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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건수 Apr 28. 2020

그곳에 가면, 찾을 수 있나요?

01. 마법의 지팡이


 길을 걷는 코넬리아(줄여서 ‘코리’)와 나의 손에는 스틱이 하나씩 쥐어져 있었다. 난 스틱을 가리키며, 이 스틱이 마법의 지팡이가 되어 우리를 산티아고까지 단번에 날아가게 해줬으면 좋겠단 말을 건넸다. 실없는 농담이었지만 또다시 코리의 다리가 아파오고 있기에 무엇이든 기분전환이 될 말을 해주고 싶었다. 길을 걷기 시작한 지 4일째. 우리에게는 마법의 지팡이가 필요했다.






 코리를 처음 만난 건 프랑스 바욘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의 출발지인 생장 피에르 포드(줄여서 ‘생장’)까지 가는 기차 안이었다. 바욘까지 타고 왔던 떼제베에 비해 생장까지 가는 기차는, 두 칸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기차였다. 난 턱에 손을 괴고 창가에 기대어 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차가 달려 나갈수록 보이는 모습은 쉼 없이 그림책을 넘기듯 도시에서 시골 정경으로 바뀌어갔고,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부신 햇살이, 그리고 그 햇살을 가득 받고 자라났을 나무가 바로 내 얼굴 앞까지 잎을 매단 채 손을 뻗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이끌리듯 손을 뻗어 유리창 위에 손가락 끝을 가져가 대어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이 잠들기 전이었는지 꿈속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느 순간 난 잠이 들어있었다.


 목적지에 이르러 고맙게도 누군가가 나를 흔들어 깨워주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 키 큰 외국인 여성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고맙다고 인사하고 기차에서 서둘러 내렸다. 아직 잠이 덜 깬 채로 앞서가는 사람들을 뒤따르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난생처음으로 나온 해외에서 넉살 좋게도 잠이 들었다니... 순례자 사무소에 가서 순례자 카드를 발급받고 알베르게(순례자 숙소)를 배정받았다. 나를 깨워준 여성의 이름은 코리, 그녀 또한 나와 같은 알베르게였다.


 저녁식사를 위해 내려간 1층 거실에는 이 알베르게의 관리자로 보이는 아저씨가 사람들 앞에서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영어로 말하는 듯했지만 얼핏 듣기엔 영어인 줄 모를 정도로 낯선 억양이었다. 맨 끝자리에 앉아서 보니, 마치 스페인 축구 라리가에서 볼 수 있는 열정적이고 재빠른 해설자가, 숨넘어갈 듯 “Goal!! Goal!! Goal!!”을 외치며 내 앞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알아들은 건 “Take it easy. Listen to the sound of your body.” 정도였다. 이야기인즉슨, ‘이것은 레이스가 아니다. 남보다 앞서가기 위해 무리하게 속도를 올리지 말아라. 그리고 너의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였다. 한바탕 연설과 같았던 아저씨의 설명은, 길 시작부터 급한 오르막길을 만나게 될 거라는 말과 함께 ‘고생 좀 할 거야~.’라는 듯한 웃음을 사람들에게 지어 보이면서 끝이 났다.

 일단 내일 아침, 아니 새벽부터 일찍 길을 나서야만 했다. 관리인 아저씨는 늦어도 오전 7시에는 출발해야 이 날의 목적지인 론세스바예스까지 저녁 시간 이전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 시간이면 아직 어두울 시간이었다. 코리는 깜깜한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 걱정된다고 말했다. 난 잠시 생각하다가 그녀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핸드폰 불빛 하나 보단 두 개가 더 밝을 테니, 내일 같이 걸을까?” 그녀의 대답은 “Yes.”였다.


 다음 날 새벽, 어디로 가야 할지 전날 미리 봐 두었음에도, 길은 소용없이 어둡고 낯설기만 했다. 코리와 난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물어볼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어제 관리인 아저씨의 말이 떠올랐다. ‘시작부터 오르막길.’ 우리는 핸드폰 불빛을 비춰가며 경사 진 길을 택해 걸어 나갔다.

 처음엔 내딛는 한 발 한 발이 마냥 조심스러웠다. 낯선 곳, 낯선 사람, 낯선 어두움... 분명 길은 트여있겠지만, 기분은 마치 깊은 동굴 속을 걷는 것 같았다. 들리는 건 오로지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였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앞서가던 코리가 멈춰 섰다. 그리고 나를 향해 돌아서며 무언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가까이 가보니 그곳에는 노란 화살표가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길 내내 길을 알려줄, 바로 그 ‘노란 화살표’였던 것이다. 그제야 난 마음이 놓이고 긴장감이 풀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핸드폰 불빛에만 의지할 때는 몰랐던, 멀리 밝아오는 하늘이 보였고, 그 반대편으로는 여전히 떠 있는 별들도 보였다. 떠오르는 빛과 사라져 가는 빛이 함께 있던 하늘은 우리의 발걸음을 붙잡아 둘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윽고 날은 완전히 밝았다. 그녀는 나에게 웃음을 지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난 어리둥절했지만 잠시 후 이해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낯선 이 시간을 잘 넘길 수 있었다. 나 또한 그녀에게 고맙다고 답했다.

 그렇게 인연을 맺게 된 나와 코리는 서로를 도우며 까미노 초반을 함께 했다. 코리가 몹시 지친 날이면 내가 코리 몫까지 저녁 준비를 했고, 외국에 처음 나와본 내가 식당이나 카페에서 어려움을 겪을 땐 코리가 옆에서 메뉴 선택을 도와주었다.



 첫날 피레네 산맥을 넘은 이후 4일째. 코리는 다리 통증으로 힘들어했고 그런 코리를 위해 산티아고까지 단번에 태워다 줄 마법의 지팡이는, 찾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 와서 떠올려보면 마법의 지팡이는 분명 존재했다. 산티아고까지 800km나 되는 긴 거리를 걷는 동안 의지했던 이 스틱처럼 끝까지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준, 서로에게 마법의 지팡이가 되어준 고마운 까미노 친구들..! 바로 그 첫 번째가 나에게는 작은 기차 안에서 만난 키 큰 네덜란드 친구 코리였다.





#나도작가다공모전 #시작 #까미노 #산티아고순례길 #기차 #노란화살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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