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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Jan 05. 2019

치열하되 여유롭게

2013년 7월 3일(수)

그렇다면 치열함이 아닌 기운을 보전하거나 양생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했다. 그게 바로 치열함의 반대면에 있는 ‘여유’였던 것이다. 그건 곧 ‘자연스런 흐름에 몸을 맡긴다’는 말이기도 하다.                




힘과 치열함만으로 할 수 없는 것들

     

운동을 해본 사람은 안다. 무식하게 힘만 써서는 할 수 있다는 게 없다는 것을. 고등학교 체육시간에 쇠공 던지기를 했었는데, 난 힘만 믿고 던졌지만 발 앞에서 쿵하고 떨어졌다. 그런데 다른 학생들은 나보다 힘이 약한데도 멀리까지 던진 것이다. 그땐 운동신경이 없어서 그렇다고 날 탓했지만, 지금은 알 것 같다. 그건 운동신경 문제가 아니라, 흐름을 타지 않고 힘으로 흐름을 끊으려 했던 게 문제였다는 것을 말이다. 힘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조건은 될 수 있지만, 그걸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한 거였다. 힘만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여유를 찾아야 한다. 여유를 찾으려면 당연히 하나의 방향성을 고집하는 것이 아닌, ‘흐름’을 읽고 그에 맞게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 전주천의 모습. 모든 것엔 흐름이 있다. 그 흐름을 타야 하는 거다.




여유를 품어라

     

흐름에 맞게 가려면, 강한 것과 치열함에 대한 그릇된 관념 자체를 놓아야 한다. 세상은 누구나 강한 자가 되길, 치열한 자가 되길 원하고 있다. 그런 식의 세상에서 유포한 관념들을 나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여 여태껏 살아온 것이다. 

하지만 자고로 동양사상은 그와 같은 관념에 반기를 들며 사상을 형성해 왔다. 더욱이 전쟁을 위한 조언을 하는 병법서에 강함과 치열함을 거부하는 사상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이러니하다고 느껴질 것이다. 전쟁이야말로 강대 강의 대결이며, 치열함과 치열함의 대결이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수많은 전쟁을 하다 보니, 치열함과 강함이 전쟁을 더욱 불리하게 만든다는 것을 경험했기에 이와 같은 말이 나온 걸 터다. 아래의 글을 읽어보자.           



군참에 말했다. “부드러운 것은 강한 것을 제어할 수 있고, 약한 것은 굳센 것을 제어할 수 있다”

軍讖曰: “柔能制剛, 弱能制强.”      


부드러운 것이란 착하고 아름다운 덕이며, 강한 것이란 사람이나 사물을 해치는 악덕이다. 약한 사람은 사람들이 모두 그를 돕지만, 굳세기만 한 사람은 사람들이 모두 그를 공격한다. 부드러움도 쓸 곳이 있고, 강함도 쓸 곳이 있으며, 약함도 쓸 곳이 있고, 굳셈도 쓸 곳이 있다. 이 네 가지를 모두 겸하여 가지고서 형편에 따라 알맞게 써야 한다.” 『육도삼략』 「상략」 2

柔者, 德也; 剛者, 賊也. 弱者, 人之所助; 强者, 怨之所攻. 柔有所設, 剛有所施; 弱有所用, 强有所加. 兼此四者, 而制其宜. -『六蹈三略』 「上略」 2      


    

부드러움과 약함이 강함을 이긴다’라는 말이 지닌 힘이 이 글의 핵심이다.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하기는 쉽지 않다. 나 또한 여태껏 그런 ‘강함’만을 추구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이 말을 이해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 말은 오래도록 나에게 화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이나마 이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여유를 품지 않은 치열함은 남에겐 폭력이 되고 자신에겐 기만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식의 기만이나 폭력을 행사하면서 스스로 ‘최선을 다했노라’ 착각하며 살아왔던 것뿐이다. 그러니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도 좋을 수가 없었다. ‘약한 사람은 사람들이 모두 그를 돕지만, 강한 사람은 사람들이 모두 그를 공격하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모두를 은연중에 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힘이 부쳤던 것이다. 여기서 강함은 의지의 강함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남에게 폭력적으로 행사되는, 그래서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강해보여야 한다는 강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건 내면의 약함을 은폐하기 위해 짐짓 강해보이는 척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젠 치열함보다는 여유를, 굳셈보단 부드러움을, 강함보단 약함을 더 추구하려 한다. 최현배 선생님의 “휘어진 대나무를 바로 잡으려면 똑바로 펴서만은 아니 되네. 휘어진 만큼 반대편으로 구부려야하는 걸세.”라는 말씀처럼, 여유나 부드러움, 약함을 더 강하게 추구하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넘어진 땅에서 손으로 짚고 일어설 것이며 학생들과의 관계에서도 여유롭게 관계 맺기를 해나갈 것이다.           



▲ 낙숫물이 바위 뚫듯, 치열함보단 여유로운 성실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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