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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건수 Apr 22. 2020

책장을 넘기며

때때로 자유시 <2>










 책장을 넘기며




그것을 처음 마주친 건 어느 날 출근길이었다

웬 장정 여럿이 아주머니 하나를 둘러싸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필사적으로 이들과 맞서고 있었다

아직 전 날 술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나에게는

단지 시끄러운 소음이었을 뿐

그저 출근. 이란 면죄부를 손에 든 채

잠시 멈췄다가 이내 그곳을 지나쳤다


그로부터 1년 뒤

그 자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던 공간 하나가 사라졌다

3년 동안 참 뻔질나게도 다녔던

친구 집처럼 놀러 가고 내 집처럼 사람들을 맞이했던 공간이

문을 닫았다

졸업식 이후 처음이었다

어딘가를 떠나며 눈물을 흘려본 것은


다시 몇 년 뒤

만화책과 커피, 때때로 공연을 보러 다녔던

어느 2층의 작은 공간마저 사라진 후

난 다시

그 동네를 찾아갈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다


시간은 흘러

난 섬으로 들어왔고

이곳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니 이미 예전부터 시작되고 있었을 것이다

너무도 많은 게스트하우스

너무도 많은 커피집

매일 같은 길을 다녀도

어제와 다르고 내일도 달라질

너무도 한적한 시골 해변가의 거리

동시에, 너무도 대도시 중심가 같은 거리

피어나는 꽃은 멀리서도 보이고

떨어지는 꽃은 앞에서도 띄지 않는 것처럼

새로 단 간판은 이전의 간판을 지우고 있다


이제 며칠 후

이 섬의 공간 하나가 사라진다

누군가에겐 몇 억 광년 떨어진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을 소행성의 소멸처럼

누군가에겐 알고 있던 몇 되지 않은 세상 하나가 없어지는 것처럼


문을 열고 들어가 안을 둘러본다

한 때는 거실 사방을 가득 채웠던 책들이

어느 한 때는 소등시간마저 잊고서 날 붙들었던 책장의 책들이

이젠 비워지고 비워져 몇 남지 않았다


하나를 뽑아 든다

1장, 2장, 3장, 4장...

소설의 구성처럼 연극의 대본처럼

이곳에도 1장 다음 2장이 있을까

흩어졌던 인물이 한 자리에 모이는 그런 4장을 볼 수 있을까


책장을 넘기며 생각한다

뜻하지 않은 만남과 뜻하지 않은 이별

계절이 돌고 돌아 어느 날 우린

약속 없는 만남을 이뤄낼 수 있을까

한 자리에 뿌려진 서로 다른 꽃씨처럼

같은 비를 맞는 새싹과 작년에 떨궈진 잎들처럼

그렇게

다시 또 그렇게






#자유시 #시 #삼통치킨 #홍대쫄깃쎈타 #한잔의룰루랄라 #쫄깃쎈타 #공간 #제주 #일상 #순간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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