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학년도 한문임용 낙방기 2
2018년 1월에 제주도로 무작정 떠나 생각지도 못한 자전거 일주를 했다. 아마도 그렇게 홀연히 떠날 수 있었던 데엔 내심 ‘뭔가 변해야 한다’는 긴박함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6년간 다녔던 단재학교를 그만두게 되었고 ‘이젠 뭐 하고 살지?’라는 실존적인 고민까지 안게 되었다.
그럴 땐 여러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게 도움이 된다. ‘나의 삶’이라 규정하고 ‘내 맘대로 할 수 있다’고 착각하더라도, 내 맘대로 되는 것보다 되지 않는 일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그럴 때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그때 준규쌤과의 만남이나 앵두와의 만남이나 경일이 형과의 만남은 인생의 변곡점에 놓인 나의 생각을 갈무리하는 데에 크나큰 도움을 줬고 생각지도 않았던 임용시험에 재도전할 수 있는 힘을 줬다.
본격적인 공부는 3월에 전주로 다시 내려오고 임용고시반에 들어가면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 생각만큼 공부란 게 쉬운가? 더욱이 오랫동안 하지 않았던 한문공부를 한다는 것, 그것도 체제가 완전히 바뀐 공부를 한다는 건 답답하기만 한 일이었다. 하루 내내 책상에 앉아 공부하려니 좀이 쑤실 수밖에 없었고, 기본마저도 잃어버렸던 한문을 봐야 한다는 건 더 큰 고통이었다.
3월 한 달 내내 헤매고 또 헤맸다. 원래 전주에 내려올 땐 여러 가지 기대가 있었다. 임용을 공부하는 방식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손쉽게 택할 수 있는 게 노량진 학원에 가서 공부를 하는 방법이다. 임용 중심으로 가르쳐줄 교수진들이 있고 그것 하나만을 위해 함께 공부할 스터디팀들이 있으니 말이다. 더욱이 그 당시에 난 서울에 집이 있었기 때문에 전주에 내려오는 것보다 서울에서 공부하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굳이 전주로 오고 싶었던 것은 임고반에서 공부하던 아련한 추억이 있기 때문이고 이곳에 오면 학과 후배들과 스터디팀을 구성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막상 임고반에 들어와서 보니 임고반엔 한문교육과 학생들이 없더라.
기대했던 스터디팀은 꾸릴 수도 없었고 또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예전에 하던 방식대로 공부하게 되더라. 뭐 3월 한 달은 ‘경서를 읽으며 기본이나 닦아야지’라고 편하게 생각하던 때라 크게 동요하진 않았지만, 맘 한 구석엔 불안이 싹트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렇게 『논어』를 한 번 쭉 보는 것으로 3월 한 달을 보냈고 틈틈이 『연암을 읽다』라는 책과 병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3월 한 달을 보낸 소감은 ‘뭔가 공부를 한다고 하긴 했지만 남는 게 없다’는 거였다. 그렇게 보내고 나니 기시감마저 들었다. ‘이거 이거 예전에도 이렇게 공부하다가 결국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었는데’라는 생각 말이다. 뭔가 열심히 보고 있고, 뭔가 많은 것을 한 것 같은데 그건 피상적인 느낌으로만 드는 거지 실질적인 실력의 향상까지 이르진 않는다는 경험을 새삼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계속 머릿속엔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다. 예전에 하지 않던 방식이어야 했고,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식이어야 했다. 하지만 과연 그게 뭔지는 나도 모르고, 또 임용을 합격한 사람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선 어쩔 수 없이 더 많은 경험을 통해 나만의 방식이 뭔지, 내가 잘 할 수 있는 게 뭔지 내가 찾아내야만 한다.
운 좋게도 4월엔 여러 가지 일들이 발생했다. 스터디팀을 꾸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차에 진리관 스터디룸에 한문과 아이들이 스터디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무작정 그 아이들에게 들이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공부하는지, 그리고 뭘 공부하는지, 괜찮다면 나도 들어가서 공부할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아이들이 스터디를 하겠다고 신청해놓은 시간에 맞춰 그 앞에 어슬렁거려 보았다. 그랬더니 점심시간이 지나 아이들이 한 무대기 올라오더라. 거기엔 이미 알던 후배도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말을 섞을 수 있었다. 그 스터디팀은 5명이서 하고 있었으며 한 주에 한 번씩 스터디를 하지만, 날마다 서로의 시간을 체크해주고 경서 위주로 일일 스터디도 진행하고 있다고 말하더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통해 ‘아마도 개인 공부는 잘 안 되니 함께 집단지성을 발휘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에게 힘을 주고 시간을 체크하며 독려해줄 수 있는 관계이니 말이다.
그런 얘기들을 통해 한문공부를 어떻게 하는지 조금이나마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누구나 그러하듯 체계라는 건 있을 수 없다. 한문의 범위는 무한정이라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한다고 단언하며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아이들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만남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교수님들이 진행하는 스터디가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바로 그 다음 주부터 스터디에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되었다. 『소화시평』 스터디는 잠자고 있던 한문 공부 세포를 깨우기에 최적이었다.
한문은 늘 ‘재밌고 알고 싶은 것’이라 생각했었다. 생각은 어디까지나 이상적이었음에도 현실은 늘 궁핍하기만 했다. 예전에 공부할 땐 임용합격이라는 결과치만을 보고 하는 공부라 그 중압감에 질식하기 일보 직전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말로는 하고 싶다고 그렇게 외쳤으면서도 실제론 도망 다니기에 바빴던 것이다.
하지만 소화시평 스터디를 하며 한문공부를 하는 재미에 흠뻑 빠질 수 있었고, 거기에 덧붙여 어떻게 공부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까지도 새롭게 창안할 수 있었다. 그 방법이란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고, 좋아하는 방식으로 온축해가는 것이다.
단재학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전엔 그저 일기장에 남들 보지 않게 나만의 언어를 뱉어내는 수준이었는데, 이때를 계기로 남들도 볼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6년 동안 생활하며 수많은 글들을 남겼고 그건 나의 경험치가 되었다.
새로운 방법이란 바로 그런 경험치를 한문공부에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다. 3월에 좌충우돌하며 고민하던 것이었지만 한문공부를 했던 것을 블로그에 그대로 올리고 늘 볼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본격적으로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중국역사’를 올리기 시작했고 『소화시평』, 『맹자』 등으로 그 범위는 확대되어 갔다.
재밌게도 이렇게 새로운 공부방식,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방식을 적용하고 나니 공부에도 탄력이 붙더라. 그래서 3월 한 달을 보내고 나선 ‘공부했지만 남는 게 없다’라는 생각만 들었는데, 이때부턴 ‘공부했지만 역시나 기억에 남는 건 없는 건 같지만, 그럼에도 블로그엔 흔적이라도 남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렇게 4월부터 시작했던 한문공부를 블로그에 담는 과정이, 작년 내내 이어졌고 11월 24일에 임용고시를 보기 전까지 계속 되며 온축해갈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임용시험엔 결국 낙방했지만 합격에 거의 근접한 점수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시험 결과는 낙방이지만 매우 만족할 만한, 그리고 올해는 작년에 미처 하지 못했던 여러 실험들까지 진행하며 해볼 수 있겠다는 희망이 어린다. 그래서 기분 좋은 낙방이라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