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생의 필살기11
우치다쌤이 얘기하는 ‘자기답다’는 표현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내용과는 사뭇 다르기에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우치다쌤은 “제가 생각하는 자기답다는 말은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단 주택’ 같은 것입니다. 더러운 목조건물에 복도가 있고 문이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조용히 사는 사람도 있고, 시끄러운 사람도 있고, 깨끗한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지 맘대로 하는 사람도 있는 공동주택이죠. 그 중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깨끗한 사람과 더러운 사람이 싸우며 ‘저 사람을 쫓아내야 한다’고 소리치면 ‘이런 것도 인연인데 사이좋게 지내야죠’라고 중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당연히 주민이 많으면 많을수록 건물의 규모가 클수록 그만큼 싸움은 수시로 일어납니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이 문제는 302호에 사는 아저씨에게 묻는 게 제격이다’, ‘이 문제는 101호에 사는 아줌마에게 물어야 한다’라는 판단까지 할 수 있게 됩니다. 결국 나란 그 건물에 살고 있는 한 명의 주민이 아니라 목조건물 전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쐐기를 박는다.
우치다쌤의 이 말을 들으며 ‘멘붕’이 오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보통 ‘자기다움’을 표현할 때 전일한 개체, 하나의 변하지 않는 완벽한 개체만을 생각하며, 그런 내가 될 수 있어야 ‘자기답다’는 표현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이야말로 지극히 일반적인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이야기이니 말이다. 이건 ‘몸=자연물’이라는 이야기보다 훨씬 더 충격적인 얘기다.
지금 사회는 ‘자기다움’의 신화에 푹 빠져 있다. 자기답다는 게 뭔지도 모른 채, 기업은 공동체에 묶여 있는 나를 홀로 떼어놓기 위해 ‘자기다움’을 연일 강조하며 개별적인 소비주체로 만들려는 것이다. 하지만 우치다쌤은 그런 식의 자기다움은 당연히 자본이 만들어낸 허구임을 명확하게 밝히고 내 안에 무수히 많은 자기가 있음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장자』라는 책에서도 나온다. 이미 ‘나비의 꿈胡蝶夢’이란 문장을 통해 ‘자기다움의 신화’를 깨버렸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 구절보다 더욱 명확하게 ‘자아’라는 인식을 깨부수고 있는 아래의 문장을 읽어보자.
성 남쪽에 사는 자기라는 사람이 책상에 기대앉아서 하늘을 쳐다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멍하니 앉아있는 모습이 마치 자기 몸과 마음을 다 잃어버린 것 같았다.
南郭子綦隱机而坐, 仰天而噓, 荅焉似喪其耦.
제자 안성자유가 여쭈었다. “어찌 된 일입니까? 몸도 이렇게 마른 나무 같아질 수 있고, 마음도 죽은 재 같아질 수 있습니까? 지금 책상에 기대앉아 계신 분은 예전에 이 책상에 기대앉아 계시던 그 분이 아닙니다.”
顔成子游立侍乎前, 曰: “何居乎? 形固可使如槁木, 而心固可使如死灰乎? 今之隱机者, 非昔之隱机者也.”
자기께서 말씀하셨다. “언아, 또한 좋지 아니한가, 그 물음이여! 지금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 그런데 니가 그 뜻을 알겠는가? 너는 사람들이 부는 퉁소 소리를 들어 보았겠지만, 땅이 부는 퉁소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겠지. 설령 땅이 부는 퉁소 소리는 들어보았을지 모르지만, 하늘이 부는 퉁소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겠지.”
子綦曰: “偃, 不亦善乎? 而問之也! 今者吾喪我, 汝知之乎? 汝聞人籟而未聞地籟. 汝聞地籟而未聞天籟夫!”
자유가 여쭈었다. “(어떻게 하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 감히 물어보아도 되겠습니까?”
子游曰: “敢問其方.”
자기께서 대답하셨다. “땅덩어리가 뿜어내는 숨결을 바람이라고 하지. 그것이 불지 않으면 별일 없이 고요하지만, 한번 불면 수많은 구멍에서 온갖 소리가 난단다. 너도 그 윙윙하는 소리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子綦曰: “夫大塊噫氣, 其名爲風. 是唯無作, 作則萬竅窺怒呺. 而獨不聞之翏翏乎?
산의 숲이 심하게 움직이면, 큰 아름드리나무의 구멍들, 더러는 코처럼, 더러는 입처럼, 더러는 귀처럼, 더러는 목이 긴 병처럼, 더러는 술잔처럼, 더러는 절구처럼, 더러는 깊은 웅덩이처럼, 더러는 좁은 웅덩이처럼 제각기 생긴 대로, 물이 콸콸 흐르는 소리, 화살이 나는 소리, 나직이 꾸짖는 소리, 숨을 가늘게 들이키는 소리, 크게 부르짖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깊은데서 나오는 듯한 소리, 새가 재잘거리는 소리 등 온갖 소리를 내지.
山陵之畏佳, 大木百圍之竅穴, 似鼻, 似口, 似耳, 似栟, 似圈, 似臼, 似洼者, 似汚者, 激者, 謞者, 叱者, 吸者, 叫者, 譹者, 宎者, 咬者.
앞에서 가볍게 우우 – 하는 소리를 내면, 뒤따라서 무겁게 우우 – 하는 소리를 내고, 산들바람이 불면 가볍게 화답하고, 거센 바람이 불면 크게 화답하지. 그러다가 바람이 멎으면 그 모든 구멍은 다시 고요해진다. 너도 저 나무들이 휘청휘청 구부러지거나 살랑살랑 흔들리기도 하는 것을 보았겠지.”
前者唱于而隨者唱喁. 冷風則小和, 飄風則大和, 厲風濟則衆竅爲虛. 而獨不見之調調之刁刁乎?”
자유가 여쭈었다. “땅이 부는 퉁소 소리란 결국 여러 구멍에서 나는 소리로군요. 사람이 부는 퉁소 소리는 대나무 퉁소에서 나는 소리인데, 하늘이 부는 퉁소 소리란 무엇입니까?”
子游曰: “地籟則衆竅是已, 人籟則比竹是已. 敢問天籟?”
자기께서 말씀하셨다. “온갖 것에 바람을 모두 다르게 불어넣으니 제 특유한 소리를 내는 것이지. 모두 제 소리를 내고 있다고 하지만, 과연 그 소리가 나게 하는 건 누구겠느냐?”
子綦曰: “夫天籟者, 吹萬不同, 而使其自己也, 咸其自取, 怒者其誰邪!” 『莊子』 「齊物論」1
알쏭달쏭한 얘기지만, 첫 구절에 보이듯 스승의 상태를 보고 제자가 평가한 문장을 살펴보면 ‘지금 책상에 기대앉아 계신 분은 예전에 이 책상에 기대앉아 계시던 그 분이 아닙니다.’라는 구절이 눈에 띈다. 어떤 것에 완벽하게 통달하였는지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생명이 다한 듯 앉아 있는 스승을 보고 제자가 평가한 것이다. 더욱이 제자의 평가에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吾喪我’라고 말하는 스승의 말이 예사롭지 않다. 나는 더 이상 ‘나답던 모습, 전일하게 보이는 모습’ 그 자체에서 벗어났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인용문이 길기 때문에 이번 글의 분량은 이미 한참을 넘어가게 됐다. 여기서 이 글에 대한 해석을 하다보면 분량이 한없이 길어지게 되니, 이번엔 여기서 잠시 끊고 다음 글에서 장자에 대한 해석을 마무리 짓고 이게 어떻게 우치다 쌤이 말한 ‘다세대 주택 같은 나’와 연결이 되는지 설명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