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 검은 옷의 남자

by 무딘

“하아, 하아, 리! 큰일 났어!”


도일이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목소리로 리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야이 씨, 하아 하아, 너 왜 이렇게 연락이 안돼! 하아, 여기 있는 거 찾아내느라 한참 걸렸잖아!”


도일이 숨을 헐떡이며 다가와, 탁자 위에 컵을 집어 들었다.

빈 컵을 들어마시려다, 물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짜증스럽게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물도 없는 컵을 뭐 하러. 하아, 하아, 휴우유, 후우. 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얼른 여기서 나가야 돼.”


유니와 일권을 밀치며 침대 곁으로 다가온 도일이, 리가 덮은 이불을 ‘확’ 걷어 젖히며 리의 팔을 잡아당겼다.


“지금 아픈 사람 두고 뭐 하는 거예요. 일이 있으면 가타부타 설명부터 해야죠!”


유니가 도일의 팔을 막으며 소리쳤다.


“이, 그라제. 감찰사 양반, 아무리 급바드라도 이것은 상도리가 아니제.’


일권도 도일의 앞으로 얼굴을 쑥 들이밀며 눈을 부라렸다.

비토도 망치를 치켜들며 도일을 위협했다.


“나참, 미치겠네. 얘, 지금 수배령 떨어졌다고! ‘환생 관리자 실종사건’, 아니 ‘살혼 사건’의 범인으로 얘가 지목됐다고!”


도일이 소리지르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는 유니와 일권.


“제가요? 오발탄이 아니고 제가요?”


도일과 유니의 팔을 동시에 밀치며 리가 물었다.

그러자 도일이 자신의 도포자락에 손을 넣더니 거기서 뭔가를 꺼냈다.

회색 빛깔의 깃털 뭉치였다.


“살혼 사건 현장에서 나왔던 이 깃털, 암형계에나 있는 이 깃털이 니 숙소에서 잔뜩 나왔단 말이야.”


깃털을 하나 집어드는 리.

끝을 잡고 핑 돌리자 ‘화르륵’ 불타올랐다.


“그것뿐 아니라, 실종된 환생 관리자들의 유류품이 니 숙소에서 발견됐어. 아니, 숙소뿐 아니라 관리국의 책상, 케비넷에서도 발견됐다고. 오발탄이 뒤에서 무슨 술수를 쓴 게 틀림없다고!.”


장비 쌕을 목에 걸어주며, 리를 침대에서 끌어내리는 도일.

리도 엉겁결에 그에 손길을 따라 침대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었다.

수배령이 내렸다고 하니, 머리가 멍해진 유니와 일권은 그런 도일의 행동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지금 감찰사들이 니 위치를 파악하고 이곳으로 오고 있어. 내 운 좋게 먼저 알고 달려온 거야. 붙잡히면 너 무조건 암형계나 분열계 행이야. 암형계서 영원히 불타는 고통을 당하는 수가 있다고. 게다가 이번에 천계에서 난리 난 것도 네가 스파이짓 한 거라, 뒤집어 씌우려는 분위기야. 자자, 어서 여기를 떠야 해.”


도일이 엉거주춤 일어난 리를 문 쪽으로 떠밀었다.


“어떻게든 오발탄을 잡아서 자백을 받는 수밖에 없어. 다행히 한동안 사라졌던 오발탄이 중간계서 어슬렁거린다는 정보가 있으니까, 나가서 니가 직접 찾아보... 라...”


리가 문을 막 나서려는 찰나, 도일이 갑자기 멈춰 서더니 오른쪽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의 오른쪽 눈이 하얗게 변했다.


“이런, 젠장. 벌써 도착했네. 어디 다른 길 없나? 아님, 그냥 싸워야 하나? 쟤네는 체포조라 만만치 않은데.”


‘촥’ 부채를 펼치며 도일이 인상을 썼다.

부채 끝에서 파란 검기가 번뜩거렸다.

리가 긴장하는 도일의 모습을 보다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에테르를 조금 끌어올리자, 순간 리의 눈앞에 검은 공간이 쫙 펼쳐졌다.

한없이 펼쳐진 공간 가운데 뼈대만 하얗게 표시된 3D 건물이 나타났다.

중간계 병원 건물이었다.


계단을 오르는 듯, 3개의 초록색 에테르가 리가 있는 5층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다시 눈을 뜨는 리.

허리띠를 느슨하게 풀며 싸울 준비를 하는 도일의 뒷모습이 보였다.


“고마워요. 감찰사님. 아니, 도일선배. 이렇게까지 신경 써줘서.”


그런 리를 징그럽다는 듯 질색하며 쳐다보는 감찰사.

한쪽 눈썹을 치켜들며 인상을 쓴다.


“갑자기 선배는 무슨. 사내새끼가 약해 빠져 가지고, 벌써 포기하면 어떻게! 죽이 되는 밥이 되든 싸워 봐야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리.


“안 해요, 포기. 오발탄을 찾으면 바로 연락할게요.”


마지막으로 도일의 어깨를 쥐었다 놓은 리는, 곧장 병실 안 창문 쪽으로 뛰어갔다.


“야, 야, 뭐 하려고!”


도일의 고함 소리를 뒤로한 채, 리가 창문을 열더니 바로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놀란 도일이 얼른 달려와 창밖을 내다봤다.

U자를 그리며 하늘 위로 솟아오른 리가, 순식간에 점이 되어 시야에서 사라졌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유니와 일권을 돌아보는 도일.

그가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키자, 익숙한 일이라는 듯 유니와 일권이 동시에 어깨를 들썩 거렸다.

유니의 곁에 선 의원이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연신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


‘용의 길‘을 따라 길게 이어진 영혼의 행렬.

행렬 중간에 경광봉을 든 관리자 서넛이 모여 있다.


“뭐야, 왜 이렇게 늦어진데?”

“수운신께서 긴급회의를 소집하셔서 심판장님이 자리를 비웠다나 뭐래나. 뭐, 곧 다시 시작하겠지.”

“에이, 씨, 또 영혼들 쌓이는데. 골치 아프네.”


‘퇴’ 길가에 침을 뱉으며 머리 위로 경광등을 치켜드는 관리자.


순간 영상을 빨리 감기라도 한 듯, 화면이 수백 개의 가로줄로 쪼개지더니, 갑자기 탁 트인 하늘이 눈앞에 나타났다.

하늘 한가운데 사자 독수리가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가고 있었다.

안쪽 객실에 익숙한 차림의 환생 관리자와 긴장한 얼굴의 영혼이 보였다.


“저는 어디로 가나요?”

“당신이 희망했던 곳, 아메리카. ‘부(副)’의 능력을 떨치며 마음껏 살아보셔야지.”

“아, 아메리카...”


영혼에게 어깨를 걸치며 씩 웃는 환생 관리자.

그게 불편한 듯 관리자의 팔을 조심스레 밀쳐내는 영혼.


휘리릭, 또다시 화면이 빠르게 쪼개지더니, 이번엔 ‘용의 길’ 옆 광장이 나왔다.


“자자, 천계에 가봐야 좋을 거 하나 없어. 곧 대절멸이 온다니까! 이거 읽고 금운신에게 귀의하는 게 훨씬 이득이라고! 자 공짜니까 받아! 어서!”


양손에 파피루스를 치켜든 채, 난쟁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곁에선 영혼들이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휘리릭, 또다시 화면이 쪼개지더니, 이번엔 커다란 두꺼비 눈이 껌뻑거리는 환생 관리국의 옥상이 나타났다.

환생 관리자 둘이 옥상 난간에 등을 기댄 채 한숨을 쉬고 있었다.


“야 이 상황이 말이 되냐? 아무리 몇천 년 만에 하는 ‘만행자 대환생’이라지만, 암형계에서 환생할 영혼들이 이렇게 많다는 게 말이 돼?”

“내 말이. 그럴 거면 애초에 형계로 보내질 말던가. 이것들 자료 정리하다가 내가 먼저 골로 가겠어.”

“거지 같은 감찰사 놈들이 헤집어 놓지만 않았어도, 젠장.”


하늘을 향해 연신 두 주먹을 내지르는 환생 관리자.


‘슈우욱’ 순간 화면이 소용돌이치듯 빨려 나오더니, 중간계 전체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쫙 펼쳐졌다.


“도대체 어디 숨은 거냐. 오발탄...”


중간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까마득한 하늘 위에 둥둥 뜬 채,

리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엄지로 꾹꾹 누르며 인상을 썼다.


지난 천계의 전투 이후, 리에겐 새로운 능력이 또 하나 생겼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집중하면 망원경으로 보듯 선명하게 볼 수 있었고,

바로 옆에 있는 듯 그들의 말 또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마치 빛과 공간의 미세한 파동조차 감지하는 새로운 감각기관이라도 열린 것처럼.


“아아함, 아무리 좋은 능력이 생기면 뭐 하나. 정작 오발탄 하나를 못 찾는데.”


리의 머리 옆에서 팔을 괴고 누운 채, 비토가 하품을 하며 투덜거렸다.

혹시나 싶어 몰래 심어뒀던 위치추적기도 켜봤지만, 역시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조용히 해라. 안 그래도 지금 엄청 스트레스받거든!”

“오발탄도 못 찾으면서, 괜히 나한테 화풀이는.”


혀를 ‘베’ 내밀며 리를 약 올리는 비토.


‘미스터 리!’


“근데 말이야, 지난번에도 이야기했는데, 이번엔 아까 그 할머니도 내가 보이는 거 같더라. 원래 나는 정령이라 내가 보여주는 사람한테만 보여야 하거든. 니 선배인가 뭔가도 나를 보고, 그 할머니도 나를 보고. 이거 혹시 내가 죽을병 같은 거 걸려서 그런 거 아닐까?”


‘미스터 리!’


“잠깐! 쉿!”


리가 인상을 쓰며 얼른 귓바퀴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그리곤 신경을 곤두세운 채 천천히 360도를 돌았다.


“왜? 뭐?”

“분명 들리지 않았어? 전음(傳音) 말이야. 분명 누군가가 내 이름을 속삭인 것 같은데?”

“그래? 난 그런 거 못 들었는데.”


빨간 깔때기를 귀에 가져다 대고, 리를 따라 360도를 천천히 돌며 귀를 기울이는 비토.

여전히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환청 아냐? 난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미스터 리!’


“이거!”


얼른 소리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리.

시선을 집중하자, 환생 관리자 숙소 앞 광장에 웬 검은 로브를 걸친 남자가 보였다.

그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리의 이름을 속삭이고 있었다.


전음으로.


*


‘미스터 리!’


환생 관리자 숙소가 바라보이는 광장 한켠.

도넛 두 개를 붙여 층층이 쌓은 듯한 8 자 모양의 건물을 바라보며, 웬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마까지 검은 후두를 눌러쓴 그는,

입을 가린 채 건물 유리창을 차례차례 바라보며 들릴 듯 말 듯 리의 이름을 속삭였다.

운동을 하며 광장을 도는 영혼들이, 이상하다는 듯 힐긋거리며 그의 곁을 지나쳤다.


‘미스터 리!’


“이봐, 거기! 검은 옷!”


그때, 남자의 뒤쪽에서 그를 부르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모자 후드를 당겨 얼굴을 최대한 가린 채 뒤로 돌아섰다.

그러자 짙은 회색 한복에 파란색 도포를 걸친 남자 둘이 그를 향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중간계의 감찰사들이었다.

그중 하나는 당장이라도 싸울 듯, 오른손에 팔뚝 길이의 곤봉을 들고 있었다.


“뭐야, 이 로브 스타일은. 촌스럽게.”


곤봉을 든 감찰사가 다가오더니 못마땅하다는 듯 곤봉으로 남자의 옷을 이리저리 들췄다.


“이봐, 당신 왜 ‘미스터 리’를 찾지?”


다른 감찰사가 고개를 사선으로 기울인 채, 취조하듯 남자에게 물었다.


“아, 제, 제가요? 제가 누구를 찾았나요?”


검은 옷의 남자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나이 든 사람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야, 장난하나, 우리가 전음도 못 듣는 줄 알아? 온 동네가 떠들썩하게 ‘살혼 용의자’의 이름을 불러놓고, 이제 와서 모르겠다고? 누굴 바보로 아나.”


곤봉을 머리 위로 치켜들며 감찰사가 위협하자, 다른 감찰사가 그를 팔로 제지하며 막았다.


“당신 ‘미스터 리’랑 어떻게 되지? 친구인가? 아니면 무슨 비즈니스라도 하나? 그가 지금 긴급수배 중인 거 모르나?”

“전음으로 몰래 찾는 거 보면 몰라? 뻔해, 이거 스파이야.”


감찰사가 곤봉을 뻗어 남자의 후드 모자를 훅 벗겼다.

그러자 새하얀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긴 노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머리 뒤로 토성의 고리 같은 연한 하늘색의 고리가 보였다.


“뭐야, 천계 쪽이야?”

“봐봐, 내 말이 맞잖아. 이것들 스파이라니까.”


곤봉을 든 감찰사가 팔을 뻗어 노인의 왼쪽 팔을 붙잡았다.

붙잡은 손에 힘을 주자, 아프기라도 한 듯 노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째, 내가 오늘 촉이 좋더라니. 한 건 제대로 물었는걸.”


곤봉으로 노인의 어깨를 톡톡 건드리는 감찰사.


“루시옹!”


그때, 노인이 갑자기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으더니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순간 그의 중지 끝에서 강렬한 불빛이 뻗어 나와 사방을 새하얗게 밝혔다.


“으윽!”


감찰사의 손이 느슨해지는 틈을 타, 얼른 그의 팔을 뿌리치는 노인.

광장 곁의 호수를 향해 있는 힘껏 달렸다.

저들의 시야가 돌아오기 전에, 얼른 호수 속으로 몸을 숨길 생각이었다.


‘휘리리릭!’


그렇게 잠깐 뛰었을까, 부메랑처럼 C자로 허공을 가르며 날아온 뭔가가 노인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감찰사의 곤봉이었다.

곤봉에 맞고 다리가 엉킨 노인은 그대로 한 바퀴 구르며 바닥에 엎어졌다.


“으으윽!”


노인이 왼쪽 팔을 붙잡은 채 힘겹게 돌아서 앉자, 감찰사들이 훌쩍 날아와 그의 앞에 내려섰다.

노인을 내려다보는 그들의 눈은 하얀 덮개로 덮여 있었는데, 잠시 뒤 하얀색이 사라지며 원래의 눈으로 되돌아왔다.


“어이구, 영감. 사람을 봐가며 장난질을 해야지. 아니면 빨리 뛰기라도 하시던가. 큭큭큭”


감찰사가 손을 내밀자, 바닥에 떨어진 곤봉이 휙 날아와 그의 손에 안겼다.


“당신, ‘살혼 사건’ 관련 용의자로 긴급 체포한다.

자세한 건 서에 가서 설명하도록.”


다른 감찰사가 오른손을 치켜들며 말했다.

순간 그의 손에 황금색 포승줄이 나타나 반짝거렸다.


“응?”


포승줄을 쳐다보던 노인의 눈이 갑자기 동그랗게 커졌다.

포승줄 때문이 아니었다.

포승줄 너머 하늘 위로, 작은 점 하나가 보였기 때문이다.


점은 점점 크기를 키우며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는데, 점이 지나온 궤적 위로 미세하게 번개가 지직거렸다.


“미스터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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