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3일(수)
셋째 날이 밝았다. 오늘은 연하천에서 출발하여 벽소령에서 점심을 먹고 세석까지 가는 일정이다. 연하천에서 벽소령까지 3.6㎞이고 벽소령에서 세석까지 6.3㎞이니, 총 9.9㎞를 가면 된다. 일반적으로 5시간 30분이 걸린다고 한다.
연하천 대피소는 노고단 대피소에 비하면 건물 크기도 작고 자는 공간도 좁은 편이다. 하지만 남녀 숙소가 분리되어 있는 점은 맘에 든다. 연하천 대피소만 특별하게 모포가 아닌 침낭을 대여해 준다. 그리고 바닥의 한기를 막을 깔판은 2.000원을 내고 주문해야 한다. 그러니 겨울에 침낭을 챙기지 않고 지리산 종주를 하려면, 각 대피소 당 4.000원(모포 1장당 2.000원)의 돈을 더 준비해야 한다. 그래야 한 장은 바닥에 깔고 한 장은 덮고 따뜻하게 잘 수 있으니 말이다.
아침은 간단하게 즉석 육개장을 데워서 찬밥 남은 걸 말아서 먹었다. 취사장에서 등산객에게 들으니, 벽소령 대피소에선 물을 구할 수가 없다고 하더라.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지만, 물이 나오는 곳이 얼었거나 아예 처음부터 물이 공급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각자의 물통에 물을 받아가기로 했다.
벽소령으로 가는 길은 지금껏 걸은 길과는 조금 남달랐다. 사람보다 몇 배나 큰 기암괴석 사이의 길을 가거나, 바위를 타고 올라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껏 종주를 하면서 밧줄이 설치된 등산로는 없었는데, 여긴 예외였다. 그러나 험난하다고는 할 수 없다. 바위의 경사면을 오르기 편하도록 설치해놨지만 실상 바위도 계단형식으로 깎아놓아서 밧줄을 잡지 않고도 충분히 오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전문적인 산악인 같은 느낌이 들겠지만, 북한산 백운대 정도의 그런 엄청난 규모의 바위가 아닌 나지막한 바위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특히 기암괴석 사이에 난 길을 걸어갈 땐 묘한 기분마저 들었다. 남자 아이들이라면 거대로봇을 동경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거대로봇이 내 옆에 떡하니 서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전이라 그런지, 아니면 영화팀이 산행에 적응이 되어서 그런지 누구 하나 뒤처지지 않고 정해준 위치에 맞게 잘 걸어갔다. 주원, 지민, 현세가 먼저 출발할 수 있도록 하고 나머지 친구들은 조금 더 쉬다가 출발했다. 조금 쉬었다가 출발해도 어느 지점에서 다시 만나곤 했었는데, 이 날 오전엔 현세만 만났을 뿐 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게 신기하여 부리나케 걸었더니, 어느새 저 멀리 벽소령 대피소가 보이고 들어가는 입구에서 주원이와 지민이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꼭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것처럼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는 주원이와 지민이를 보고 있으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