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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May 02. 2017

농업을 무시하는 사회의 단면을 보다

2009년 국토종단 31 -  5월 2일(토)

아침에 “오늘 일을 같이 해도 되나요?”라고 묻고 이장님의 승낙을 받았을 때만해도, 고추를 심는 일이 하루 종일 걸릴 줄만 알았다. 그런데 이장님네 식구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까지 함께 와서 심다 보니 11시 정도에 끝나 버린 것이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전개되니 당황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오후 늦게까지 해야 자연스럽게 하루 더 머무를 수 있지만, 이렇게 어중간하게 끝나면 점심만 먹고 여행길에 올라야 할 것만 같기 때문이다.                



▲ 오전에 이장님네 밭에 고추싹을 심었다.




밥을 함께 먹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점심은 아침에 간단하게 먹었듯이 집에 있는 반찬으로 먹을 줄 알았는데, 숯불로 삼겹살을 구워서 먹더라. 당연하지만 도보여행 중에 이런 식으로 배불리 먹기도 처음이고, 집에서 먹듯이 편하게 먹어보기도 처음이다. 그것도 이렇게 여럿이 삥 둘러앉아 먹으니, 삼겹살의 그 맛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더라. 역시 이래서 ‘밥은 함께 먹어야 맛있다’라고 하는가 보다. 어찌 보면 가족과 동의어로 쓰이는 ‘식구’라는 단어야말로 밥맛을 제대로 표현한 단어가 아닌가 싶다. 밥을 함께 먹는 사람들, 밥을 함께 나누는 정과 그때 나누는 대화들이 일상을 풍요롭게 하니 말이다. 그런데 현실의 식구란 밥을 함께 먹는 사람들이기보다 그저 한 집에서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니, 좀 씁쓸한 단면이라고나 할까. 

마당에 숯을 피워 그 위에 불판을 깔고 고기를 구웠다.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먹고 있었고, 우린 학생부터 청년까지의 나이대 사람들이 모여 자리가 만들어져 있더라. 아무래도 숯은 화력조절을 할 수가 없으니 고기는 불판에 놓는 순간 금세 익어버리고, 제대로 뒤집지 않으면 타버리기까지 한다. 그러니 고기를 굽는 동안엔 오로지 고기에만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노릇노릇 잘 익혀진 고기들은 접시에 차곡차곡 놓는데, 한창 왕성한 식욕을 뽐낼 때라 놓는 순간 고기는 사라지고 만다. 이건 게 눈 감추듯보다 훨씬 빠른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우린 모두 다섯 근의 고기를 먹었다. 배는 빵빵하고 기분을 날아갈 듯 유쾌하기만 하다. 그러니 세상에 아무 것도 부러울 게 없더라. 바로 지금 이순간의 여기가 지상 낙원이다.                



▲ 그때 찍은 사진이 없어 16년 8월에 아이들과 떠나 고기를 먹었던 사진으로 대체한다. 함께 먹는다는 건 좋은 거다.




하루 더 머물 수 있게 되다 

    

점심을 먹고 있으니 하늘은 어두워져 조금 있으면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갑자기 어두워진 하늘을 보며 ‘이장님께 어떻게 말해야 하루를 더 머무를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밀려오기 시작하더라. 고추도 다 심었겠다, 거기에 점심까지 푸짐하게 먹었으니, 하릴없이 하루 더 머문다고 하는 것은 얼핏 염치없는 행동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쭈뼛쭈뼛 서성이며 얘기할 타이밍을 노리던 그때 희소식이 들렸다. 오전에 도와준 이장님 친구네 밭에 고추를 심으러 가야 한다는 것이다. 비가 많이 내리면 갈 수 없는데, 지금은 오지 않으니 간다는 거였다. 그 말은 누군가에겐 천청벽력 같은 소리로, 누군가에겐 세상 어떤 말보다도 달콤한 말로 들렸다. 이장님 두 아들들은 그 말에 한껏 인상을 썼지만, 난 절로 함박웃음을 터뜨렸으니 말이다. 이미 오전에 일을 해봤으니 크게 어려울 건 없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하루 더 묵게 되었으니 어찌 아니 기쁠쏘냐. 아~ 난 왜 이래 재수가 좋은 걸까.                



▲ 절로 이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규모가 다른 이장님 친구네 고추밭

     

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간다. 이 길은 어제 내가 걸었던 바로 그 길이다. 이 길로 쭉 가면 초평면이 나오고 경찰서가 나온다. 차는 그 경찰서를 지나 10~15분 정도를 더 들어갔다. 이미 밭엔 많은 사람들이 고추를 심고 있었다. 그 규모만 대충 살펴보니, 이장님네 밭과는 쨉이 안 될 정도로 어마무시한 밭이었다. 오전은 고추심기 체험 정도라 할 수 있고, 이곳이야말로 실전과도 같다고나 할까. 두둑의 길이가 훨씬 길었고, 이랑의 수도 훨씬 많았으니 말이다. 

이장님네에선 고추를 두둑에 박아 넣는 일을 했다면, 여기선 퍼올려진 흙을 이용해 줄기를 세우는 일을 했다. 오전엔 면적이 넓지 않고 처음 하는 일이라 신나게 즐기며 일할 수 있었는데, 오후엔 반복되는 일이 지겹기도 하고 일의 끝도 보이지 않아 그저 묵묵히 일을 해야만 했다. 허리를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하니 허리가 엄청 아팠고 도보여행의 여파로 발바닥도 시큰거려 이중고를 참아내야만 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눌 새도 없이 반복적으로 일만 하고 있다. 정신없이 일을 하니 큼지막한 한 두둑이 끝났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엔 이르다. 1/3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 온 몸이 무지막지하게 쑤신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만은 여유롭더라.                



▲ 삽으로 흙을 올려주면, 손으로 모종을 세우면 된다.




빗속 노동의 힘겨움 

    

그때 나온 간식은 통닭이었다. 저번에도 홀로 통닭파티를 했으니, 다시 파티를 하는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그런데 이걸 어쩌나, 이미 삼겹살을 배부르게 먹은 터라 통닭엔 손이 가질 않았다. 평소엔 배가 부르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맘조차 가지 않았는데, 그 순간만큼은 그 통닭이 어찌나 아깝게만 느껴지던지. 통닭은 조금 맛만 보고 맥주로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그때부터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더라. 비가 많이 오는 건 아니고 부슬부슬 오는 정도였기에 바로 일을 시작해야 했다. 이때부턴 오전처럼 모판에서 고추싹을 떼어 두둑에 박아 넣는 일을 했다. 이 일이 그나마 수월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비가 오니 몸은 더욱 무겁더라. 신발에 진흙이 덕지덕지 붙어 발을 들기가 힘겨웠고 옷이 몸에 찰싹 달라붙으니 조금만 움직이더라 힘이 두 배로 들었다. 거기에 모판이 물기를 머금으니 무겁기도 무겁고, 잘 떼어지지 않더라. 하지만 다들 열심히 하고 있었기에 나만 여유를 부릴 순 없었다. 그저 두둑에 서서히 고추싹이 채워지는 광경을 보며 위안을 삼아 끝을 향해 달려가는 수밖에 없다.                



▲ 그때 찍은 사진이 없어, 대체한다. 이런 느낌으로 뚫려진 곳에 묘종을 심으면 된다.




농업인들이 시름시름 앓고 있다

     

일을 마치고 친구분 집에 가서 남은 통닭과 닭도리탕을 먹었다. 그런 모든 순간들이 시골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행복한 광경이다. 일도 해보고 민가에 들어가 밥도 먹고 그분들이 나누는 소소한 이야기들을 여과 없이 들을 수 있으니 말이다. 이제야 여행다운 여행을 하고 있다. 우연에 타고 노닐며 그 행복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친구분은 이장님 댁 아들들을 보고 부모님 잘 모시라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이렇게 오순도순 모여 함께 일하러 오는 모습이 보기 좋으시단다. 그러면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도 퇴직금을 줘야 해”라는 말을 하셨는데, 그 말엔 뼈가 있었다. 갈수록 농사를 짓고 자식을 키우며 사는 게 힘이 든단다.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농업인을 존중하거나 대우해주는 분위기는 더더욱 아니다. 조선시대엔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 하여 농업을 선비 다음으로 여겼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굴원의 「귀거래사歸去來辭」라는 작품도 관직에 혐오를 느낀 지식인이 경치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텃밭을 가꾸며 사는 이상향으로서의 농촌만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 그 글엔 농촌의 서글픈 현실이 들어설 공간이 없다. 차라리 그보단 정약용의 『애절양哀絶陽』이란 시가 훨씬 현실의 농촌 분위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농촌의 문제는 단순히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농촌은 도시를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 농촌은 한 사회의 밑바탕이기 때문이다. 왠지 친구분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우리네 농촌의 아픔을 보는 것만 같아 가슴 한 구석이 짠해져 왔다. 



▲ 농촌을 살린다는 공약들은 많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농촌이 죽어가는 아이러니가 반복되고 있다.



농사만 지어서는 먹고 살 수 없다는 절규는 울림이 되어 가슴 한 구석에 남았다. 그건 체념이었고 자포자기 같은 심정이었다. 열심히 일하는 농민들이 다시 대접받는 날이 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단순히 경제논리만을 따져 농민들을 볼모로 삼는 한․미 FTA 추진단이 바로 이런 체험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들에게 농사와 자동차 산업은 돈이란 단일 가치로 치환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니 미국과 교류할 때 어떤 분야에서 돈이 더 되느냐만을 고려하여, 돈이 되지 않는 분야는 넘겨줘도 된다고 생각한다. 자동차 산업은 돈이 되는 산업이고, 농업은 경제적 손해만 끼치는 산업이니, 미국 농산물의 수입은 허용해주고, 자동차 산업을 수출함으로 손해를 메우려고만 한다. 

그때 농민들이 피해를 본다고, 우리의 식량주권이 침해당한다고 아무리 얘길 해봤자 경제논리에 빠진 사람들은 ‘괜한 시비거리’로만 듣는다. 자동차 수출을 통해 얻은 이익을 선진농법 개발에 투자하면 된다고, 농민들이 다른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농업을 완전히 내팽겨 치며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그저 시혜적인 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했다고 떠드는 꼴이 가관이다. 

시골의 현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관료가 되고, 도시의 혜택만을 누린 사람들이 정책 입안자가 되는 사회는 망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회는 기본이 바로 서지 않은 사회이니 희망이 없을 수밖에 없다. 이날 저녁에 들은 아저씨의 절규는 도시에서 자라오며 시골에 대해 무관심하기만 했던 나에겐 하나의 화두로 들렸다.                



▲ 이익만을 탐하면 소탐대실하게 된다. 그걸 제대로 보여준 게 한미FTA다.




다시 홀로 서기

     

6시가 좀 넘어서야 이장님 댁으로 돌아왔다. 깨끗이 씻고 소파에 앉아 이장님 막내딸과 신나게 놀았다. 그저 하루 지났을 뿐인데 꼬마 아가씨와 이렇게 친해졌다. 이런 저런 유치한 장난을 하며 같이 껄껄대며 웃고 놀다가 느즈막하게 차려진 저녁을 먹고서야 경로당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틀간,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여행을 한다면 이래야 한다.’는 생각에 가장 적합한 순간이었던 셈이다. 내일부턴 다시 이곳을 떠나 혼자가 된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돈다. 혼자가 더 편하고 익숙해진 줄만 알았는데 그것만도 아니었나보다. 갑작스런 인연이었지만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것 같은 친근함이 있어서 더 그랬던 거 같다. 피곤함보다 아쉬움이 더 짙게 피어올랐다. 오죽했으면 엊그제 초평으로 향하던 그 늦은 시간으로 되돌아가고 싶었을까? 언젠가 다시 이 분들을 보게 될 날도 있을까?(실제로 1년 뒤인 2010년도엔 고추 심는 날에 일부러 찾아가 고추를 심었었다. 그 덕에 1년 만에 다시 보게 됐다)



▲ 막내딸과 어느덧 친해져서 이렇게 편하게 놀 수 있게 됐다. 사진에 나오기 싫다며 뒤에 숨어버린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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