모임에서 한 번 더 마주쳤고, 크루즈를 선원이 되어 몇 달씩 해외에 다니는 걸 보며 페북에 댓글을 남기는 수준으로 알고 지냈다. 그렇게 두 번의 크루즈 여행을 마치고 작년 어느 때엔가 드디어 한국에 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래도 아예 알지도 못할 땐 그냥 궁금하기만 했지만, 그래도 단행본 모임을 통해 알고 난 후이니 편하게 느껴지더라. 그래서 “언제 시간 날 때 서울 좀 오세요. 크루즈 선원이란 게 어떤 건지?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이 어떤지도 궁금해요”라고 편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됐으니 말이다.
그래서 올해 1월에 종로 한 복판에서 정말 오랜만에 만나게 됐고 여러 희망 가득 찬 이야기(or 불안 가득 안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물론 나도 6년 간 다니던 단재학교를 그만두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고민하고 있던 때라 서로 더 긴밀하게 얘기할 수 있었다. 상황은 달라도 앞날이 불투명하고 지금의 현실에서 헤매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엔 약간 다른 것을 꿈꾸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크루즈 선원이나 다른 게 아닌, 한국어교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학원에 가는 것과 코이카에 지원하여 해외자원봉사를 2년 정도 하는 것, 여러 방향으로 고민하고 있다고 하더라. 대학원 3년에, 코이카 2년 정도의 시간을 보내면 5년이란 시간이 후딱 흐르게 된다. 함부로 섣불리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사람이야말로 자기 좋아하는 것을 따라 잘도 다니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했고, 그 순간 왠지 모를 한파 때문인지, 인생의 서글픔 때문인지, 막막함 때문인지 비애감에 젖어 있던 나도 ‘내가 좋아하는 게 뭘까?’하는 약간은 신선한 생각이 스칠 정도였다.
그 후로 나는 전주에 내려와 다시 터를 잡았고 몸에 적응되지도 않은 임용공부를 다시 시작하여 ‘적응하냐, 낙오하냐 그것이 문제로다’ 같은 주먹구구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공부체질이란 게 따로 없겠지만, 막상 결과가 주어지는 공부를 하려니 좀이 쑤셨고, 7년 만에 한문을 보니 머리는 지끈지끈, 몸은 쑤셔쑤셔하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다 우연하게 근황을 알게 됐고 지금은 청주에 자리를 잡고 대학원에서 할 공부를 미리 보고 있다고 하더라. 그리고 매우 놀라운 소식도 들었다. 청주에서 ‘민들레 읽기 모임’을 만들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조직을 하다 보니, 세 사람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시작하기로 했다는 거다. 오 마이갓~ 나 같은 사람은 맘을 먹어도 미적미적대는 데 반해 이 사람은 이미 맘보다도 행동이 훨씬 민첩하고 그냥 내지는 컨셉이지 않은가. 워낙 사람을 좋아하는 성향탓에 뭔가 할 거 같은 느낌이 들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아주 칭찬해~’를 여러 번 날려줬다. 한시 중에 ‘우거진 잎사귀에 꽃은 가려져 봄은 뒤에도 남아 있고(密葉翳花春後在)’라는 시가 있던데, 그 구절마냥 ‘앵두나무 밑엔 민들레 가득 피어나네’ 같은 느낌이더라.
그러다 이번엔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잠시 시간을 내어 친히 전주에 행차하셨다. 이런 경우가 평행선을 그리던 선이 마주친 경우라 할 수 있는데, 이럴 때마다 자동적으로 『논어』의 ‘벗이 있어 먼 곳에서부터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않으랴?’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이 구절에 대해 수많은 해석이 있지만, 그 중에도 ‘벗=나의 가치를 알아주기에 천리도 마다하지 않고 오는 지음’이라는 해석을 가장 좋아한다. 분명 천리든 만리든 물리적인 거리이고, 지금은 공자가 살았던 당시에 비해 교통편이 발달했다 해도 맘을 먹지 않으면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물리적인 거리조차, 가볍게 여겨질 수 있는 그 마음, 바로 그 마음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직은 어색한 게 분명하다. 짐짓 쾌활한 척 연기도 하고, 때론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며, 한껏 목소리 톤을 올려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몇 번 만났다고 조금은 편안하게 얘기하게 됐다는 점이다. 이번 얘기를 통해 교육청에서 최저임금의 기간제 직원을 뽑는 상황에서도 세 명의 면접관이 마치 대기업 면접장처럼 매우 아주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는 정식 면접을 진행한다는 것과, 충북대는 거점 대학임에도 조교가 너무 공무원적인 마인드로 일처리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거기에 덧붙여 IPC세계장애인사격선수권 대회에 자원봉사로 참여했었고 그런 인연으로 체육회 사람들을 알게 되어 그분들과 영어스터디를 시작하게 됐다는 것과 청주에 독립서점이 문을 열어 그 분에게 인사를 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려 한다는 것, 그리고 작은 상점 하나를 계약해서 그곳에서 무언가를 해볼 생각이라는 것까지 들었다.
이것만으로도 가슴 뛰는 얘기였지만, 여기서 멈추질 않고 또 하나의 이야기를 해준다. 그건 바로 앵두님의 대학교 동기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앵두님은 경제학부를 나와 지금은 영어란 매개체로 사람을 만나는 일을 하는, 어쩌면 전공과 아무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지만, 그 동기라는 분도 학과를 졸업해선 시민활동을 하다가 지금은 인쇄소 사장이기도 하고, 지금은 일본 어딘가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온통 뒤죽박죽이라, 그게 한 사람의 이야기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앵두님만큼이나 다채로운 삶을 사는 이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앵두님은 언젠가 그 사람을 만나 어떤 인생의 스토리가 있는지, 그리고 그런 순간들에 어떤 마음가짐으로 선택을 했고, 또 어떤 계기들이 있었는지 들어보려 한다는 거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콩닥콩닥 뛰며 나도 몰래 “나도 나도!”를 외치게 됐을 정도다. 역시 그 친구에 그 친구인 건가~
이럴 때면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란 시가 떠올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우주의 비의를 한 몸 가득 안고 있는 존재들이라는 게 느껴진다. 누구 하나 가벼운 존재가 없다면, 그 존재들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 하나하나 배워가고 기록해 가고 싶다는 맘도 강렬해지고 말이다.
요즘 연암 박지원을 다시 읽고 있는데, 연암의 우울증 가득했던 20대의 순간들이 절대 남일 같이 느껴지지 않는다. 무엇이 그리도 답답했던 건지, 무에 그리 서글펐던 건지 그는 매일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그랬던 그를 살린 것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여러 얘기들을 듣고 지은 ‘기이한 사람들의 기이한 이야기’였다. 그게 『방경각외전』의 여러 소설들로 남아 있는데, 난 그런 이야기를 듣고 그걸 기록할 당시의 연암 마음이 어땠을지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이야기는 기이한 이야기가 아닌, 우리네 이야기며, 나의 이야기라는 동질감이 들었을 것이고, 그걸 기록해나가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진, 무의미해질 대로 무의미해진 관점을 재정립할 수 있게 됐을 것이다. 때론 만 가지 보약보다, 값비싼 명약보다 어떤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의 폐부를 찌르고 나를 일거에 바꾸기도 하고, 없던 의욕을 활활 불태우기도 한다. 바로 지금의 순간처럼 말이다.
여담이지만, ‘앵두’라는 별명이 왜 생겼는지도 알게 됐다. 그건 어려서 살던 동네에 앵두나무가 있어서 늘 먹던 것이란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댐(달방댐)이 생기면서 그 지역은 수몰되었고 앵두나무는 수몰되지 않고 있었지만, 베어버렸다는 거다. 아마도 그런 아쉬움의 정조를 담고 있는 별명인 거 같더라.
삶에 정답이 없다면, 그런 좌충우돌, 이랬다저랬다하는 변덕 속에 희망이 있으리라 믿는다. 모처럼 임용이라는 세계에서 벗어나 가슴 뛰는 이야기, 그리고 도전 가득한 이야기, 세상 사는 이야기,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게 바로 사는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