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 대사제의 은총

by 무딘

“미스터 리!”


노인이 다가오는 점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리의 이름을 외치자, 두 감찰사가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휘우웅!’


순식간에 이들의 곁으로 날아온 리가 광장바닥에 내려서자, 엄청난 바람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진파(震波)!”


바닥에 내려선 자세 그대로 진파를 쏘는 리.

땅바닥이 큰 파도처럼 출렁하더니 감찰사들을 향해 곧장 뻗어나갔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순간 넋이 나간 감찰사들이, 진파에 튕겨 하늘로 붕 떠올랐다.

물론 곁에 있던 노인까지도.


얼른 자세를 바꾼 리가 감찰사들을 향해 양손을 펼치더니 그대로 밀었다.

그러자 순간 공기가 압축되었다가 ‘펑’ 소리를 내며 펼쳐져 감찰사들을 덮쳤다.


“으아악!”


공기에 휘말린 감찰사들이 허공을 가르며 한참을 날아가, ‘첨벙, 첨벙’ 호수에 빠졌다.


“리! 저 사람!”


비토가 소리지르자 마자, 다시 땅을 박차고 오르는 리.

떨어지는 노인을 그대로 낚아채더니, 그 자세 그대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내려올 때처럼 순식간에 작은 점이 되며, 광장에서 멀어져 갔다.



“푸하아아!”


호수에 빠졌던 감찰사들이 수면 위로 솟아오르며,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노인과 리는 온데간데없고, 호숫가 펜스 한쪽에 모여 웅성거리는 영혼들만 보였다.


“젠장!”


곤봉을 들었던 감찰사가 주먹으로 연신 호수를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


중간계 외곽,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야산 위. 멀리 환생의 숲 입구가 자그맣게 보였다.


“여기라면 안전할 거예요.”


노인을 바닥에 내려놓는 리.

바닥에는 눈도 아니고, 먼지도 아닌 미세한 가루들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가루들이 훅 날려 허공을 떠다녔다.


“분열계에서 분쇄된 영혼의 입자가 차원을 이동해 쌓이는 곳이거든요. 금운신의 석공들이나 가끔 재료를 얻으러 오지, 중간계 사람들은 부정 탄다며 이곳에 오길 꺼리죠.”


노인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바닥의 입자들을 한 줌 움켜쥐었다.

그리곤 가슴에 가져다 대더니 눈을 감았다.


“일자시여. 이들을 보살펴 주소서.”


비토가 흩날리는 입자 사이를 이리저리 오가며 헤엄을 쳤다.


“다른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당신을 여기서 보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 대사제님!”


리를 보며 예의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노인, 아니 대사제. 손을 펼쳐 입자들을 바닥에 쏟았다.

그러다 왼쪽 팔이 아픈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자신의 팔을 주물렀다.


“더구나 저를 찾으실 거라고는... 제가 제 이름을 알려드렸던가요?”

“저도 그 정도 정보력은 있답니다. 리 같이 이래저래 요란한 사람의 경우는 더더욱.”


대사제가 손가락으로 리의 가슴을 쿡 찌르며 미소 지었다.

비토가 맞다는 듯 옆에서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헌데, 무슨 일로 굳이 이곳까지 오셔서...”

“리가 천계에서 가져간 물건을 되찾으러 왔답니다. 그 많은 것 중에 하필 중요한 기록이 담긴 걸 가져가셨더군요.”

“천계의 물건이라면...”


순간 천계 대성당에 갔을 때, 단상 앞에 전시된 파피루스 중 하나를 중력으로 집어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걸 보며 탄성을 질렀던 아이의 목소리까지도.


“아, 파피루스!”

“맞습니다. 옛 선사들이 천계의 역사를 기록한 파피루스. 그중 제일 핵심인 예언서를 가져가셨더군요. 그때는 저도 하도 정신이 없어, 되돌려 받는 걸 잊어버렸지 뭡니까.”


리가 얼른 장비 쌕을 앞으로 돌려 매며 지퍼를 열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가져가려 했던 건 아니고, 그냥 뭐가 쓰여 있나 잠시 보려 했던 건데...”


리가 돌돌 말려있는 파피루스를 집어서 꺼내려는데, 순간 눈앞이 번쩍 하더니 세상이 온통 새하얗게 변했다.

그리곤 마치 하얀 화선지 위에 붓글씨가 써지듯, 굵고 힘찬 글자들이 한 글자, 한 글자 허공에 새겨졌다.


‘탐욕이 순결의 그릇을 흘러 넘칠 때,

하찮은 외침들이 고결한 속삭임을 뒤덮을 때,

당연하지 않은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만연할 때,

불현듯 대절멸의 피눈물이 쏟아지리라.

귀 있는 자여 경계하라.

눈 있는 자여 울부짖으라.

입 있는 자여 경외하라.

이것은 과거이며 또한 다가올 미래다.’


파피루스를 붙잡은 채 멈칫하는 리를 보고, 대사제의 눈이 반짝 빛났다.


“대절멸의 피눈물... 이건 데체...”


혼잣말을 하며 리가 글자를 손가락으로 건드리려는 순간,

순식간에 새하얀 세상이 사라지더니, 다시 대사제와 숲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대사제 뒤, 나무 기둥을 타고 다람쥐가 빠르게 뛰어 올라갔다.


“역시 해(解)의 경지까지 도달했군요. 단번에 암호를 풀어내는 걸 보면.”


대사제가 엉거주춤 파피루스를 들고 있는 리의 손에서 파피루스를 가져왔다.

그리곤 두어 걸음 물러나, 입고 있던 검은 로브를 벗고는 홀가분한 듯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검은 로브가 바닥에 떨어지자 다시금 하얀 가루들이 공중에 흩날렸다.


“늙었나 봅니다. 이제 이런 일은 꽤 고되군요. 자, 이거 받으세요.”


대사제가 파피루스를 하얀 의복 안주머니에 집어넣고는, 그 안에서 뭔가를 꺼내 리에게 내밀었다.

마름모꼴 수정이 달린 은색 목걸이였다.


“순순히 돌려주는 대가입니다. 아니, 실은 이것 때문에 제가 직접 이곳에 왔죠.”

“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리가 대사제의 손에서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눈앞으로 가져와 수정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모래알 같은 무지개 빛 입자들이 마치 물속을 떠다니듯 부드럽게 뒤엉키고 있었다.


“대사제가 되기 전, 저는 ‘월운신의 군사(軍師)’였습니다. 세계에 존재하는 ‘네 가지 힘’, 곧 ‘양력, 강력, 전자기력, 중력’과 그 활용법을 연구하는 전략가였죠. 일자뿐 아니라 일곱 신과 그 보좌관들이 사용하는 기술을 연구하고 다듬는 게 제 주된 과제였습니다. ‘왕자의 난’ 후 월운신께서 승하하신 뒤, 일자의 뜻에 따라 저는 천계로 들어갔습니다. 싸움에서 물러나 평화롭게 사는 것도 그럭저럭 나쁘진 않더군요. 물론 그 후에도 취미 삼아 연구는 계속해왔습니다.”

“월운신의 군사. 아, 그래서 그런 기술들을.”

“그래요. 당신의 모습을 보니 저절로 떠오르더군요. 제가 연구해 온 온갖 기술들이.”


그때, 리의 레이어 워치가 ‘웅웅’ 울어댔다.

잠시 수정에서 시선을 돌려 워치 화면을 보자, 일권으로부터 짧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일권 : 오발탄, 환생의 숲 인근에서 목격됐다는 제보!!’


고개를 번쩍 들며 멀리 환생의 숲 쪽을 바라보는 리.


“당신 팔의 그 회전식 자물쇠, 그건 월운신의 무기였습니다. 그림자 뒤에 숨어, 세계를 위협하는 지식과 무기를 숨기고 잠그는 게 그의 사명이었죠.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월운신의 상징을 차고 있더군요. 어쩌면 당신은...”


“저,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제가 급히 가볼 곳이 생겨서요. 파피루스 건은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가져오면 안 됐었는데. 그리고 이건 감사합니다만 사양하겠습니다. 전 목걸이 같은 건 안 해서요.”


리가 목걸이를 손바닥에 올려 대사제에게 내밀자, 대사제가 씩 웃더니 리의 손을 접어 목걸이를 움켜쥐게 했다.


“허허허. 가지세요. 이건 그냥 목걸이가 아닙니다. 수정 안에는 지금까지 제가 연구한 각종 기술들이 ‘에센스’로 담겨 있어요. 어떤 기술들이 있는지, 어떻게 사용하는지, 무엇에 힘을 줘야 하는지를, 단번에 이해하고 흡수할 수 있도록 해두었죠.”

“아, 에센스...”

“제 연구로 미뤄볼 때, 리의 기술은 완전하지 못해요. 능력의 100%를 다 쓰지 못하고 있죠. 언젠가 위기가 닥쳤을 때, 깨뜨려 사용하면 틀림없이 리의 능력을 배가시켜 줄 겁니다.”


리의 어깨를 토닥인 뒤, 대사제는 근처 나무로 다가가 손바닥을 펼쳐 댔다.

그러자 잠시 나무가 부들부들 떨리다가, 이내 기둥이 ‘쩌적’ 양쪽으로 갈라지며 검은 포털이 드러났다.


“저, 저를 이렇게 까지 도와주시는 이유가...”


포털로 들어서려는 대사제의 등에 대고 리가 물었다.


“글쎄요. 어쩌면 우린 새로운 동문일지도 모르잖아요. 월운신의 정기를 이어받은.”


리에게 씩 웃어 보이는 대사제. 다시 포탈로 들어가려다, 뭐가 떠올랐는지 멈춰서 리를 돌아봤다.


“참! 아까 누구를 찾는다고 했는데, 당신 정도면 굳이 눈으로 무언가를 찾을 필요는 없어요. 전자기력은 생각보다 더 미세하고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거든요. 기술이 절정에 이르면 다른 세계의 낙엽 떨어지는 것조차 감지할 수 있다고 하죠. 집중의 문제랍니다, 집중.”


리에게 엄지를 들어 보이고는 포털 속으로 들어가는 대사제.

대사제가 완전히 사라지자, 나무 기둥이 ‘쿵’ 다시 하나로 합쳐지며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집중의 문제라고...”


워치를 보며 일권의 메시지를 다시 확인하는 리.

고개를 돌려 멀리 환생의 숲 쪽을 바라봤다.

대사제가 건넨 목걸이를 펼쳐 목에 걸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집중해 리, 집중하는 거야!”


양손을 모으며 신경을 집중하자, 예의 검은 화면이 다시 눈앞에 쫙 펼쳐졌다.

하지만 역시나 근처의 모습만 희미하게 하얀 윤곽으로 드러날 뿐이었다.


“집중하라고, 리, 집중!”


자신의 뺨을 두어 차례 때리며 다시 몰입하는 리.

순간, 리의 머리카락이 훅 일어나며 더듬이처럼 두 갈래의 땋은 머리가 쭈욱 뻗어 나왔다.

동시에 검은 공간이 사방으로 확장되며 중간계 전체의 모습이 뚜렷한 윤곽선으로 눈앞에 그려졌다.

펜스에 기대 하품하는 영혼조차 보일 정도로 선명하게.


감찰사로 보이는 초록색 에테르가 몇몇 눈에 띄는 가운데, 마침내 낯익은 파란색 에테르가 리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환생의 숲에서 싸우며 직접 봤던 파란 에테르, 그것은 오발탄이었다.

그는 환생의 숲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눈을 번쩍 뜨는 리.


“거기 있었구나, 오발탄!”


*


“젠장, 더럽게 귀찮네. 이게 몇 번째야.”


웃자란 대나무가 터널처럼 머리 위까지 덮은 길을 걸으며, 오발탄이 연신 투덜거렸다.

그는 몇 걸음 걸어가다 돌아서 입구 쪽을 살피고, 또 몇 걸음 가다 입구 쪽을 살피길 반복했다.

꼭 누구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중간계 어디 있을 거라더니, 개뿔, 코빼기도 안 보이는구만. 꺼꾸리 자식, 거짓말만 했어봐. 아주 아작을 내버릴 라니까. 퉤!”


환생의 숲 안쪽 광장으로 들어서며 오발탄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폭포가 떨어지는 거대한 절벽이 어김없이 그를 반겼다.

그는 잠시 벽면에 늘어선 환생의 문들을 바라보다가, 문 좌우의 대나무 숲을 한 번씩 쳐다봤다.

대나무 수풀 속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일단, 만일을 대비해 문이라도 열어놓을까.”


왼쪽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생각에 잠긴 오발탄은, 결심이 섰는지 중앙의 비석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에메랄드빛 키를 꺼내 비석에 찔러 넣었다.

그러자 여느 때처럼 5열로 나뉜 절벽면 중 3번째 벽이 ‘구구구궁’ 소리를 내며 슬롯머신처럼 빠르게 돌았다.

그러다, 이내 하나의 문에서 멈춰 섰다.


문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잡는 오발탄. 다른 문들과는 다르게 이번 문에는 ‘환(換)’이라는 글자 대신, 알 수 없는 이상한 기호가 쓰여 있었다.


“꼭 저 키를 쓰라더니, 이거 때문이었나. 칫, 마장군도 참 겁이 많구만.”


오발탄이 손잡이를 돌려 문을 잡아당겼다.

역시나 하얀색 막 같은 게 문 뒤쪽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쿵!’


그때, 오발탄의 등 뒤로 묵직한 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오! 발! 탄!”


광장 전체를 울리는 엄청난 괴성과 함께 바람이 훅 불어와 오발탄의 머리를 뒤 헝클었다.

동그랗게 눈을 뜬 채, 뒤를 돌아보는 오발탄.

환생 관리사 복장의 남자가 광장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천정을 뒤덮은 대나무 잎 사이로 빛 한 줄기가 파고들어, 마치 핀 조명처럼 남자를 비췄다.

익숙한 얼굴의 사내였다.


“크으, 드디어 왔구나, 미스터 리.”


리를 보며 어금니를 깨무는 오발탄.


“도대체 얼마나 망가지려는 거야, 당신!”


리의 호통에는 대꾸도 않은 채, 오발탄은 눈을 좌우로 굴려 가며 양쪽 대나무 숲을 쳐다봤다.


그때, 대답이라도 하듯 숲 사이에서 뭔가가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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