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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 불안정

by 무딘

“게르디달타, 무체사하카!”


바닥에 드러누운 리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대사제의 전음을 따라 했다.

그 순간 리의 몸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동시에 번쩍거리던 ‘일자의 눈물’도 자취를 감췄다.


*


“골라요 골라, 돈 놓고 돈 먹기.”


기다란 탁자 위에 엎어놓은 컵들을 좌우로 현란하게 움직이는 야바위꾼.

리가 그 앞에 서서 멍하니 컵들을 바라보고 있다.


흠칫 놀라며 정신이 드는 리.

얼른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자,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장통이었다.


“여, 여긴?”


의아한 눈빛으로 재차 두리번거리는 리.

대사제도, 빛의 성당도, 마경도, 괴수도 사라지고 없었다.

자신이 뜬금없이 왜 시장 한가운데 있는 건지, 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봐, 할 거야 말 거야! 안 할 거면 비키던가. 가운데를 딱 막고 서서는.”


자줏빛 모자를 거꾸로 쓴 야바위꾼이 리를 보며 인상을 썼다.

리는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 쭈뼛거리며 뒤로 몸을 뺐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구경꾼들이 리의 몸이 닿자, 신경질을 냈다.


“어이, 정말 갈 거야? 그러면 안 될 텐데.”


머리로 자신의 뒤쪽을 가리키는 야바위꾼.

리가 멈춰서 야바위꾼의 뒤를 보자, 구닥다리 브라운관 TV 하나가 놓여 있었다.

TV 속에서 대사제와 아이들, 그리고 뭉치 일행의 겁에 질린 얼굴이 드라마처럼 차례차례 나왔다.

그들의 머리 위로 엄청난 크기의 화염이 아가리를 벌린 채 달려들고 있었다.


“이거 맞추면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 상관없으면 그냥 죽게 내버려 두던가.”


리를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짓는 야바위꾼. ‘아...’ 미심쩍은 얼굴로 야바위꾼을 바라보는 리.


야바위꾼이 능글맞게 윙크를 했다.


이 사람이 누군지, 도와줄 능력은 진짜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뭔들 믿을 수 있으랴. 하지만 뭐든 해야 했다.

아니하고 싶었다.

자신보다 강한 저 마물을 이기려면. 최소한 저들의 목숨이라도 구하려면.


머뭇머뭇 테이블로 되돌아오는 리.


잠시 야바위꾼의 얼굴을 쏘아보다가, 이내 그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손이 전보다 더 신나게 테이블 위를 오갔다.


“정말 도와줄 수 있지?”

“당연하지. 당장이라도 내 살려줄 수 있지. 그러니까 맞춰보라고. 어디 어디 있을까, ‘일자의 눈물’이?”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 그의 손과, TV 속 사람들의 겁에 질린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는 리.


‘이렇게 노닥거릴 때가 아닌데...’


이를 꽉 깨문 리는 손을 쾅 내리쳐 야바위꾼의 손을 붙잡았다.


“이거!”

“어허, 그 양반 성질 한번 급하시네. 정말 이거야? 확실해?”


느끼한 미소를 짓는 야바위꾼.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리.

옆의 구경꾼들이 재미있다는 듯 킥킥거렸다.


“괜찮겠어? 후회할 텐데.”


야바위꾼이 리가 잡지 않은 다른 컵을 달칵거리며 살살 약을 올렸다.


“맞아!”

“보지도 않고?”

“상관없어, 뭐든. 다 열어볼 거니까.”

“기회는 한 번뿐인데?”

“안 되면 힘으로라도.”

“하하하하, 재미있는 친구 구만, 재미있어. 휘이익!”


야바위꾼이 휘파람을 불자, 어깨에 쇠몽둥이를 걸친 거구 둘이 쿵쿵거리며 다가와 야바위꾼의 뒤에 섰다.

‘오오!’ 구경꾼들의 입에서 나지막이 탄식이 새어 나왔다.


“좋아, 그게 니 선택이라면. 자, 돈 놓고 돈 먹기, 맞으면 저들을 살려줄 텐데, 틀리면 넌 뭘 내놓을 테냐? 돈? 명예?”

“나! 내 목숨!”


전에 없이 단호한 표정을 짓는 리.


‘오호호! 패기 보게’ 옆의 구경꾼 하나가 리에게 어깨를 부딪히며 웃었다.


“굳이? 저들을 위해서? 솔직히 저 사람들, 잘 아는 사람도 아니잖아? 저들을 위에 네 목숨까지 내놓을 필요가 있을까?”


다시 TV 속 사람들을 천천히 바라보는 리.

하나하나가 어느덧 익숙해진 얼굴들이었다.


“모르겠어. 그냥 구하고 싶어. 그게 그냥 내가 해야 할 일 같아.”


야바위꾼은 웃는 듯 우는 듯, 묘한 표정을 지으며 리를 바라봤다.

리의 얼굴에서 은은하게 은빛 아우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이미 시작됐구나, ‘다른 이야기’가. 재미있군, 재미있어. 하하하. 인생 이래서 살아봐야 안다니까. 하하하하하!”


함박웃음을 웃으며 붙잡힌 컵을 뒤집는 야바위꾼.

컵 속에서 ‘일자의 눈물’이 셋으로 분리되었다가 하나로 합쳐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좋아, 나도 빠질 수 없지! 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야바위꾼. ‘덜컹!’ 테이블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러자 순간 온 세상이 모자이크처럼 미세한 정육면체로 우수수 부서져 내렸다.


“정신줄 꽉 잡아. 한동안 어지러울 테니!”


야바위꾼의 목소리가 어지럽게 메아리쳤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리.


야바위꾼도, 구경꾼도, 거구들은 물론 시장까지도, 미세한 작은 조각으로 와르르 부서져 내렸다.

그러더니 소용돌이치며 리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때에에에엥!’


마경의 화염이 대사제 일행을 덮치려는 찰나, 갑자기 맑고 투명한 종소리가 천계 전체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마경의 화염이 순식간에 회색 연기로 훅 변하더니, 일행들을 뒤덮었다.


질끈 눈을 감았다가 뜨는 대사제.

훅 불어닥친 바람에 머리카락이 파르르 흔들렸다.


손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기침을 하는 대사제.

그러다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얼른 리 쪽을 돌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다시 나타난 리가 자신들을 향해 한쪽 팔을 내밀고 있었다.

대사제는 리를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 역시!”


대사제 쪽을 바라보던 리는 팔을 거두며 마경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리의 모습은 이전과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노란색 머리카락 사이에 8자로 땋아진 주황색 머리카락이 더듬이처럼 쭉 뒤로 뻗어 있었고,

양 눈썹과 턱 사이에는 T자형 검은 문신이 마치 인디언처럼 이어져 있었다.


오른손과 팔 전체는 하얀 막 같은 것으로 뒤덮여 반짝거렸고,

등 뒤 작은 태양에서부터 부채꼴로 뻗어 나온 검은 그림자는 발뒤꿈치까지 이어져 마치 망토처럼 휘날렸다.


무엇보다 시선을 끄는 건, 리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주황색 구체였다.

지구를 공전하는 달처럼, 구체가 리 주변을 한 바퀴 돌 때마다 희미한 에테르 꼬리가 잠시 남았다가 흩어졌다.


“리? 리 맞는 거지?”


리의 스카프에서 빠져나온 비토가 달라진 리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대답을 기대하며 리의 얼굴 앞에서 좌우로 손을 흔들었지만, 그의 존재를 보지 못하는 듯 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실망한 비토가 울상을 지었다.


“흠...”


갑자기 자신이 쏜 화염이 사라지자 마경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역시나, 쓰러졌던 리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몸에 있던 상처는 말끔히 사라지고 겉모습도 이전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또 네놈이냐, 저 방해꾼을 구한 게.”


화검을 거두며 씁쓸한 듯 입을 비죽거리던 마경은, ‘일자의 눈물’이 있던 자리를 슬쩍 곁눈질했다.

유리 상자는 물론 반짝거리던 자수정도 사라지고 없었다.


다시 리를 노려보는 마경.

리의 주변에 전에 없던 주황색 에테르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눈에서도 주황색 에테르가 불꽃처럼 뻗어 나왔다.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는 마경.


“흡공(吸功)인가... 자물쇠가 하나 또 풀렸나 보군. 쳇, 이거 마제님을 뵐 면목이 없겠는걸.”


고개를 끄덕거리며 손을 뒤로 돌려 화검을 양손에 뽑아 쥐는 마경.

두 손잡이 끝을 맞붙이자 하나의 창처럼 서로 들러붙더니, 검 끝에서 화르륵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어쩔 수 없지. 네 목이라도 가져가는 수밖에.”


“크아아아앙!”


마경이 공격하려 자세를 낮추려는 찰나, 마경에게로 날아오던 괴수 아모툼이 변신한 리를 보고는 발작하듯 괴성을 질렀다.

그리곤 날개를 펼쳐 제자리에서 핑그르르 돌더니, 마치 회전 톱날처럼 리를 향해 돌진했다.


“리! 오른쪽!”


마경에게서 눈도 떼지 않은 채, 아모툼을 향해 오른쪽 팔을 뻗는 리.


“천압!”


리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순간 아모툼이 공중에 그대로 멈춰버렸다.

순식간에 거대한 투명 정육면체가 아모툼의 전신을 완전히 둘러싼 것이었다.


“분(分)!”


이어 리가 주문을 외우자, ‘챙’ 소리와 함께 투명 공기 덩어리가 큐브처럼 27조각의 작은 정육면체로 ‘차차작’ 쪼개졌다.

안에 있던 아모툼의 몸도 27조각으로 갈가리 잘렸다.

아모툼의 초록색 피가 절단면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투투두둑’


리가 팔을 거두자 바닥으로 우르르 떨어지는 공기 덩어리들. 아모툼은 그 안에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목숨이 끊어졌다.


“쯧쯧쯧. 낄 데 안 낄 데를 못 가리고. 하여간 짐승들이란.”


마경이 아모툼을 향해 잠시 시선을 돌린 순간, 번개 한 줄기가 마경의 얼굴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얼른 검을 돌려 번개를 튕겨내는 마경.


하지만 대처가 늦었는지 튕긴 번개가 마경의 투구 눈 부분을 스치고 지나갔다.

잘린 틈으로 마경의 붉은 눈알이 보였다.


“크크. 제법이구나. 너도 곧 저 꼴을 만들어 주마.”


순간, 마경의 눈이 번쩍 하더니 그의 눈에서 주황색 빛이 레이저처럼 뿜어져 나왔다.


“해(解)”


리가 레이저를 향해 손바닥을 펴자, 리에게 곧장 날아오던 레이저가 검은 그을음이 되어 주르륵 바닥에 떨어졌다.


“리! 뒤쪽!”


그때, 언제 던졌는지 마경의 화검이 프로펠러처럼 빠르게 돌며 리의 뒤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눈으로 화검의 경로를 슬쩍 확인한 리는, 뜬금없이 반대편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걸음 가다 휙 뛰어오르더니, 오른손을 앞으로 뻗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커헉!”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에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순간, 리에게 목덜미를 붙잡힌 마경의 모습이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섬뢰!”


허공을 붙잡은 리의 손끝이 번쩍거리더니 ‘파박’ 번개가 일었다.

번개는 투명해졌던 마경의 몸을 지직거리며 타고 흘렀다.


“크허헉”


번개에 감전되어 ‘쿵’ 바닥에 무릎을 꿇는 마경.

보였다, 다시 사라졌다를 반복하더니, 결국 투명화가 풀리며 모습이 드러났다.


“크으윽. 이, 이럴 리가... 나를, 나를 건드릴 수... 있을 리가...”


자신의 목을 움켜쥔 리의 팔을 양손으로 붙든 채, 마경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리! 뒤쪽!”


비토가 소리치자마자, 곡선을 그리며 허공을 날아온 화검이 훅 달려들어 리에게 박혔다.


“쩡!”


쇠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자, 목을 붙잡힌 마경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에테르를 훅 끌어올려 리의 팔을 밀쳤다.


“저리, 꺼져... 응?”


있는 힘껏 리를 밀어냈지만, 리의 몸은커녕 팔조차 뿌리칠 수 없었다.

엄청난 힘으로 누르는 무언가 때문에, 마경은 무릎조차 펼 수가 없었다.


“이, 이게 왜?”


몸을 부르르 떨며, 리를 올려다보는 마경.

리의 머리 위로 화검이 둥둥 떠 있는 게 보였다.

정확히는 리의 몸 주위를 돌던 주황색 구체에 화검의 날이 꽂혀있었다.


“이럴... 리가. 너 따위에게 이런 힘이...”


왼손을 펴서 마경의 화검을 붙잡는 리.

리가 붙잡자마자, 화검의 화염과 리의 번개가 합쳐지며 미친 듯이 춤을 췄다.


“죽어라, 이제.”


마경의 목을 억지로 옆으로 꺾는 리.

마경의 어깨와 목덜미 사이가 보이자 거침없이 화검을 내리그었다.


“아아악!”


고함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는 마경.


그렇게 온몸에 힘을 준 채 기다리는데, 이상하게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응? 뭐지?’


이어 단단히 잡혔던 목덜미마저 허전해지더니, 몸을 짓누르던 힘조차 완전히 사라졌다.


“크아아아악!”


그때 들리는 리의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

마경이 얼른 눈을 뜨자, 리가 자신의 왼쪽 팔목을 붙든 채 휘청거리는 게 보였다.


리의 왼쪽 팔목은 풍선처럼 부풀어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울그락불그락거렸다.

게다가 그 끝에선 피처럼 검붉은 액체가 스멀스멀 뻗어 나와 공중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불안정해!”


대사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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