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2일(화)
능선을 따라 가다보니 남쪽 능선을 따라갈 땐 따스한 햇살이 몸을 녹여주기에 걸을 만 했지만, 북쪽 능선을 따라갈 땐 음지인데다 바람까지 세차게 불어 무지 추웠다. 계속 가다보면, 양지와 음지를 번갈아 지나가게 된다.
드디어 삼도봉에 도착했다. 이 봉우리를 기점으로 삼도(전남, 전북, 경남)가 나눠진다. 경계는 인간이 나눈 인위적인 선이지만, 때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져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게도 된다. 12월 31일과 1월 1일의 경계, 나라와 나라의 국경, 남과 북의 접경지 등이 모두 인위적인 구분이지만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경계들이고 또한 그 의미를 부여하려 무진 애쓰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들도 삼도봉에서 사진을 찍기 바빴고 등산객들도 연신 셔터를 눌렀다.
오전만 해도 대형을 유지하고 걸었지만, 오후로 접어들면서 대형은 틀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민이는 손에 든 짐이 무겁다며, 조금 걷다가 쉬기를 반복했다. 자신의 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안 걷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만히 놔뒀다.
자신이 가져온 짐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것이지, 누군가 나를 대신해서 들어주는 게 당연한 게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편해지는 만큼 누군가는 힘들다는 것을 망각해선 안 된다. 그런 타인에 대한 감수성을 잃는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에 대한 민감함을 잃는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올 때까지 기다린 후 먼저 걷고 기다리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하니, 지민이도 힘들긴 했겠지만 있는 힘껏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서 오더라.
오후 4시가 넘어가자 주원이도 뒤처졌다. 그래도 주원이는 남이 자신의 짐을 들어주길 바라거나, 대신 해주기를 원하지 않았다. 힘은 들고 무릎은 아프지만 자신이 하길 원했다. 좀 느리긴 했지만 멈추지 않는 모습을 보니,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같이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볼 수 있기에 산행이든 여행이든 꼭 해볼 일이다.
여기에 덧붙여 주원이와 함께 걸을 수 있다는 것도 지리산이 만든 희귀한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몸이 힘들 땐 평소와 같은 행동을 하거나 선입견을 내세우지 않는다. 막다른 골목에 몰릴 때, 그제야 자기 주위의 사람들을 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 땐 감각적으로 이 순간의 힘듦을 함께 해나갈 수 있는 사람이면, 안 좋은 감정이 있더라도 함께 해쳐나가려 하는 것이다. 극한 상황이 만드는 동지의식은 그래서 오묘하기만 하다.
6시쯤 되어서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둠이 내렸지만, 저 멀리 보이는 대피소의 불빛은 무엇보다도 반가웠다. 대피소에 다다르니, 건호는 이미 밥을 준비하고 있었다.
저녁은 카레를 먹었다. 여기선 설거지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코펠에 라면이나 카레와 같이 기름진 음식을 직접 해서는 안 된다. 기름기에 쩌든 코펠의 위생 상태는 갈수록 안 좋아져 여행 내내 우리의 아랫배를 심하게 아프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자의 카레 봉지에 밥을 넣어 먹기로 했다.
그런데 몇몇 아이들은 그 말을 듣지 않았고, 코펠에 카레를 붓고 비벼 먹기 시작했던 것이다. 6명의 아이들만 왔을 뿐인데도, 제대로 소통되지 않고 있다. 밖은 엄청 추웠기 때문에, 밥을 비벼먹고 들어왔다. 승빈, 현세, 주원, 지민이 네 명은 라면을 끓여 먹겠다고 하더라. 너무 늦지 않게 잘 끓여 먹고 들어오라고 말한 다음에 대피소 안으로 들어와 잘 준비를 했다.
시간은 어느덧 7시 4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8시에 소등을 하기 때문에, 취사장으로 내려갔다. 상황을 보니 나머지 아이들은 먹기만 할 뿐 전혀 치우려 하지 않았고 한 학생만 분주하게 움직이며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 광경이 어찌나 화가 나던지, 아이들을 혼내며 같이 치울 수 있도록 했다. 옆에서 그 장면을 구경하던 등산객들도 “여태껏 혼자만 시키더니, 선생님이 와서 말하니까 그제야 하네.”라고 그 때까지의 상황을 알려주더라.
여행을 하다 보면, 그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직 어리기 때문인지, 누군가에게 대접만 받고 살아왔기 때문인지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남에게 떠넘기거나 방관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자신이 하지 않으면 누군가는 더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지 않는 것이다. 먹는 건 누구보다 잘 하지만, 뒷정리는 누구보다 덜 하거나 아예 하지 않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