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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 대절멸의 전설

by 무딘

“으아아아악!”


당장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왼쪽 팔뚝을 붙잡은 채, 리가 비명을 질렀다.

붙잡은 팔을 위로 치켜들며 뒷걸음질 치던 리는, 결국 들고 있던 화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화검!”


순간, 마경의 눈이 번쩍거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마경은 후다닥 달려가 화검을 집어 들더니, 미끄러지듯 리의 뒤쪽으로 움직였다.


“죽어라! 너야말로.”


바로 리의 목을 향해 화검을 긋는 마경.


‘쩡!’


리의 주황 구체가 어느새 다가와, 마경의 화검을 막았다.

그러자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화검을 놔버린 마경이 얼른 자세를 숙이더니 리의 등에 양손을 가져다 댔다.


“이럽씨온(erupcion)!”


그러자 마경의 손끝에서 ‘쿠와앙!’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며 주홍빛의 거대한 화염이 대포처럼 쭈욱 뻗어나갔다.


“오! 일자시여!”


그 모습을 보던 대사제가 양손을 움켜쥐며 울부짖었다.


“이럽씨온, 이럽씨온, 이럽씨온!”


마지막 한 줌마저 태워버리겠다는 듯, 마경이 연이어 화염을 쏘아댔다.

엄청난 크기의 화염이 리를 쓸고 지나간 자리, 회색 먼지가 하늘 가득 피어올랐다.


‘하아, 하아, 하아.”


팔을 뻗은 채 숨을 몰아쉬는 마경.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팔을 휘휘 저어 연기를 걷어냈다.

역시나, 자신의 앞에 있었던 리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휴우우, 네깟 놈이, 휴우우, 감히 이 마경님을.”


씨익 웃음을 짓는 마경.

그때, ‘톡’ 뭔가가 마경의 등에 가볍게 닿았다.


“공(空)!”


화들짝 놀라 앞으로 튀어 나가며 뒤를 돌아보는 마경. 리가 하얀 막으로 뒤덮인 손을 자신을 향해 뻗고 있었다.

그의 손이 자신에 등에 닿은 게 틀림없었다.


리의 왼쪽 팔목은 여전히 부풀어 오른 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검붉은 액체가 사라진 것이, 순간적으로 폭주를 억제한 모양이었다.


“너... 이 자식. 어, 어떻게, 이럽씨온을... 으, 으으악!”


그때, 갑자기 손끝에서 타는듯한 고통이 전해졌다.

마경이 얼른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자, 손가락 끝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불길에 타오르는 것처럼,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으헉.”


뒷걸음질 치며 휘청거리던 마경은 갑자기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래를 보자 이번엔 자신의 두 발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혈관까지 타오르는 듯,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피눈물을 흘리며 리를 노려보는 마경.


“너... 크으윽... 이대로... 내가 질 것... 크헉... 같으냐.”


고통에 몸을 부르르 떠는 마경.


“할 수 있다면, 너도 해봐.”


리가 마무리 짓겠다는 듯, 천천히 마경에게로 다가갔다.


그때, 온전한 자신의 오른손을 치켜드는 마경. 그의 손끝에서 화염이 ‘화르륵’ 일었다.

이어 자신의 두 허벅지와 오른쪽 어깨를 가차 없이 베어냈다.

잘린 팔다리가 데구루루 바닥을 굴렀다.


“크흐헉, 쿠... 쿠... 쿠엔타(cuenta)!”


마경이 이를 깨문 채 힘겹게 주문을 외우자, 그의 몸이 순간 작은 은빛 구슬로 변했다.


공중에 떠오른 채 가볍게 원을 그리며 한 바퀴 돈 구슬은, 하늘의 검은 포털 속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구슬이 들어가자마자 아가리를 벌리고 있던 포털이 ‘슉’ 사라졌다.


“이, 이긴 건가...”


멀리서 리를 보고 있던 젊은 사제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아이들도 조심스레 고개를 들며 상황을 살폈다.

폭발 흔적으로 가득한 광장 한가운데, 리가 홀로 서 있었다.


“이겼다, 이겼어. 진짜 이겼어!”


양팔을 번쩍 치켜들며 좋아라 하는 꼬마.

여자아이도 주변을 둘러보더니 그제야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뭉치와 브로커도 ‘휴우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으아아아악!”


그때, 또다시 리가 왼쪽 팔을 치켜들며 비명을 질렀다.

폭주가 다시 시작된 것이었다.


그의 왼쪽 팔목에서 예의 검붉은 액체가 주르륵 흘러나와 공중에 퍼졌는데,

이번엔 아까보다 훨씬 커져서 마치 괴물의 형상처럼 보였다.

검붉은 액체는 자신의 머리카락과 몸을 반복해서 쥐어뜯었다.


“빠아암 빰, 빠아, 빠아아암 빰!”


그때, ‘천사장’의 등장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멀리서 메아리치며 들려왔다.


“아, 왜 이제야.”


인상을 쓰며 하늘을 쳐다보는 젊은 사제.


“이대로라면, 저 친구가 위험해!”


걱정스레 리를 쳐다보는 대사제.

‘으아아아악!’ 리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몸을 덜덜 떨며 비명을 질렀다.

허공에 뜬 검은 형체도 마치 리처럼 고통받는 듯 몸부림을 쳤다.


“어, 어떡하죠? 천사장께서 도착하면 분명 저 친구부터 공격할 것 같은데.”


서로를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대사제와 젊은 사제.


“나라도 가서... 크윽.”


몸을 일으키려다 부러진 팔 때문에 다시 고통스러워하는 대사제.

인상을 쓰며 리 쪽을 바라봤다.


그 순간, 마을 쪽에서 하얀 가운을 걸친 영혼 하나가 엄청난 속도로 튀어나오더니, 잽싸게 리의 곁에 달라붙었다.

그가 엎드린 리의 등에 뭔가를 붙이자, 순식간에 검은 액체가 리의 팔 속으로 ‘슈욱!’ 빨려 들어갔다.


“웬 놈이냐!”


그때, 굵직한 목소리가 천계의 하늘에 울려 퍼졌다.

제3천사장이 드디어 나타난 것이었다.

대성당의 지붕 위에 나타난 그는 망설임도 없이 곧장 리에게 창을 던졌다.


천사장의 창이 회오리치며 날아오는 찰나, 리의 곁에 갑자기 붉은색 포털이 열렸다.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는 리를 빠르게 둘러업더니, 포털 속으로 냅다 몸을 던졌다.


천사장의 창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남자의 등 쪽 가운을 찢었다.

잘린 가운 안으로 초록색 배낭이 얼핏 보였다.


바닥에 박힌 채 ‘티이잉!’ 흔들리는 천사장의 새하얀 창.

‘슈우욱’ 소리와 함께 빨간 포탈도 모습을 감췄다.


‘쏴아아아아아.’


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다시 고요해진 광장.


그제야 광장의 분수 소리가 요란스레 들리기 시작했다.



*****



“에레히! 이거 안 놔!”


심판국으로 이어지는 ‘용의 길’ 옆 광장.

평지보다 조금 높은 나무 단상 위에서, 난쟁이가 자신의 멱살을 스스로 잡아당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앞엔 짙은 회색 한복에 파란색 도포를 두른 중간계 감찰사가, 뒷짐을 진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나가던 영혼들이 무슨 싸움이라도 났나 싶어, 미어캣처럼 고개를 빼꼼히 내민 채 그들을 바라봤다.


“어이, 어이, 왜 그래!”


영혼들의 행렬 속에서 막 빠져나온 흰머리 감찰사가 단상 쪽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아니, 자꾸 여기서 심판국으로 가는 영혼들을 후리고 있길래, 좀 적당히 하라고, 안 그러면 잡아간다고 한마디 했더니 이 난리네.”

“후리다니! 후리다니! 이 힘만 쓸 줄 아는 상스러운 것들. 내가 친히 명천계에서 얻은 ‘고오급’ 정보를 땡전 한 푼 안 받고 나눠주고 있는데, 고맙다고는 못 할망정, 잡아가? 잡아가?”


난쟁이가 자기 멱살을 잡은 채 흔들어 대자, 씩 웃으며 젊은 감찰사를 뒤로 물리는 흰머리 감찰사.


“그으래? 나는 확 구미가 당기는 걸. 자해공갈은 적당히 하시고, 내 여기서 계속 떠들게 해 줄 테니 그 ‘고오급’ 정보란 게 뭔지 들어나 봅시다.”


두 감찰사의 얼굴을 한 번씩 번갈아 째려보는 난쟁이.

말이 통하는 사람이 왔다 싶었는지, ‘에헴’ 목을 가다듬으며 멱살 잡은 손을 풀었다.

그리곤 흐트러진 은빛 두건을 고쳐 썼다.


“내가 성격이 좋은 난쟁인 걸 다행으로 알아.”


젊은 감찰사가 인상을 쓰며 입을 비죽거렸다.

그 옆에서 그의 어깨를 토닥이는 흰머리 감찰사.


“얼른, 얘기해줘 봐요. 그 ‘고오급’ 정보라는 거.”


옷매무새를 가다듬다 말고 흰머리 감찰사를 올려다보는 난쟁이.

그러다 능글맞게 ‘씨익’ 웃어 보였다.


“바로 엊그제 명천계서 엄청난 싸움이 있었거든. 다들 쉬쉬 하지만 비밀이란 게 어디 오래가나. 내 명천계에 수리하러 갔던 석공에게서 직접 들었지. 그 친구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그러더라고.”


흥미롭다는 듯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이는 흰머리 감찰사.


“그런데 이 싸움이 진짜 이상한 게 뭔 줄 알아? 일자께서 친히 머무르신다는 명천계에, 무려 암형계의 마물이, 그것도 무시무시한 괴수까지 데리고 등장했는데, 글쎄 ‘천계군’이 안 나타나더라는 거야. 조무래기 정찰병 몇몇 말고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라는 거지.”


턱에 가위 모양의 손을 가져다 댄 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모로 기울이는 난쟁이.

어느새 그의 이야기를 듣고 지나가던 영혼들이 하나둘 단상 주위로 모여들었다.


“마물들이 천계를 한참 헤집어 놓는 동안, 도대체 천계 수비군은 어디 갔을까? 그 강하다는 ‘삼 천사장’들은 다 어디 가고? 심지어 그날은 뭐가 문제인지 ‘천계의 저항’도 제대로 작동 안 하는 거 같더래. 왜일까? 왜일까? 도대체, 왜일까”


아이들이 앞에서 공연이라도 하듯,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난쟁이.


“이유가 무엇이냐! 짜란! ‘천계 대절멸(大絶滅)!’. 바로, ‘천계 대절멸’이 가까워졌다는 걸 말하는 거라고!”


난쟁이가 주먹을 앞으로 내 뻗으며 ‘천계 대절멸’을 외치자, 모여든 영혼들이 서로를 보며 수군거렸다.

옅은 미소를 띤 채 그의 이야기를 가볍게 들어 넘기던 흰머리 감찰사도,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천계 대절멸? 그게 뭔데?”

“하여간 무식하긴. 쯧쯧쯧. 운동만 하지 말고 이참에 역사 지식도 좀 늘려두라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감찰사를 향해 턱을 주욱 내미는 난쟁이.

젊은 감찰사가 빈정 상하는 듯 연신 입술을 비죽거렸다.


“‘금운신’ 계열 선사들이 쓰셨다는 고서(古書)에 따르면 말야, 천계에는 지금까지 무려 3번의 ‘대절멸’이 있었다고. 쓸데없는 영혼들로 가득 찬 천계를 말끔히 씻어내는 거지. 한마디로 싹 소멸시키는 거라고.”


하늘에 뜬 천계성을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난쟁이.


“대절멸이 있기 전엔 예외 없이 전조증상처럼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사고가 일어났었데. 천계에 괴수가 등장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이번처럼 수비대가 없어서 많은 영혼이 소멸되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었다는 거지.”

“아하, 그러니 이번 것도 대절멸이 일어날 전조다?”

“그렇지! 머리가 아주 돌덩이는 아닌가 보네.”


그때, 판결국 안으로 영혼들이 들어갔는지, 늘어서 있던 영혼들이 앞으로 주르륵 움직였다.


“자자, 앞으로 이동하세요! 이동!”


멀리 대열 중간에서 빨간 경광봉을 치켜든 관리자가, 경광등을 앞뒤로 흔들며 영혼들을 재촉했다.


“그런데?”

“응? 그런데라니?”

“아니, 그런데 그 이야기가 지금 이 영혼들한테 무슨 도움이 되냐고.”

“하아, 진짜, 한번, 두 번, 세 번 다시 봐도 무식하네. 그러니까 천계에 목 멜 필요가 없다고. 명천계 가겠다고 울고불고 난리 칠 필요 없다니까. 올라가 봐야, 대절멸을 만나 언제 목숨이 날아갈지 모른데도?”

“그래? 그럼, 뭘 해야 되는데?”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던 젊은 감찰사가, 실눈을 뜨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하아, 이 인간 생긴 거부터 기분 나빠. 하지만 나는 너그러운 난쟁이니까...”


단상 한쪽으로 가더니 바구니 같은 걸 집어 드는 난쟁이. 안에 조그만 파피루스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난쟁이는 파피루스를 하나 집어 치켜들었다.


“자, 이거! 이걸 읽으면 돼! 천계에 가지 않아도 행복하게 영생할 수 있는 법이 바로 여기 있다고! 읽어봐! 어서어서!”


난쟁이가 지켜보던 영혼들에게 파피루스를 내밀며 읽어보라고 재촉했다.

쪼그려 앉은 채 파피루스를 하나 집어 든 흰머리 감찰사는, 파피루스의 내용을 쭈르륵 읽더니 ‘풋’하고 자기도 모르게 콧방귀를 뀌었다.


“이봐, 가세. 잘 들었네, ‘고오급’ 정보. 포교 열심히 하시고.”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선 흰머리 감찰사는, 젊은 감찰사의 팔을 당기며 영혼들의 행렬 쪽으로 돌아섰다.

아쉬움이 남는 듯 젊은 감찰사가 난쟁이를 째려보다가 마지못해 돌아섰다.


“저대로 놔둬도 괜찮을까요?”

“괜찮아. 요새 금운신 계열 석공들이 보조가 없어서 엄청 애를 먹는다고 하더라고. 저렇게라도 속여서 하급 일꾼들을 모집해야지.”

“아, 하급 일꾼이요.”

“그래, ‘대석공의 용광로’를 꺼지지 않고 돌리려면 하급 일꾼들이 엄청 필요해. 우리도 저들의 덕을 보고 있으니, 그냥 못 본 척하라고. 그나저나 ‘대석공님’이 몇 달째 연락이 안 된다던데, 그건 어떻게 됐나 몰라.”


영혼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

뒤에서 난쟁이가 파피루스를 치켜든 채, 여전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어? 저거?’


그때 젊은 감찰사가 영혼들을 신경질적으로 밀쳐내며 행렬 사이로 파고드는 한 사람을 가리켰다.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가죽 재킷에 검은 허리띠를 두른 복장, 환생 관리자였다.


“왜, 또 뭐?”

“저거, 오발탄 아니에요?”

“오발탄? 다른 팀 후배들한테 천 년 짜리 징계 때렸다는 그 개차반?”

“맞아요, 그 개차반.”


실눈을 뜬 채, 영혼들의 행렬을 살피는 흰머리 감찰사.

주먹을 치켜들며 영혼들을 위협하는 게, 왕싸가지 오발탄이 분명했다.


“하, 저 사이코패스, 한동안 안 보여서 좋았는데. 어디 가서 뒈지지도 않고 또 나타났구만. 에이 눈 버렸네.”


허공이 세면대인 양, 눈 씻는 시늉을 하는 흰머리 감찰사.


그러거나 말거나, 오발탄은 신경질적으로 영혼들을 밀쳐대며 성큼성큼 걸어 나가고 있었다.

오발탄에 떠밀린 영혼들이 말은 차마 못 하고 그를 째려보기만 했다.


오발탄의 머리 너머로 심판국의 높다란 건물이 보였다.

Y자로 나뉜 다른 끝에는 환생 관리국의 두꺼비가 보였다.


환생 관리국 건물 위로, 두터운 먹구름 한 덩어리가 적란운처럼 높이 솟아 있었다.


‘쩌저적!’


구름 속에서 마른번개가 번쩍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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