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아아악!’
칠흑 같이 어두운 공간 속,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요란하게 메아리쳤다.
잠시 뒤, 짙은 어둠 한가운데에 ‘화르륵’ 화염 한줄기가 일었다.
자세히 보면 횃불이 타는 게 아니라, 죄인 하나가 불길에 휩싸여 고통스럽게 불타는 것이었다.
횃불이 어둠을 밀어내자, 습기로 번뜩이는 동굴 안쪽이 모습을 드러났다.
동굴이 밝아지자마자 ‘후다다닥’ 소리와 함께 쥐인 지, 사람인지 모를 동물들이 빛을 피해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불길 뒤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원형 목욕탕이 자리 잡고 있었다.
탕 안은 찐득거리는 새빨간 피로 가득 차 당장이라도 넘칠 듯 찰랑거렸다.
‘슈우웅’
그때, 검은 포털이 화염 위에서 나타나더니, 은색 구슬 하나가 ‘휙’ 튀어나왔다.
구슬은 정찰이라도 하듯 동굴 안을 한 바퀴 크게 돌다가 욕탕 속으로 쏙 들어갔다.
잠시 뒤, ‘치이익’ 소리와 함께 마장군 마경의 얼굴과 상체가 탕 밖으로 천천히 올라왔다.
온전한 손으로 힘겹게 투구를 벗어버리는 마경.
그의 얼굴을 타고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잘려 나간 그의 왼팔에선 용암 같은 주홍빛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크으윽.”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이를 깨무는 마경.
고통이 심한 듯, 그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꼴이 말이 아니구나.”
그때, 굵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동굴을 울리며, 욕탕 앞 공간이 신문지 구겨지듯 일그러졌다.
그러다 그 안에서 뭔가가 스윽 빠져나왔다.
해골 갑옷에 화염 망토를 걸친 사내, 마제였다.
그는 손가락 뼈로 만들어진 왕관을 벗어 욕탕 속에 담그더니 이리저리 휘저었다.
마제를 보고 마경이 얼른 몸을 일으키다가, 다시 탕 속으로 미끄러졌다.
사라진 다리 때문에 중심을 잡는데 애를 먹는 듯했다.
“됐다. 그냥 있어라.”
“존명. 죄송합니다. 방심했습니다.”
“유물은?”
“방해꾼이 나타나는 바람에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욕탕 귀퉁이에 걸터앉는 마제.
왕관에 뭍은 피를 탈탈 털어내더니 다시 머리에 썼다.
“천사장이랑 충돌한 건가?”
“아닙니다. 그놈이었습니다. 자물쇠 덩어리. 어떻게 알았는지 제가 유물을 가져가려는 타이밍에 딱 그곳에 있더군요.”
“흠. 이번에도 그놈이 유물을 흡수했나?”
“네. 모습이 변하며 에테르가 일순간 폭증했던 걸로 볼 때, 놈이 흡공을 써서 유물을 흡수한 것 같습니다.
다만 그게 유물에 담긴 에테르 때문인지, 아니면 자물쇠가 풀리며 녀석의 잠재된 에테르가 나오는 건지는 불확실합니다. 크흐흑.”
갑작스레 고통이 몰려오는 듯, 마경이 잘린 팔을 붙잡은 채, 몸을 부르르 떨며 신음했다.
그런 마경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올리는 마제.
마제의 화염 망토가 핏물에 잠기며 ‘치이익’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몸을 회복한 뒤, 더는 걸리적거리지 못하도록 바로 가서 놈을 제거하겠습니다. 중간계 스파이에게 놈의 동향을 파악해 두라고 이미 지시해 뒀습니다.”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마제.
“제1 마장군 몽마가 네 형이지?”
“네? 아, 네, 그렇습니다.”
“지금은 환생계에서 영물화(靈物化) 된 유물을 쫓는 중이고?”
“네.”
“그래. 동기야 확실하면 확실할수록 좋겠지.”
“네? 그게 무슨...”
능글맞게 ‘씨익’ 웃어 보이는 마제.
그러다 마경의 어깨를 움켜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순간 엄청난 고통에 마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으으윽, 저, 저, 마제시여, 제게 다, 다시 한번만 기회를 주시면, 크윽, 꼭 제 몫을 다하도록...”
“이게 니 몫을 하는 거야.”
순간, 마제의 눈에서 붉은 에테르가 확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마경을 움켜쥔 마제의 손에서 보라색 화염이 ‘화르륵’ 일어나, 마경의 온몸을 휘감았다.
“크아악, 마, 마제님! 크아아악!”
순식간에 보라색 화염에 둘러싸여 고통스럽게 불타는 마경.
보라색 화염은 재조차 남기지 않고 마경의 몸을 말끔히 불태웠다.
‘치이익’ 마경을 다 먹어치운 화염이 김을 내뿜으며 천천히 핏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욕조에서 몸을 일으키는 마제.
해골 갑옷에 튄 핏물을 닦아내며 횃불 쪽으로 다가갔다.
“암(暗), 거기 있느냐?”
마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닥에 드리워진 마제의 그림자에서 검은 형체가 마치 물방울이 분리되듯 떨어져 나왔다.
그러더니 마제를 향해 무릎 꿇었다.
형체도 없이 오직 그림자로써만.
“존명. 암, 대령하였습니다.”
“제1 마장군, 몽마에게 전해라. 마경이 ‘유물을 흡수한 자’에게 당한 피해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소멸했다고. 중간계 스파이가 그를 추적 중이라고.”
“존명!”
스르륵 미끄러져 동굴 벽,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마물.
팔짱을 낀 채 이글거리는 횃불을 가만히 바라보는 마제.
그러다 갑자기 횃불을 향해 ‘후’ 입바람을 불었다.
‘끼아아악!’
마제의 입바람에 불길이 거세지자, 죄인이 더욱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었다.
그 모습이 만족스러웠는지, 마제가 이빨을 보이며 웃었다.
*****
“야, 나 이거 겁나는데.”
의원이 창가를 보며 돌아누운 리에게 손을 대려다 말고, 슬쩍 손을 빼며 말했다.
리의 목 뒤엔 손바닥 만한 ‘부적’이 붙어있었다.
부적엔 수(水)라는 한자가 사방으로 발을 뻗으며 테두리를 만들고 있었다.
“워메, 미처 불겠네. 의원님이 붙이라 안 했소. 이놈이 폭주할 때 쓰라고. 인역이 만들 걸 인역이 겁내불믄 워쩐다요.”
“이 사람아, 내가 진짜 쓸 줄 알았나. 그냥 안전상 가지고 있으라던 거였지. 그리고 이거 내가 만든 거 아니거든. 수운신께서 만드신 거거든.”
“하이고야, 뭔 사내가 샛바닥이 요로코롬 길당가.”
“야, 거 ‘흰털 원숭이의 심장’이 봉인(封印)에는 직빵이라는데, 그거라도 구해놓고 해 볼까. 거 왜, 너 쫓아다니는 오랑우탄 있잖아!”
“아따 싫어요! 길에서 마주치기만 혀도 깜짝깜짝 놀라는디, 무슨. 비켜보소! 내가 직접 할랑게.”
“야, 야, 조심해. 갑자기 폭주할 것 같으면 얼른 다시 붙여야 돼!”
의원을 팔로 밀치며 리의 머리맡에 서는 일권.
언제 나왔는지 비토가 리의 머리 위에서 팔짱을 낀 채 일권을 째려보고 있었다.
“이깟 게 뭐시 무섭다고. 의원이 돼가지고 시리, 참내.”
팔을 걷어붙인 일권이 깎지를 낀 채 양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두두득’ 뼈 맞춰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고개를 양쪽으로 빠르게 꺾으며 양손을 털어대던 일권은 ‘휴우’ 몇 차례 숨을 고르더니, 이내 손을 뻗어 부적 끝을 살짝 잡았다.
그가 부적을 잡자마자, 순간 리가 움찔하고 움직였다.
“어! 야, 움직인다! 조심해!”
잔뜩 몸을 움츠린 채,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말하는 의원.
리의 움직임에 놀라 손가락 끝에 잔뜩 힘을 준 채, 꿀꺽 침을 삼키는 일권.
순간 천계의 하늘을 가득 채우던 ‘검은 덩어리’의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워허메, 참말로 겁이 나긴 하요. 하하하.”
부적을 집은 손가락을 슬쩍 떼며 뒤로 물러서는 일권.
‘휴우우’ 의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권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멋쩍게 웃자, ‘쯧쯧쯧, 네가 그럼 그렇지’라며 의원이 혀를 찼다.
“캉캉!”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유니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품에 안긴 캉캉이가 일권이 반갑다는 듯 꼬리를 흔들며 밝게 짖었다.
“문병 오는데 강아지는 뭣 헌다고.”
“리는 좀 어때요? 정신은 돌아왔어요?”
일권의 지적은 귓등으로 흘려 넘긴 채, 유니가 리의 침대 위에 캉캉이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말랑한 매트 위에서 캉캉이가 빠르게 몸을 털어댔다.
“휴우, 먼지 봐라. 안 좋아, 많이. 아직 의식도 없을뿐더러, 에테르의 흐름이 무척 불안정해. 사람은 보통 한 종류의 에테르를 가지는데, 이 녀석은 여러 종류의 에테르가 뒤섞여 있어. 꼭 폭발을 위해 만든 화약 같달까. 수운신의 부적으로 간신히 억누르고 있긴 한데,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
의원이 팔짱을 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창가를 향해 뻗은 리의 왼쪽 팔뚝 위로, 회전식 자물쇠가 살짝 보였다.
“이제 2개밖에 안 남았어. 자물쇠 말야. 내가 볼 때, 저거 분명 폭발 억제용이야. 저거마저 없어지면 얘 백퍼 폭발한다.
내 장담해.”
입을 비죽거리며 리의 팔을 내려다보는 유니.
비토가 캉캉이에게 다가와 ‘메롱’ 하고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었다.
그걸 보고는 캉캉이가 잠시 꼬리를 흔들다가 갑자기 비토의 다리를 덥석 물었다.
실제로는 물리지도 않으면서, 아픈 척 인상을 쓰는 비토.
“바깥 분위기는 좀 어떻고?”
“장난 아니에요. 난리, 난리 이런 난리가 없어요. 천계로 마물이 쳐들어왔고 다수의 영혼까지 소멸했으니, 관련자를 색출하라고 엄명이 떨어졌나 봐요. 감찰사들이 끄나풀 찾는다고 여기저기 죄다 들쑤시고 있어요. 우리 팀도 한번 싹 훑고 가서 지금 난장판이에요. 안 그래도 ‘암형계 대환생’ 인원이 갑자기 늘어서 죽을 맛이었는데, 이젠 자료까지 다 다시 정리해야 돼. 짜증 나, 진짜!”
쾅 주먹으로 벽을 치는 유니.
일권이 얼른 침대 반대편으로 몸을 피해 유니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서, 나 혼자 서류뭉치 속에 처박아 놓고, 천계까지 꾸역꾸역 가서 그놈의 오발탄은 잡았데요?”
“암만, 오발탄은 무슨. 폭주하는 걸 내가 간신히 업어 왔구마. 나가 조금만 부적을 늦게 붙였어도, 리 저거 폭주하다가 디져 부렀을 것이네.”
턱을 쑥 내밀며 으스대는 일권.
유니가 리의 목뒤에 붙은 부적을 슬쩍 쳐다봤다.
“잡으라는 오발탄은 못 잡고, 엉뚱한 데 가서 쓸데없이 폭주나 하고 앉았고. 으이그 이 골칫덩어리!”
거침없이 손을 뻗어 부적을 떼려 하는 유니.
“안돼!”
“안 돼야!”
앞으로 손을 뻗으며 거의 동시에 소리를 지르는 의원과 일권.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쾅!’ 그때, 병실 문을 걷어차며 누군가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희고 긴 머리카락을 질끈 묶은 할머니였는데, 주름 가득한 얼굴에 노기가 잔뜩 서려 있었다.
순간 당황한 세 사람은 그대로 몸이 굳은 채, ‘누구?’라는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내 시끄러워서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잖아! 저리 비켜!”
짜증스럽게 지팡이를 콩콩 짚으며 걸어 들어온 할머니는, 지팡이를 들어 길을 막아선 의원과 유니를 한쪽으로 물렸다.
“어, 저기, 할머니. 어디서...”
유니가 할머니를 제지하려 들자, 의원이 유니의 팔을 붙잡아 뒤로 당겼다.
유니가 ‘왜?’라는 표정으로 의원을 바라보자, 의원이 문밖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문밖에는 한쪽 어깨가 훤히 드러난 승복 차림의 스님이 서 있었다.
8개의 점이 이마에 나란히 찍힌 대머리 스님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검지손가락을 입술 위에 대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의미 같았다.
“네 놈이구나. 이 근방을 요란스럽게 만드는 작자가.”
침대 곁에 서서 모로 돌아누운 리의 오른쪽 팔을 잡아당기는 할머니.
진맥을 하는 듯 리의 손목에 자신의 손가락을 얹었다.
그러다 뭐가 느껴졌는지, 무섭게 눈썹을 치켜떴다.
“흐음. 쯧쯧쯧. 어쩌자고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는 할머니.
진맥을 하느라 감았던 눈을 뜨더니, 리의 모습을 잠시 살폈다.
그러다 리의 목뒤에 붙은 부적에서 눈이 멎었다.
“에, 또, 그건 말이죠. 이자의 폭주를 막기 위해 붙여 둔 부적인데요, 잘 아시겠지만서도...”
의원이 얼른 할머니의 곁으로 다가가 설명하려는 찰나, 갑자기 할머니가 팔을 쭉 뻗더니 부적을 확 잡아뗐다.
“앗!”
“으악!”
의원과 일권이 합창하듯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