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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 일자의 눈물

by 무딘

‘지금! 뇌우참정(雷雨慘精)!’


대사제의 전음이 들리자마자, 고개를 들어 마경을 바라보는 리.

그의 머리 위로 뇌룡의 몸뚱이가 둥둥 떠 있는 게 보였다.

단박에 대사제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얼른 검지와 중지를 모으는 리.

손가락 끝에 번개가 지직거리자 바로 바닥을 향해 내리그었다.


“뇌우참정!”


리의 외침과 동시에 ‘쩌저적’ 소리를 내며 뇌룡의 몸뚱이가 분해되더니,

크고 날카로운 번개 수백 발이 마경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마치 소나기처럼.


“응?”


공중 공격을 눈치채고 얼른 검을 위로 치켜드는 마경.

하지만 번개를 막기엔 이미 늦은 상태였다.

엄청난 숫자의 번개가 순식간에 쏟아져 마경의 몸을 뒤덮었다.


‘뇌무폭발(雷舞爆發)!’


그때 한번 더 이어지는 대사제의 전음.


“뇌무폭발!”


대사제를 따라 주문을 외우며, 주먹을 움켜줬다 펴는 리.

그러자 마경을 둘러싼 번개들이 순식간에 서로를 향해 튕기더니 미친 듯이 폭발했다.


‘쩌저저정!’


천둥 치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빛을 내뿜는 뇌운.

그 강렬한 불빛에 리를 포함한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쏴아아아아.’


잠시 뒤, 갑자기 바닥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위를 바라보는 리.

뇌운이 사라진 자리에 아스라이 안개가 끼어있었다.

이리저리 둘러봤지만, 마경의 모습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이겼다!”


멀리서 꼬마가 주먹을 불끈 쥐며 펄쩍펄쩍 뛰었다.

대사제도 휘청하더니, 성당 벽을 짚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겼어! 리! 이겼다고!”


리의 스카프에서 빠져나온 비토가 리의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며 축포를 터뜨렸다.


“휴우우.”


양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 길게 한숨을 내쉬는 리.

‘슈우욱’ 등 뒤의 태양이 사라지며 검은 머리의 리로 되돌아왔다.


‘수고했어요, 이방인. 아니 사제여.’


대사제의 전음을 듣고 다시 고개를 드는 리.

대사제를 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동시에 궁금증이 폭풍처럼 몰아닥쳤다.

대사제는 누구인지, 그는 왜 이곳 천계에 있는지, 그는 어떻게 그 많은 기술들을 알고 있는지.


상체를 곧추세운 리는, 종종걸음으로 대사제를 향해 뛰어갔다.

어느새 오발탄에 대한 궁금증은 온데간데없고,

대사제에게 물어볼 질문들만 어지럽게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다.


리, 자신의 정체는 무엇인지,

어떻게 이런 기술들을 쓸 수 있는 건지,

자신의 팔에 잠긴 자물쇠는 또 무엇인지,

이게 다 풀리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건지,

대사제라면 당장이라도 답변해 줄 것만 같았다.


“리, 이제 오발탄을 찾자고.”

“오발탄... 그래.”


비토의 조언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리.

대성당 입구의 계단을 두 계단씩 성큼성큼 올랐다.


순간, 갑자기 등 뒤에서 불길한 에테르가 느껴졌다.


깜짝 놀라, 얼른 뒤를 돌아보는 리.

반달 모양의 화염이 리의 머리 위로 휙 스쳐 지나가더니, 그대로 대사제를 덮쳤다.


“대사제님!”


아이들의 비명과 동시에, ‘펑!’ 거대한 화염이 대사제를 덮쳤다.

대사제는 그 짧은 순간 투명한 방패 같은 걸 소환했지만, 충격에 밀려 그대로 성당 벽에 부딪혔다.

‘우드득’ 뼈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악!”


바닥에 쓰러진 채, 어깨를 부여잡고 신음하는 대사제.


“쫑알쫑알 참 말이 많아. 이젠 좀 조용하겠지.”


얼른 화염이 날아온 쪽을 돌아보는 리.

죽은 줄 알았던 마경이 장검을 어깨 위에 걸치고 있었다.

죽기는커녕 번개의 그을린 흔적 하나 없이 너무도 말끔했다.


‘방해꾼을 해치웠으니, 제대로 싸워볼까.’


마경이 대사제와 똑같이 전음으로 리에게 속삭였다.


“너, 이 자식!”


에테르를 끌어올리며 마경을 향해 팔을 뻗는 리.

등 뒤로 다시 작은 태양이 생기더니, 리의 다섯 손끝으로 번개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섬뢰!”


순간 리의 손가락 끝에서 뻗어 나온 번개들이 일제히 마경을 향해 뿜어져 나갔다.

에테르를 급격히 끌어올린 때문인지, 크기도 밝기도 이전보다 훨씬 강렬했다.


“훗. 머리가 나쁘구만.”


다시 장검을 제비 꼬리처럼 양손에 든 채, ‘쿵쿵쿵’ 섬뢰를 향해 곧장 달려드는 마경.


“중옥!”


섬뢰를 쏘자마자 리는 주먹을 가슴 앞에서 맞부딪혀 중옥을 소환했다.

마경의 발을 묶어 섬뢰를 적중시킬 생각이었다.


“죽어라!”


10가닥의 번개 줄기가 화살처럼 한데 모여 마경의 가슴을 관통하려는 순간, 마경이 감쪽같이 모습을 감췄다.

타깃을 잃은 번개 줄기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응?”


사라진 마경을 찾아 좌우를 두리번거리다, 얼른 위를 바라보는 리.

그 순간, ‘푸확’ 뭔가가 리의 가슴팍을 뚫고 나왔다.


“커헉.”


눈이 충혈되며 입에서 피를 토해내는 리.

가슴 쪽을 내려다보자 투명했던 뭔가가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화검이었다.

마경이 줄곧 사용했던.


화검 뿐 아니라, 이내 화검으로 찌르기를 한 마경의 모습도 차츰 드러났다.

그는 화검을 리의 가슴에 찔러 넣은 채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뇌룡승천!”


부들거리는 손으로 마경의 검날을 힘겹게 붙잡은 리가 사력을 다해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뇌룡이 리의 몸을 휘감으며 바닥에서부터 솟아올랐다.


뇌룡의 이빨이 화검에 닿으려는 순간, 마경이 또다시 모습을 감췄다.

아니, 정확히는 순간적으로 투명해졌다.

뇌룡이 허공을 훑고 지나가자, 그제야 마경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넌 내 몸에 손가락 하나 댈 수 없어.”


씩, 이빨을 보이며 웃는 마경.

그러다 갑자기 화검을 빠르게 위로 치켜들었다.

꼬치처럼 화검에 꽂혀있던 리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동시에 가슴 앞에 화검을 X자로 모은 채, 에테르를 끌어모으는 마경.


“디엔테(diente)!”


화검을 X자로 엇갈려 내리그으며 주문을 외우자,

마경의 곰 모양 흉갑이 번쩍 빛나더니, 주홍빛 에테르가 레이저처럼 뿜어져 나갔다.


순간 곰의 머리로 변한 마경의 에테르는, 불길이 일렁이는 이빨로 리를 물어뜯었다.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사방팔방에서.


‘우두드득’


주홍빛 에테르에 휘감긴 리의 몸에서, 뼈 으스러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잠시동안 그렇게 뜯기다,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리.

바닥에 퉁 튕기더니 ‘데구루루’ 굴러 마경의 발 밑에 멈췄다.


리의 허벅지에 한쪽 다리를 올린 채, 가만히 리를 내려다보는 마경.

어느새 리는 에테르가 사라져 검은 머리로 되돌아와 있었다.


“이런 게 뭐라고. 쳇. 마제님도.”


화검 손잡이를 거꾸로 잡더니, 지팡이를 짚듯 리를 향해 내리치는 마경.

화검이 리의 복부를 그대로 관통했다.


“커헉!”


다시 한번 울컥 피를 쏟아내는 리.

리의 손끝이 고통으로 ‘부르르르’ 떨렸다.


리에게서 검을 뽑아낸 마제는 흥미를 잃었다는 듯,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그러더니 대성당을 향해 사선으로 화검을 내리그었다.


화검의 검기에 대성당의 지붕이 대각선으로 잘리더니, ‘스르르륵’ 한쪽으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쿵!’

“끼야악”


아이들이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비명을 질렀고, 브로커가 달려와 쓰러진 대사제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의 머리 위로 하얀 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가져가기 좋게도 해놨군.”


잘려나간 지붕 안쪽으로 ‘일자의 눈물’이 담긴 유리 상자가 보였다.

마경이 손을 뻗더니 자신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 오므렸다.

그러자 일자의 석상 앞에 두둥실 떠 있던 유리상자가 마경에게로 훅 끌려왔다.


“대사제님! 괜찮으세요!”


뒤늦게 성당 입구로 되돌아온 젊은 사제가, 쓰러진 대사제에게로 달려갔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미소를 지어 보이며 브로커를 뒤로 물리는 대사제.

젊은 사제가 얼른 대사제를 받아 안아, 성당 벽에 기대게 했다.


“천사장은? 천사장은 어떻게 됐는가?”

“비상 나팔을 울리긴 했는데, 이상하게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그럼 천계병들이라도. 천계병들은 왜...”

“그게 저도 잘...”


당장이라도 울듯 얼굴을 찡그리는 젊은 사제.

그때 그의 머리 위로 ‘일자의 눈물’이 담긴 유리상자가 슈웅 날아가는 게 보였다.

상자는 마경을 향해 곧장 날아가고 있었다.


“오, 일자시여!”


애타는 눈빛으로 ‘일자의 눈물’을 바라보는 대사제.

일자의 눈물은 이전보다 더 빠르게 분해됐다 합쳐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불빛을 번쩍거렸는데, 그게 마치 SOS신호를 보내는 것만 같았다.


시선을 돌려 쓰러진 리를 바라보는 대사제.

맥없이 대자로 드러누운 리에게서는 더 이상 어떤 에테르도 느껴지지 않았다.

리의 곁으로 여기저기 쓰러진 영혼들과 찢겨나간 몸뚱이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멀리 괴수의 울부짖음이 또다시 메아리치고 있었다.


대사제는 얼른 유리상자로 시선을 옮겼다.

유리상자는 이제 마경의 곁에 둥둥 떠 있었다.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옮기며 그가 상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걸 차지하려 이 많은 영혼들을 괴롭혔단 말인가. 그것도 신성한 천계에서.”


마경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대사제.

결심이 선 듯 이를 깨물었다.


“나를 좀 잡아주게.”


젊은 사제가 얼른 대사제의 몸을 붙잡아 안았다.

부러지지 않은 반대편 팔을 힘겹게 옷 속으로 넣더니, 목걸이 하나를 끄집어냈다.

목걸이 끝에는 정육면체의 작은 유리상자가 매달려 있었다.


“대사제님! 그것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대사제를 쳐다보는 젊은 사제.


“아모툼! 돌아가자!”


상자에서 시선을 거둔 마경이 멀리 아모툼을 향해 소리쳤다.

낮고 굵직한 그의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아모툼이 한창 난동을 부리다 멈추더니,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계르디달타 무체사하카. 계르디달타 무체사하카.’


그때, 대사제의 전음이 온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응?”


검은 포탈을 향해 날아가다 말고 다시 성당 입구를 바라보는 마경.

성당 벽에 기대앉은 대사제가 뭐라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흥’ 콧방귀를 끼고 돌아서려는데, 자신을 따라오던 유리 상자가 허공에 박힌 듯, 멈춰 선 게 보였다.

다시 손짓을 했지만 끌려오지 않고 제자리에서 ‘부르르르’ 떨기만 했다.


“이런, 또 무슨 수작이야!”


인상을 쓰며 화검을 꺼내려 어깨 뒤로 손을 넘기는 마경.


“월운신이시여, 이것이 제발 당신의 뜻이기를! 계르디달타 무체사하카. 계르디달타 무체사하카!”


대사제가 주문을 반복하며 손에 힘을 주자, 쥐고 있던 작은 유리 상자가 ‘팅’ 소리를 내며 깨졌다.

동시에 ‘일자의 눈물’을 둘러싸고 있던 유리 상자도 ‘채챙’하며 터져 나갔다.

‘일자의 눈물‘을 감싸고 있던 봉인을 대사제가 푼 것이었다.


화검을 꺼낸 마경은 대사제를 향해 검을 내리그었다.

그러자 반달 모양의 화염이 대사제 무리를 향해 곧장 날아갔다.

아까보다 훨씬 크고 강렬한 화염이었다.


“계르디달타, 무체사하카!“


주먹을 움켜쥔 채 더 크게 주문을 외우는 대사제. 젊은 사제가 아이들을 감싸 안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때, 쓰러졌던 리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곤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했다.


“게르디달타 무체사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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