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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Jan 29. 2019

공생을 위한 준비과정

공생의 필살기13

먼 길을 돌고 돌아 드디어 우치다쌤의 이야기도 오부 능선을 넘어가고 있다. 정신과 육체를 나누어 사유하고, 심지어 정신은 단일하고 완벽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풍토에 ‘나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오래된 목조건물’이란 비유로 우치다쌤은 일격을 가했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가 끝난다면, 이런 비유를 든 의미는 퇴색되고 만다. ‘나란 다양한 자아가 모여 산다’는 말이 ‘공생’을 위한 실마리가 되기 때문이다.                 




반공생 내가 좀 더 가졌기에덜 가진 사람에게 준다

     

우치다쌤의 문제의식은 ‘어떻게 하면 약자에게 손을 내밀 수 있으며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단순히 ‘마음을 고쳐먹고, 약자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답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식의 말들은 주위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일 뿐이다. 우치다쌤은 애초에 “한 번도 듣지 못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라고 선언했듯이, 일반적인 이야기를 다시 하진 않을 것이다. 과연 그는 ‘목조건물’이란 비유를 통해 어떤 얘기로 확장해 가고자 하는 걸까?

이걸 알기 위해서는 우치다쌤은 말하는 개방적인 사람에 대한 이야기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약자를 배려해야 한다’, ‘타인에게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 중엔 그 말과 반대로 폐쇄적인 사람이 많습니다. 그건 ‘인간은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한다’고 강제하기 때문인데, 그게 ‘오픈 마인드’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 말 그대로다. 사람의 다양성을 인정한다면 절대 남에게 ‘내가 생각하는 가치만 옳다’며 강요할 수는 노릇이다. 강요하는 순간, ‘타인에게 개방되어 있어야 해’라는 자신의 말, 그 자체를 스스로 배반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 말마따나 재밌는 일화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진보 교육감들이 대거 당선되고 혁신학교에 각 지역 곳곳에 세워지게 됐다. 혁신학교가 표방하는 것은 ‘교사와 학생이 한껏 어우러져 활발하게 의사표시를 하고 함께 학생의 강점을 찾아 그 강점을 북돋워주는 교육’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교사와 학생의 상호작용, 교학상장, 따스함이 넘치는 교육공동체와 같은 구호들이 사용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어느 학교 교장 선생님이 ‘따스함이 있는 교육공동체=등교 시간에 교사들이 교문 앞에 도열하여 등교하는 학생들을 안아주는 것’으로 생각했었나 보다. 그럴 때 자신만 그런 생각에 의해 교문에 나와 맞이해준다면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전 교원에게 그렇게 하도록 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러니 교원 중엔 자신의 의지에 반함에도 억지로 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고 학생들은 그게 너무 부담스러워 후문으로 등교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바로 이 경우가 우치다쌤이 말한 ‘교사란 따스함이 있어야 한다’고 외치지만 실상은 구태의연한 상명하복의 패턴에 갇힌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그런 식의 관점이 문제가 되는 건 ‘나는 강한 사람이기에 약한 사람을 끌어안아야 한다’, ‘가진 게 많으니 없는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시혜적인 성격을 띠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건 공생의 개념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애써 베푼다는 개념에 불과할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차이가 끊임없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며, 가지지 못한 자는 노력해도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러다 보니 한국사회는 상위10%의 사람이 전체 재산의 66%를 독식하고, 하위 50%의 사람은 2%만을 차지하는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상위 10%가 나누어 주는 건 공생의 개념이 아니라, ‘난 그래도 나누며 살고 있어’라는 자기 위안이라 해야 맞다. 또한 이런 경우 아무리 도와준다고 해도 그 한계는 명확할 수밖에 없다. 66%를 독점하며 그 중 0.02%를 나눈들 자신들의 재산에 어떤 심각한 변동도, 자신들만 누릴 수 있는 구조에 어떤 개선이나 변화도 없기 때문이다.      


  

▲ 부의 집중도는 가속화되고 있다. 이미 사회구조적으로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의 공생은 어떤 것일까?



        

그는 또 다른 나다  

   

분명히 지금껏 ‘공생’의 개념으로 알고 나누며 살고자 했던 행동들이 알고 보면 ‘반공생’적인 것이라고 하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떨 때 공생을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걸까? 이에 대해서는 세 가지로 방법을 알아보도록 하자.

이것을 말하기 위해 우치다쌤은 ‘나란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오래된 목조 건물’이란 메타포를 던져준 것이다. 오래된 목조건물엔 당연히 상종하기 싫은 사람(자아)들도 함께 살고 있다.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비굴한 사람, 속물적인 사람, 불만 가득한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래서 우린 그런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으려 ‘강남8학군’과 같은 동질적인 집단으로만 구성된 교육환경을 중시하며, 고급아파트에 살아 임대아파트 사람들과 섞이지 않도록 금을 그으며 살아왔다. ‘상종하기 싫은 사람=감추고 싶은 어두운 자아’라 생각을 확장할 수 있다면, 우린 그런 자아들을 억압하고 감추기에 급급해했다는 말이 된다. 감춘다는 것 자체가 억눌렀다는 뜻이고, 자신의 자아라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런 식으로 실제론 꺼려하는 존재들인데도 그럼에도 ‘도와줘야 한다’고 속인 것이니, 당연히 자신의 우월의식을 기반으로 한 위선적인 행동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공생을 위해서는 첫째로 자신의 어두운 면모도 자신의 모습이라고 인정해야만 한다. 그걸 인정한 상태로 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어 진심으로 함께 할 수 있게 된다는 얘기다. 이를 우치다쌤은 “약한 사람과 공감하는 건 내 안에 그 약한 사람과 같은 마음이 있다고 생각될 때 비로소 공감할 수 있습니다”라고 표현했는데 여기엔 사족을 달지 않아도 될 만큼 매우 정확한 표현이란 생각이 든다.      



▲ 위의 기사를 보면 누구도 당연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식  교육문제가 겹치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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