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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 대사제의 속삭임

by 무딘

“뭐 하는 거냐! 지금.”


제2마장군, 마경이 고함을 지르자, 마병 셋은 마경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비켜섰다.


천압에 붙들려 고통받는 괴수를 잠시 쳐다보다, 고개를 돌려 바닥의 리를 바라보는 마경.

리의 몸에선 번개가 지직거리고 있었다.


“네놈이었나? 조금은 모습이 달라졌군.”


무표정한 얼굴로 등 뒤에 화염검을 꺼낸 마경은, 허공을 향해 검을 내리그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몸에서 주황색 에테르가 ‘화르륵’ 일었다.


동시에 반달 모양의 화염이 쏜살같이 괴수를 향해 날아가더니, 리가 만든 공기덩어리를 설컹 잘라냈다.

덕분에 간신에 다중 천압에서 빠져나온 괴수가 ‘쿵’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천, 천, 천사장께 연락드리게. 마장군이, 마장군이 천계에 나타났다고. 어서!”


대사제가 소리치자, 젊은 사제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후다닥 성당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삼 천사장’이 나타나면 귀찮아진다. 서둘러 ‘조각’부터 회수하도록.”


마경의 지시에 세 마병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크아아아앙’


그때 정신을 차린 괴수 아모툼이 괴성을 지르며 다시금 에테르를 끌어올렸다.

그의 등줄기에서 육각형의 가시들이 ‘표보복!’ 튀어나오더니, 표창처럼 핑그르르 돌며 리를 향해 날아갔다.


“갈!”


순간, 에테르를 끌어올리며 고함을 지르는 마경.

그러자 주황색 파장이 원형을 이루며 물결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 기운에 아모툼의 가시들은 경로를 이탈했고, 천계의 영혼들은 파동에 휩쓸려 우르르 쓰러졌다.

리와 괴수도 뒤로 쭈르륵 밀려났다.


“그게 네가 할 일이 아닐 텐데. 임무를 잊어버렸나?”


눈썹을 치켜세우며 괴수를 쏘아보는 마경.

괴수는 마경의 위세에 잠시 쭈뼛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휙 돌려 성당 반대편, 마을 쪽으로 날아올랐다.


광장 초입에서 백마를 탄 채 남의 일처럼 상황을 지켜보던 천계병들이, 걸음아 날 살려라, 부리나케 달아났다.


“안돼, 거기 멈추지 못해! 천압!”


리가 괴수를 멈추려 천압을 만들려는 순간, 왼쪽 시야에서 뭔가가 번쩍하고 빛났다.

깜짝 놀라 뒤로 뛰어오르는 리.

바닥에 커다란 반달 낫이 박혔다가, ‘드드득’ 바닥을 긁으며 다시 마병에게로 되돌아갔다.


“영 걸리적거리는데, 너.”


마병들에게 고갯짓을 하는 마경.

그러자 대검과 낫을 뽑아 든 마병이 리를 향해 미끄러지듯 날아갔다.


“죽이지 말라곤 안 했으니까.”


동시에 또 다른 마병이 체조 선수처럼 앞으로 ‘휘리릭’ 돌더니 리를 향해 방패를 던졌다.

새파란 검기가 칼날 끝에서 번뜩이는 방패가 핑그르르 돌며 날아왔다.


“섬뢰(纖雷)!”


리가 그들을 보자마자 양팔을 뻗으며 소리치자, 손가락 끝에서 번개가 ‘쩌저적’ 뻗어 나와 두 마병에게 날아갔다.


장검 마병은 얼른 검을 뽑더니 팽이처럼 빠르게 회전했다.

그러자 날아온 번개가 회전하는 검에 부딪히며 튕겨 나갔다.


낫 마병은 번개를 향해 곧장 날아오나 싶더니, 갑자기 모습을 감췄다.

과녁을 잃은 번개가 허공을 가르며 맥없이 날아갔다.


“리! 뒤!”


그러다 갑자기 리의 등 뒤에서 나타난 낫 마병. 리의 허리를 향해 가로로 낫을 그었다.

얼른 제자리에서 뛰어올라 낫을 피하는 리.


반격하려 낫 마병을 겨냥하는데, 어느새 바로 앞까지 방패가 날아와, 리의 목덜미를 향해 달려들었다.

얼른 몸을 뒤로 젖혀 피하는 리.

방패의 검기가 리의 어깨를 스치며 피가 ‘팍’ 튀었다.


“으윽!”


인상을 쓰는 리.

고통을 느끼는 것도 잠시, 바로 이어 눈앞에 장검 마병이 나타났다.

머리 위로 장검을 치켜든 그는 리를 향해 그대로 검을 내리그었다.

붉은 화염이 리를 향해 훅 날아왔다.


“중력구!”


리는 황급히 작은 중력구를 소환해 자신의 몸을 보호막처럼 감쌌다.

화염에 맞은 중력구가 뒤로 쭈욱 밀려나며 ‘드르르륵’ 땅바닥을 긁다가 멈췄다.


“헉, 헉, 헉...”


고작 일합의 공방을 주고받았을 뿐인데, 벌써 호흡이 흔들리는 걸 느끼는 리.


“리, 세다. 하나같이 엄청 쎄.”


비토가 스카프 속에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리를 바라봤다.


장검 마병, 낫 마병, 방패 마병이 리의 반대편에 사뿐히 내려서며 리와 대치했다.

얼굴이 없으니 저들의 상태가 어떤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훗, 한심하구만.”


팔짱을 낀 채 리를 내려다보는 마경.

고개를 돌려 성당 안을 바라봤다.

순간 그의 눈이 회색 덮개로 덥혔다.


X레이 화면처럼 변한 그의 시야에 성당 안이 환하게 들여다보였다.

그 속에서 자줏빛 섬광이 번쩍거리는 게 보였다.


“저기 있군. 자, 서둘러라. 내가 ‘천계의 저항’을 막을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아.”


마경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방패 마병이 리를 향해 돌진했다.

순간 사람 몸통만 했던 방패가 점점 커지더니 방패 마병의 모습을 완전히 가렸다.

동시에 장검 마병과 낫 마병도 연습이라도 한 듯 방패 뒤로 모습을 감췄다.


“진파(震派)!”


그들을 보고 얼른 한쪽 무릎을 굽히며 바닥에 손을 짚는 리.

바닥이 꿀렁하더니 땅바닥이 물결처럼 일어나며 방패 마병을 향해 퍼져나갔다.


일어선 땅바닥과 방패가 충돌하려는 찰나, 갑자기 방패가 빠르게 회전하며 방패 앞으로 푸른 검기가 모여들었다.

드릴처럼 변한 검기는 다가오는 흙벽을 차례차례 꿰뚫고 나왔다.

찢긴 흙 조각이 사방으로 어지럽게 튀었다.


“중옥(重獄)!”


방패 마병이 진파를 깨뜨리며 돌진하자, 얼른 양발을 벌리고 선 채 두 주먹을 가슴 앞에서 맞부딪히는 리.


순간 바닥이 진흙처럼 부드러워지더니, 방패 마병의 발이 땅 속으로 조금씩 끌려들어 갔다.

그러면서 방패의 돌진 속도도 같이 줄었다.


“리! 위쪽!”


그때, 위를 보며 고함을 지르는 비토.

리도 고개를 드니, 장검 마병이 또다시 하늘로 뛰어올라 긴 장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있었다.


‘낫 마병은?’


순간 싸늘한 기분에 뒤를 돌아보는 리.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낫 마병이 뒤쪽으로 이동해 리에게 낫을 휘둘렀다.

이번엔 둘로 분리된 낫이 어느 쪽으로도 피할 수 없게 양방향에서 동시에 날아들었다.


“젠장!”


정면에는 드릴 같은 방패가,

위로는 화염을 뿜어내는 장검이,

좌우에서는 반달 같은 낫이 동시에 공격하는 상황.

중력구로 막기엔 타이밍을 이미 놓쳤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그때, 장검 마병이 검을 내리그었다.

검 날을 타고 나온 화염이 독수리의 형상으로 변해 리를 향해 돌진했다.


‘뇌룡승천(雷龍承天)!’


순간, 리의 귓가에서 작은 속삭임이 들렸다.

동시에 ‘4가지 힘에 관하여’에서 보았던 한 장면이 눈앞을 스쳤다.


본능적으로 오른팔을 하늘로 치켜드는 리.

오른손의 중지와 약지만을 구부린 채 주문을 외웠다.


“뇌룡승천!”


그러자 굵직한 번개 덩어리가 리를 감싸며 회오리처럼 일어나 위로 솟아올랐다.

그 모습이 꼭 커다란 용처럼 보였다.


“크아아악!”


번개에 낫이 직접 닿은 마병이 번개에 감전되어 미친 듯이 몸을 떨었다.


동시에 위로 올라간 뇌룡은 아가리를 벌려 장검 마병의 화염을 집어삼키더니,

곧장 마병에게 달려들어 그의 어깨를 덥석 깨물었다.


“크아아아악!”


장검 마병의 눈, 코, 귀, 입 등, 온갖 구멍에서 미세한 번개들이 마치 나무의 잔가지가 뻗듯 쏟아져 나왔다.


뇌룡의 모습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리.

얼른 고개를 돌려 대성당 입구를 바라봤다.

그곳엔 대사제와 성당 안 무리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


비토의 외침에 고개를 돌리는 리.

중옥 결계가 풀리자, 방패 마병이 드릴 같은 검기를 앞세워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토류장창(土流長槍)’


그때, 또다시 귓가에서 속삭임이 들렸다.


‘전음(傳音)!’


전음이 들리자마자 이번엔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치는 리.


“토류장창!”


그러자 ‘쿵’ 소리와 함께 바닥이 출렁하더니 방패 마병을 튕겨 올랐다.

동시에 뾰족한 흙기둥이 바닥을 찢고 튀어나와 마병의 몸을 그대로 관통했다.


“우워어어억!”


몸을 관통한 흙기둥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마병의 몸속에서 수백 개의 잔 기둥으로 한 번 더 갈라졌다.

순식간에 마병의 몸이 뾰족한 기둥에 뚫려 벌집이 되어버렸다.

기둥을 타고 마병의 검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일어서는 리.

감전되어 검게 타버린 낫 마병과 갑옷과 검마저 번개에 녹아버린 장검 마병을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대성당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자신을 바라보는 대사제와 눈이 마주쳤다.


“전음이었어. 분명, 대사제의 전음.”


대사제를 보며 인상을 쓰는 리.


그가 어떻게 이런 기술을 알지? 대사제도 그 책을 본 건가? 대사제도 이런 능력을 훈련했었나?


“이야, 리, 너 제법인데. 저 ‘번개 용’은 꽤나 근사해. 하하하”


어느새 스카프를 빠져나온 비토가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뇌룡을 가리키며 웃었다.

뇌룡만 있으면 뭐든 이길 수 있을 거라 자신한 모양이었다.

고개를 돌려 뇌룡을 바라보는 리.

샛노란 뇌룡이 온몸에서 번개를 지직거리며 포효했다.


“자, 저자도 마저 없애...”


그때, 긴 프로펠러 같은 게 곡선을 그리며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더니 뇌룡의 목을 그대로 설컹 잘라냈다.

‘크아아’ 뇌룡이 비명을 지르자, 비토가 얼른 다시 스카프 속으로 숨었다.


그러다 다시 곡선을 그리며 되돌아가, 마경의 오른손에 ‘착’ 안겼다.

그의 거대한 화검(火劍)이었다.


“쯧, 귀찮게 됐군.”


이번엔 왼손 주먹을 꽉 움켜쥐는 마경.

‘팅!’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나더니 모래가루 같은 게 그의 주먹에서 흘러내렸다.


동시에 광장 전체를 뒤덮고 있던 돔 형태의 투명한 막 같은 게, 비누거품 터지듯 펑 터져 사라졌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있는 줄도 몰랐던 막이었다.


“천계의 저항 따위, 이젠 상관없겠지.”


순간, 갑자기 공간이 꿀렁거리더니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마병들에게 들러붙었다.

슬라임처럼 늘어나 마병들의 몸을 점점 감싸더니, 이내 온몸을 완전히 뒤덮었다.

공간에 흡수된 마병들은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크워어어엉!’


멀리 아모툼이 울부짖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그에게도 천계의 저항이 들러붙는지, 이리저리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리! 또 천계의 저항이야!”


스카프 속에서 눈만 빼꼼히 내민 채 부르르 몸을 비토.

아니나 다를까 리 주변의 공간도 꿀렁꿀렁 일렁이더니 리에게 촉수를 뻗쳐오기 시작했다.


팔에 들러붙는 공간을 뿌리치며 인상을 쓰는 리.

그런데 신기하게도 리의 몸 여기저기를 훑던 공간이, 마치 리는 대상이 아니라는 듯 ‘스윽’ 뒤로 물러났다.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리.


“훗, 재미있군. 재미있어.”


그 모습을 보며 씨익 미소 짓는 마경.

검을 치켜들더니 그에게 들러붙는 공간을 ‘설컹’ 잘라내 버렸다.

허공이 그의 화염에 잘려 불타올랐다.


동시에 등 뒤의 다른 장검을 뽑아 X자로 내리긋는 마경.

검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이 합쳐지더니, 사자 형상으로 변해 리에게 달려들었다.


‘또 옵니다! 정신 차려요!’


다시 대사제의 속삭임이 들렸다.

얼른 자세를 잡고 화염 사자를 향해 손을 뻗는 리.

공중에서 천압으로 눌러버릴 생각이었다.


“리! 오른쪽!”


그때, 뇌룡의 목을 잘랐던 마경의 화검이 또다시 커다랗게 곡선을 그리며 리에게 빠른 속도로 날아들고 있었다.


“젠장! 천압...”

‘아니! 늦어요! 흑동(黑洞:black hole)!’


대사제의 전음을 듣자마자 파피루스의 한 장면이 또 눈앞을 스쳤다.

얼른 팔을 거둬드린 리는 가슴 앞에서 손바닥을 모았다.


“흑동!”


그러면서 양손을 동그랗게 모으자, 손바닥 사이에서 반짝이는 검은색 구슬 같은 게 만들어졌다.

동시에 리를 둘러싼 공간이 오목렌즈로 본 것처럼 확 일그러졌다.


어느새 리의 바로 옆까지 날아온 화검은, 리가 일그러뜨린 공간을 타고 빙글 돌더니, 그대로 화염 사자에게로 날아갔다.


‘크아아아!’


화검과 충돌하며 괴성을 지르는 화염 사자. 펑 터지며 공중에 불꽃을 뿌렸다.


“됐어!”


짧은 팔을 뻗으며 탄성을 지르는 비토.


‘너무 작아!’


순간, 강력한 충격파가 리의 몸에 그대로 전해졌다.

어느새 주홍빛으로 에테르를 끌어올린 마경이 리의 코앞까지 다가와,

검의 넓은 면으로 리가 뒤튼 공간 자체를 후려친 것이었다.


“크흑!”


충격으로 인해 뒤로 쭈욱 밀려나는 리.

뒷걸음질 치며 자세가 흐트러져 결국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동시에 흑동이 사라지며 리를 둘러싼 공간이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어설프구만. 어설퍼.”


마경이 위로 손을 치켜들며 말했다.

그러자 화염 사자를 터뜨리고 멀리까지 날아갔던 화검이 그의 손에 ‘착’ 안겼다.


‘빠빠빰, 빠빠바빰, 빠빠빰!’


그때 대성당 쪽에서 길고 둔중한 호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젊은 사제가 그제서야 ‘비상 구조 신호’를 찾은 모양이었다.


“흠, 더 귀찮아지기 전에 끝내자고.”


다시 쌍검을 제비 꼬리처럼 양손에 펼쳐 든 채, 리에게 달려드는 마경.

리도 얼른 일어나 자세를 고쳐잡고는, 토류장창을 쏘기 위해 한쪽 발을 뒤로 뺐다.


‘기다려요!’


그때, 대사제의 전음이 또다시 들렸다.

‘응?’ 순간 멈칫한 리는, 잘 못 들었다고 생각하고 토류장창의 자세를 마저 취했다.


‘기다리라고!’


대사제의 호통에 다시 멈칫하는 리.

순간 리를 향해 달려오던 마경은 공중으로 붕 뛰어올랐다.

그의 화검 끝으로 채찍 같은 화염이 쭉 뻗어 나와 있었다.


‘지금! 뇌우참정(雷雨慘精)!’


그때, 리의 귓가에 대사제의 전음이 울려 퍼졌다.

쌍검을 치켜든 마경의 머리 위로, 잘린 ‘뇌룡의 몸뚱이’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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