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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Apr 06. 2019

제석봉의 횡사목

2013년 11월 14일(목)

▲  넷째 날 경로: 세석 대피소 ~ 장터목 대피소~  천왕봉 ~ 장터목 대피소



조금 쉰 후에, 배낭은 대피소에 두고 맨몸으로 천왕봉에 올랐다. 1.7㎞로 1시간 30분이 걸린다고 한다. 배낭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몸은 가벼웠지만, 천왕봉으로 가는 길은 보통이 아니었다. 연하천에서 벽소령으로 갈 때 바위에 설치된 밧줄을 잡고 올라가야 한다고 소리를 쳤었는데, 천왕봉으로 가는 길은 북한산 백운대에 오르는 것처럼 경사도 심했고 밧줄과 안전봉이 없으면 오르기 힘들 정도였다. 

2000년도에 대학교 동아리에서 당일치기로 천왕봉에 올랐는데, 그 땐 대피소까지 올라가는 길만 힘들었을 뿐, 천왕봉까지 가는 길은 평범했다는 기억이 어렴풋하게 남아있다. 그래서 편하게 갈 줄만 알았는데, 현실은 기억이 얼마나 허무맹랑하게 재구성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일깨워 줬다.                



▲  밥 먹고 쉬고 싶을 텐데도 함께 천왕봉에 올라가보는 아이들.




제석봉의 횡사목

     

제석봉엔 앙상하게 남은 나무들이 즐비하다. 난 이 나무들이 ‘생장에 불리한 고지대이기에 이렇게 삐쩍 말랐나 보다.’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제석봉에 올라 안내문을 읽어보고는 깜짝 놀랐다. 이곳의 나무들은 생명이 다해 저절로 죽음을 맞이한 고사목이 아니라, 갑작스런 환경 변화에 죽을 수밖에 없었던 횡사목이기 때문이다. 

6.25 당시만 해도 전나무, 구상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이 우거져 있어서 제석봉의 위엄을 드러냈다고 한다. 하지만 자유당 말기에 변고를 당해 지금과 같은 황폐한 곳이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농림부 장관의 인척이 권력을 등에 업고 이곳에 제재소를 차려 나무들을 베어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특혜가 여론의 질타를 받았고, 당사자는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불을 질러 무수한 나무들을 태웠다는 것이다. 그 때의 흔적이 5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렇게 남아있다. 

제석봉의 횡사목은 전쟁의 수난을 몸소 이겨냈으나 한 개인의 욕망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던 아픈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어처구니없을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인간의 이기심에 분노가 치민다. 성어 중에 ‘비명횡사非命橫死’라는 말이 있다. 하늘이 생명을 낼 때에는 천수가 있는데, 그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갑자기 죽게 되었다는 뜻이다. 뭇 생명체가 지닌 감정은 똑같다. ‘살려고 하며 죽는 것을 싫어하는 마음貪生惡死之心’이 있는 것이다. 나무 또한 말을 하지 못하고 몸으로 표현하지 못할 뿐이지 기본적인 감정은 같다. 그런데도 인간의 욕망에 의해 비명횡사하게 나뒀으니, 그 업보를 어떻게 할 것인가?               



▲ 제석봉의 횡사목들. 가슴 찡하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자연개발

     

제석봉의 횡사목을 보고 있으니, 예전에 친구와 나눴던 얘기가 갑자기 떠올랐다. 사람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무구한 자연의 흐름으로 볼 때 그건 벼룩의 발악처럼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자연의 탄생과 인간의 탄생을 비교하면서 니체는 “지구의 나이를 하루로 치면 인간 아니 생명체 자체가 존재한 기간은 한 순간의 타오름에 불과하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라고 말했으며 리처드 포티는 “인류는 바다가 낮아지고 기후가 비교적 온화해진 극히 짧은 시기에 일시적으로 불어나 지각판 위에 매달려 기생하는 진드기나 다름없다. 지금 있는 땅과 바다의 배열은 언젠가는 변할 것이다. 그와 함께 극히 순간에 불과했던 인간문명의 영화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순간의 타오름에 불과한 인간이 자연을 어떻게 하겠다는 기고만장한 자부심이야말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러하다 할지라도 ‘애초에 영향도 못 끼친다면 내가 자연을 맘대로 하는 것도 상관없다는 얘기 아냐’라는 명분으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 

4대강을 살린다는 명분으로 4대강을 파헤쳐 놓은 것이나, 가치 없는 갯벌보다 다양한 가치가 지닌 토지를 만든다는 명분으로 거대한 방조제를 건설해 놓은 것이나 인간적인 기고만장함을 드러낸 것에 불과하지만 그게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작은 이익을 추구하느라 정작 추구해야 하는 ‘자연 속에 인간이 산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놓친 격이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문제를 제기해야 하고 원상복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무분별한 자연개발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면, 어떤 사람들은 “어차피 개발하나, 하지 않으나 자연의 흐름대로 원상복귀 될 텐데, 그럴 바에야 인간이 편한 대로 개발하는 게 뭐가 어때서?”라고 소리친다. 그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없으니, 어떠한 말도 통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와 똑같은 관점으로 “어차피 한 달 후면 당신의 얼굴에 생긴 멍도 다 나아 흔적조차 사라질 텐데, 그렇다면 제가 한 대 때려도 될까요?”라고 물으면, 손사래를 치며 미친 사람 취급할 것이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에는 민감하면서 나 외의 것들에 가해지는 폭력에는 둔감하거나 아예 무관심한 것이다. 아마 그와 같은 마음이 지금과 같은 제석봉의 횡사목을 만들고, 사대강의 녹조라떼를 만들고, 새만금의 죽음의 갯벌을 만들었을 것이다.      



▲ 모든 것들이 인간의 논리로만 만들어지고 있다. 횡사목 또한 그런 논리의 희생양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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