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생의 필살기12
우치다 타츠루쌤의 ‘나란 그 건물에 살고 있는 한 명의 주민이 아니라 목조건물 전체’라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생각난 사람이 바로 장자였고, 저번 글에선 스승 자기와 제자 안성자유의 대화를 통해 어떤 부분이 겹치는지 조금 얘기하다가 중간에 멈췄었다. 그러니 이번 글에선 인용했던 장자의 내용을 모두 해석해보고 그게 우치다쌤이 말한 ‘나다움’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풀어나가 보도록 하겠다.
스승은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吾喪我’라고 말을 함으로 나다움의 신화를 박살내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바로 퉁소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퉁소란 곧 사람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에게서 나는 소리라는 게 ‘자기다운 소리를 낸다’고 생각할 테지만, 실제론 바람이 불어오는 것에 따라 다양한 소리가 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래서 거센 바람이 불면 거센 소리로, 잔바람이 불면 작은 소리가 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러다 바람이 그치면 더 이상 어떤 소리도 내지 못하게 된다. ‘자기다운 소리를 낸다’라는 것도 알고 보면 주위의 환경에 의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다운 소리’란 애초에 없었던 게 아닐까.
이러하기에 인간의 전일성이란 건, 한결 같다는 건 환상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마지막엔 ‘온갖 것에 바람을 모두 다르게 불어넣으니 제 특유한 소리를 내는 것이지. 모두 제 소리를 내고 있다고 하지만, 과연 그 소리가 나게 하는 건 누구겠느냐?’라고 스승은 일갈한 것이다.
만약 이 책이 기독교 서적이라면 마지막 문장을 통해 ‘그게 바로 하느님이야’라고 답을 확정할 테지만, 이 책은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기에 태어난 책으로 그 물음만을 던지며 끝내고 있다. 그건 어떤 절대자의 힘이거나 인간의 일관성에 대한 이야기가 애초부터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마무리다. 흔히 ‘노장사상(노자와 장자사상)’이라 불리며 두 사상을 하나로 묶지만, 『노자』는 권력자의 통치 기법을 담고 있는 책인데 반해 『장자』는 소통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우치다쌤은 인간을 다양한 자아가 함께 모여 사는 다세대 주택이라 표현했다면, 장자는 인간을 속이 텅텅 비어 있어 어떤 소리와 마주치고 어떤 타자와 마주치느냐에 따라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는 퉁소라 표현했다. 두 철학자는 그렇게 비슷한 듯 다른 메타포로 인간 정신의 우월성을 와르르 무너뜨렸다.
누군가는 ‘사람의 자아란 단일하지 않다’는 이 말에 꽂혀서, 단순히 ‘그럼 내가 감정기복이 심하고, 생활을 제멋대로 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네. 그러니 모두 나에게 뭐라고 하지 말아’라고 자기 방어용 논리를 만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라고 이런 말을 한 것은 절대 아니다. ‘자기다움이란 다양한 자아가 함께 사는 공동주택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란 말을 통해, 공생을 위한 세 번째 필살기를 알려주기 위해 한 말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필살기에 대한 이야기도 매우 흥미진진하고 무척 긴 내용이니 다음 후기에서 제대로 살펴보도록 하자. 여기까지 쓴 내용을 통해 근대적인 자아관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게 어떤 사회적인 인식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게 우리를 어떻게 옥죄고 있는지 아는 정도면 충분하다.
그리고 이런 논의를 충분히 이해했다면 아까 전에 중학생이 물은 질문에 우치다쌤이 “중학생이 생각하는 ‘자기답다’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한 말의 의미를 잠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중학생이 생각하는 ‘자기답다’는 ‘내 안에 온전한 나다움이 있어서 그걸 추구하며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고, 우치다쌤이 생각하는 ‘자기답다’는 ‘다양한 가치들이 서로 충돌하고 화합한다는 걸 인정하며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같은 단어를 쓰고 있지만 함의는 완전히 달랐던 셈이니, 우치다쌤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 건 매우 적확한 대답이라 할 수 있다.
우치다쌤의 표현에 대해 박동섭쌤이 짧고 굵직한 언어로 풀어내고 있다. 이 글을 읽어보면 우치다-박동섭 사이에 일어난 교학상장을 충분히 맛볼 수 있기 때문에, 이 글을 인용하며 이번 후기는 마무리 짓도록 하겠다.
내가 엠마뉴엘 레비나스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것은 ‘동일적인 자기에 집착하지 말고(주: 순수한 자기 혹은 진정한 자기와 같은 근대적인 자기관) 늘 분열되는 것을 정상적인 상태로 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그것이 인간적 성숙의 지표’라는 것이었다(우치다 타츠루).
이 일견 보기에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레비나스의 자아관을 10월 20일 제주강연에서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은 더러운 목조 아파트 건물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메타포를 가져오면서 중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는 화법으로 탁월하게 풀어내셨다. 물론 강연하시면서 레비나스의 ‘레’자도 꺼내지 않으시고 레비나스의 철학을 풀어내는 스승의 모습에 또 감탄(앞으로 비고츠키의 ‘비’자 한 자도 꺼내지 않으면서 강연을 해야겠다는 도전의식을 스승은 내 안에서 불러일으켜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