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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Jan 14. 2018

무작정 제주로 떠나는 이유

2018 나 홀로 제주 여행 1

닭의 해에 태어난 나에게 닭의 해인 2017년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해였다. 단재학교에서의 생활이야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고 6년차 교사가 된 만큼 중학교 1학년 때부터 6년 간 생활해온 민석이와 잘 마무리하는 해이자, 단재학교 학생 외에 다른 학교 학생들을 만나 영상을 만드는 작업을 해보기도 하는 등 도전이 가득한 해였으니 말이다.

그뿐 아니라 송파마을예술창작소에선 매달 한 번씩 지역민들과 만나 독립영화를 보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도 이끌 수 있었으니, 좀 더 사람과 사람, 관계와 인연에 대해 생각을 넓힐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지금 쓰는 기록은 제주도 여행기이기에 이에 관한 내용은 별도로 정리하도록 하겠다.               



▲ 마을예술창작소에서 독립영화를 보고 함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서 좋았다.




즉흥적인 제주 여행, ?   

  

그렇던 2017년이 흐르고 눈 깜빡할 사이에 2018년 개의 해가 밝았다. 헌 해가 지고 새 해가 밝는다고 뭔가를 꾸미거나 누군가를 만나거나 하진 않았다. 부산함보단 지금은 고요함 속에 차분하게 새해를 맞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헛헛한 기분으로 방에 앉아 있으려니 도무지 알 수 없는 울분 같은 게 올라오고, 왠지 모를 갑갑함이 나를 삼키려 하더라. 늘 군중 속에 있었기에 이와 같은 고독함을 그리워했으면서도 막상 방학이 되어 고독과 쓸쓸함의 한 가운데 있으니 그걸 만끽하질 못하고 한껏 몸서리치고 있었던 거다. 역시 놀면 일하고 싶고 일하면 쉬고 싶으며, 무리 속에 있으면 홀로 있고 싶고 홀로 있으면 무리 속에 있고 싶다고 하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심보를 지녔다.

아직은 내 자신이 많이 약하다는 사실을 직시한 채 약간이나마 숨 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경강선 KTX를 타고 강릉에 가볼까 하다가 제주도행 비행기 티켓을 엉겁결에 끊게 되었다. 역시 이럴 때 보면 나란 인간은 늘 계획적으로만 살아왔고 그런 계획대로 살길 원하면서도, 이처럼 막상 상황에 닥쳐선 참 즉흥적이고 막무가내인 측면이 있다. 아마도 그런 즉흥적인 모습은 너무도 짜인 틀 속에서만 살려했던 내 과거에 대한 반동이리라.               



▲ 티켓을 충동적으로 예매했다. 그건 내 삶에 대한 반동이기도 하다.




떠나면 보이는 것들

     

때론 이처럼 막무가내로 여행을 떠날 때가 있었다. 2009년에 했던 한 달간 나의 두 발로 걸어 목포에서 고성까지 갔던 국토종단이나 2011년에 목적지도 없이 정처도 없이 그저 발길이 닫는 대로 가며 사람을 만나고자 했던 사람여행이 그것이다. 해야 할 일도 있었고, 미래를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야함에도 그 당시의 나는 그렇게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말하니 매우 운명론적인 스멜이 물씬 풍기지만, 그건 운명이라기보단 그저 ‘그렇게 안 하면 죽을 것 같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늘 두려워 그 자리에 머물려 했고, 늘 이것저것 재며 ‘지금 말고 나중에 하자’라고 미루어 왔던 게 그 순간엔 그런 여행으로 폭발된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반복되는 일상에 빠져들어 더 이상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고 반복되는 쳇바퀴처럼 답답하게만 느껴질 때, 호기심에 모든 게 새롭게 보이던 삶이 너무나 평범해져서 더 이상 아무런 궁금증도 일으키지 못할 때, 그런 일상과 그런 삶을 떠날 수 있어야 한다. 떠난다는 건 일상에서 멀찍이 떨어져 바라볼 수 있게 하여 그 일상의 가치를 다시금 느끼게 하며, 눌러앉은 삶을 조망케 하여 늘 똑같은 삶이 아니었음을 알게 한다.



▲ 고성읍으로 가는 길에. 2009년에 국토종단은 일상을 정말 풍요로운 순간으로 느끼게 해줬다.



그건 마치 우치다쌤이 “다른 조건을 모두 똑같이 만들어야 조그만 변화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생활이 자주 바뀌면 자기 몸의 작은 변화를 인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연의 변화도 눈치 채지 못하게 됩니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길로, 똑같은 행위를 해야 작은 변화도 바로 알게 됩니다. 특히 계절의 변화, 같은 시간대의 어둡고 환한 정도, 몸 속 기의 흐름, 봉우리의 변화 등과 같은 것은 모든 조건을 똑같이 만들 때에만 비로소 감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반복적인 삶의 의미와도 통한다. 반복적인 삶을 살지만 얼마나 의식을 깨인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느냐, 외부의 자극에 충실할 수 있느냐에 따라 평범함 속에서 비범함을 발견할 수 있고, 일상 속에서 이상을 간파할 수 있듯이, 나에게 현재를 떠난다는 건 그와 같이 무뎌진 감각들을 깨워내는 일이니 말이다.


▲ 사진작가 리처드 실버(Richard Silver)가 24시간을 사진 한 장에 담았다. 변화를 느낄 수 있으려면 그 순간에 머물러야 한다.

               



파랑새는 곁에 있다는 말의 의미 

    

아마도 ‘파랑새는 그 어디에 있었던 게 아닌, 바로 주위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와 같은 여행의 이유라 해야 맞을 것이다. 떠나봐야만 머물렀던 그곳,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았던 그 순간이 전혀 다르게 보인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파랑새의 이야기를 간혹 착각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걸 마치 ‘현실의 가치는 망각한 체, 헛 희망을 찾아 떠나는 어리석음’으로 이해하여 떠나려는 사람을 만류하는 용도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에서부터 쭉 말했다시피 떠나봤기 때문에 현실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멀리서 조망해봤기 때문에 내가 서 있는 기반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즉 그런 탐색과 모험의 과정을 통해서만 현실이 파랑새였음을 알게 되는 것이지, 그런 과정도 없이 그런 깨달음에 이르라고 한다면 그건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를 수 있다’는 말처럼 매우 피상적인 얘기가 될 뿐이다.                



▲ '파랑새 이야기'는 '쥐의 혼인' 이야기와 닮아 있다. 가까운 것의 가치는 멀리 떠날 때에 보인다.




홀로 떠나는 여행이 주는 선물

     

제주도 여행은 2011년에 경수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3박 4일 동안 제주도를 일주했던 여행을 시작으로 2012년엔 단재학교 아이들과 4박 5일 동안 자전거를 타고 일주했던 여행이 끝이었다. 생활이 안정되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여건이 되면 더 많은 여행을 할 줄 알았는데, 그러질 못했다. 역시나 ‘나중에 ~이 되면 그땐 맘껏 할 수 있으니, 지금은 하지 말고 나중에 해’라는 말은 매우 그럴 듯해보여도 전혀 사실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무엇이 된 이후엔 그때 나름대로의 사정으로 인해 할 수 없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니 말이다. 그러니 맘이 동할 때 재지 말고 그냥 할 수 있는 저력이 필요하다. 그처럼 이번에 무려 6년 만에 제주로 떠나는 여행은 어찌 보면 나에게 주는 선물인 셈이다.



▲ 2011년엔 가장 여행하기 좋다는 10월에 자전거를 타고 제주를 돌았다.



더욱이 이번 여행은 누군가와 함께 떠나는 여행이 아닌, 오롯이 내 느낌에 따라 홀로 떠나는 여행이다. 누군가와 함께 떠나 그 순간의 감정을 공유하고 어떤 일이든 함께 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도 좋지만, 때론 혼자 떠나는 것도 좋다. 그래야만 그 누구도 아닌 나의 감정에 더욱 충실할 수 있고, 나의 한계를 더욱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야말로 깨지기 쉬운 사람이지 않은가. 겉으론 단단한 척, 거침없는 척, 정의로운 척 온갖 척척은 다하지만, 그럴수록 얼마나 큰 씁쓸함이 찾아왔는지 모른다. 여릴 대로 여리고, 늘 좌충우돌하며, 수많은 생각 속에 갈피를 잡지 못해 이랬다저랬다 하고 때론 나의 욕심으로 누군가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안기기도 한다. 그런데도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갈 뿐, 그걸 드러내거나 그때그때 잘 풀어내지 못했다.

그렇게 켜켜이 쌓인 오만가지 감정이 어떤 사건이 트리거가 되어 한 순간에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사도』라는 영화에 사도세자가 그의 어머니인 영빈이씨 회갑연을 6년이나 지난 다음에 열며 어머니를 꽃가마에 태워 길을 가다가 “물렀거나. 내 어머니 중전마마 행차시다”라고 포효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엔 중전마마가 될 수 없던 어머니의 한과 함께 왕이 될 수 없는 자신의 한까지 묘하게 겹쳐 사도세자의 처절한 몸부림과 울부짖음이 나를 한없이 흔들어재낀다. 그러니 그 장면을 보면서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나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럴 때 ‘무엇 때문에 이렇게 눈물이 나오지?’라고 물을 필욘 없다. 그렇게 흘러내린 눈물을 통해 위로를 받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그처럼 풀어내지 못한 감정, 여리고 여린 나라는 존재, 깊이 똬리를 틀고 있는 욕망을 제대로 느껴보기 위해 홀로 떠나기로 했다.      



▲ 사도의 처절한 울음에 영빈이씨도, 그의 아들인 이산도 눈물을 흘린다.



          

제주에 스민 역사, 나에게 스밀 제주   

  

제주도는 지금에 와선 신비의 섬으로, 일상의 번잡함을 벗어나 자연을 만끽하고 여유를 흠씬 느낄 수 있는 관광지로, 소길댁 효리네 집이 있는 곳으로 매우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엔 유배지이며 제주 해산물을 납기기한에 맞춰 진상해야 하는 척박한 곳이자 그에 따라 육지로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져 심지어 출륙금지령出陸禁止令(1629년)까지 내렸던 억압의 땅이었으며, 일제시대엔 태평양 전쟁의 전진기지로 몸살을 앓던 곳이었다.



▲ 제주에 주둔했던 일본군. 출저-한라일보



그렇다고 해방이 된 이후엔 사정이 좀 나아졌을까? 역시나 뭍에 있는 사람들에게 제주는 좀 더 다루기 쉬운 곳 중 하나로 수탈하는 장소였을 뿐, 이곳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장소는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948년에 일어나 1954년까지 7년 7개월까지 자행된 제주 4.3사건이다. 이념의 극한 대립 속에 뭍에선 웬만하면 하지 않을 일을 이곳 제주에선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고 만다. 그래서 군대를 파견하고 토벌대를 파견하여 아무 죄도 없고 아무런 이념도 없는 제주 양민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하고 만다. 그건 어찌 보면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여 자신의 입지를 키우려했던 이승만 일파의 과욕이 낳은 참극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국가폭력을 무려 58년이나 지난 2006년에야 정부적인 차원에서 인정하고 사과한 것이니, 얼마나 철저히 뭍 사람들이 제주를 무시하며 수탈의 도구로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알만하다.





이와 같은 아픔의 역사를 지녔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뭇 사람들의 삶이 이루어지고 있는 제주를 무작정 찾아간다. 과연 이번 여행은 나에게 어떤 말들을 걸어올까?



▲ 건빵이 6년 만에 다시 만난 제주엔 어떤 얘기가 있나 함께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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