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29일(토)
신고를 마친 후엔 관리인 한 명이 우리 차에 동승했다. 우리를 안내함과 동시에 감시하기 위해서다. 조금 더 달리면, 쇠줄로 자동차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놨다. 그곳을 관리하는 사람이 나와 우리의 신원을 확인하고 나서야 자동차가 들어갈 수 있도록 쇠줄을 풀어준다. 바로 거기서부터 알틴에멜 국립공원이 시작되는 것이다.
‘왜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관리를 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자연스레 들었다. 그건 꼭 뭔가 엄청난 것이 있어서 이렇게 관리해야만 한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비포장 길을 달리고 또 달린다. 차는 수시로 덜커덩거리며 광활한 벌판 속으로 들어간다.
그곳의 광경은 절대 그곳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절경이었다. 그리고 그 너른 대지에 말을 비롯한 짐승들이 자유롭게 살고 있다. 말이 무리를 지어 모여 있는 것을 차를 타고 가면서 보니, 이곳이야말로 ‘인간의 자연 지배’를 무색하게 하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이 공원은 한국의 국립공원들이 그렇듯이 ‘인간을 위한 공원’이 아니라, ‘자연을 위한 공원’이었던 것이다.
그와 같이 여태껏 본 적도, 느껴본 적도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공원을 우리는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가는 길엔 이름을 알 수 없는 짐승이 맹렬하게 달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 속도가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우리 차보다도 훨씬 빨랐다. 기사 아저씨가 그걸 보고 속도를 높이며 그 짐승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짐승이 화들짝 놀라며 도망가기에 바빴다. 이런 식의 경험을 어느 곳에서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얼핏 보기엔 계속 해서 같은 장면만 보이며, 덜컹거림 때문에 앉아있는 것도 힘이 든다. 그래서 ‘뭐 이런 고생을 하러 여기까지 와야 하나?’라는 불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자연과의 감흥을 상실한 인간이 겪을 수밖에 없는 인과응보일 뿐이다.
단재친구들은 밖을 내다보지도 않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경험의 과잉으로 세상에 대해 흥미가 없어진 것인지, 이성적인 사고만 강조하다보니 그와 같은 경이로움엔 의미부여를 할 수 없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난 그 어떤 경우든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오만한 착각으로 자연과의 일체감이 상실되면서 겪게 되는 소외감이라고 생각한다. 이성적으론 세상을 지배했을지 몰라도, 그런 만큼 자연히 점차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분리되고 고립되게 된 것이다. 예전엔 ‘자연 속의 인간’이었다면, 지금은 ‘인간과 자연’이 되었다. 둘 사이엔 날카로운 경계선이 그어져, 더 이상 자연을 이해하려 하지도 자연과의 연결점을 찾으려 노력하지도 않게 된 것이다(한국의 사대강 공사는 ‘인간과 자연’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예다).
여행이 끝나고 나서 들었던 얘기지만, 아이들은 알틴에멜로의 여행이 별로였다고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말했다. 이유는 딱 한 가지다. 사막 자체의 체험은 신기하고 좋았지만, 30분 정도의 체험을 위해 오고 가는 데만 8시간이나 걸렸기 때문에, 신기한 것을 체험한 것치고는 시간 낭비가 심하다는 것이다.
이성적인 사고로 세상과 관계 맺기를 하면서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더 이상 현대인들은 무지개를 보면서, 무지개 너머엔 다른 세계가 있다거나 무지개는 하느님이 노아에게 보여준 약속의 증표라는 환상을 갖지 않는다. 단순히 대기 중에 떠있는 물이 햇빛을 받아 여러 색의 스펙트럼을 드리운 것이라는 과학적인 상식으로만 생각할 뿐이다. 과학적인 이성으로 자연에서 환상을 제거하고 이해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고 지배 가능한 대상으로 만드는 사이에, 인간은 점차 자연의 경이로움을 볼 수 없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단재학생들에게 알틴에멜의 자연환경은 카자흐스탄 어디서나 볼 수 있던 그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민둥산’, ‘허허벌판’ 등의 몇 단어만으로 알틴에멜의 자연환경을 바라보니 별 것 없어 보였던 것이다. 그러니 ‘시간낭비’라고 느끼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과연 우린 사막만 체험하러 간 것일까? 알틴에멜은 정말 별 것 없는 곳이었나? 만약 가는 동안 알틴에멜 국립공원의 자연의 보고寶庫를 보고 경이로움을 느끼거나 환상을 품을 수 있었다면, 그리고 그곳이 칭기스칸의 발자취가 남겨진 곳이라는 인식이 있었다면 전혀 다른 반응이 나오지 않았을까? ‘시간낭비’라는 서술이 아닌, ‘이것을 보기 위해 시간을 들이고, 육체적인 고통을 감내할만 하다’라는 서술로 말이다.
바쁘면 바쁠수록 열정은 소거되고, 삶은 텅 비어버린다. 이런 구조에선 자신의 욕망에 ‘반하는’ 일을 ‘열나게’ 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질수록 행복이나 지혜와는 점차 멀어지는 어이없는 역설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 코드화된 방향을 벗어나 새로운 리듬을 만드는 것, 삶과 지식의 새로운 배치를 구성하고,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이질적인 집단들의 네트워크를 만들 때 속도, 균질화, 화폐의 삼중주는 깨어진다. …… 이 조급증이 시간의 상상력을 얼마나 협소하게 만들었는지! 그 결과 인간은 우주와 교신할 능력도, 자연과 감응할 힘도,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장엄함도 모두 상실하고 말았다.
-고미숙, 『나비와 전사』, 휴머니스트, pp 85
이성적인 사고는 모든 것에서 환상을 걷어내고 모든 것을 잘게 쪼개어 파편화 시켰다. 육체와 정신을, 자연과 인간을, 삶과 죽음을, 나와 너를 날카롭게 나눈 것이다. 나라는 신체 영역 밖의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타자화 시킨 후에 남은 나라는 빈껍데기에 ‘주체(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이 아주 대표적인 예다)’라는 말을 붙여 그럴듯해 보이게 만들었다.
현대인의 고독은 실존적인 차원의 문제라기보다 시대가 만든 문제라고 봐야 옳다. 철저하게 모든 것들과 결별한 나 자신은 초라함을 온 몸으로 맛보며, 외로움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존재의 협소함은 모든 것들에 무관심하게 만들었고, 관계 맺기를 어려워하게 만들었으며, 죽음의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현재의 삶을 좀먹게 만들었다. 그런 것들이 알틴에멜의 여행에도 여지없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알틴에멜로의 여행을 통해 우리가 잊고 산, 놓치고 산 삶의 다른 면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됐다. 과연 잘 사는 게 무엇이며, 과연 제대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