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아악, 촤아악’
‘끼룩, 끼룩’
파도 부서지는 소리에 천천히 눈을 뜨는 리.
눈앞으로 갈매기 서너 마리가 V자로 편대를 이루며 날아가고 있었다.
그들 너머로 드넓게 펼쳐진 옥빛 바다가 보였다.
떨어지는 건지, 떠오르는 건지 모를 태양이, 바다 위에 주홍빛 노을을 드리우고 있었다.
멀리 수평선 끝으로는, 길쭉한 뭔가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가 아치를 그리며 다시 바닷속으로 뛰어드는 게 흐릿하게 보였다.
“깨어났나?”
낯선 목소리에 얼른 옆을 돌아보는 리.
회색 로브를 입은 대머리 할아버지가 자신의 옆에 앉아있었다.
얼굴 가득한 주름에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이, 도인 혹은 노숙자를 연상시켰다.
“여긴 어디죠? 혹시 제가 죽었나요?”
리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그는 기다란 나무 벤치 위에 노인과 나란히 앉아있었는데, 그의 발밑으로 까마득한 절벽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건 네가 정하는 거다, 꼬마. 죽을지, 살지, 네가 될지, 네가 아닌 게 될지는.”
알 수 없는 대답에 물끄러미 노인을 바라보는 리.
처음 보는 얼굴, 낯선 목소리인데도 어딘가 모르게 포근했다.
“네 인생은 네가 정하는 거다, 꼬마. 명심하거라. 자, 그녀가 널 데리러 오는구나. 준비하거라.”
검지 손가락을 뻗어 바다를 가리키는 노인.
영문 모를 이야기에 콧잔등을 찌푸리며, 리가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평선을 넘나들던 희미한 물체가 리 쪽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수면 아래로 숨었다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때마다, 점점 더 그것의 모습이 또렷해졌다.
그것은 용이었다.
새파란 물로 만들어져 바다와 잘 구분되진 않았지만, 엄청난 크기의 용이 분명했다.
“뭐죠? 왠 용이...”
리가 있는 절벽 앞까지 다가온 용은, 폭탄이 터지듯 물 밖으로 훅 튀어나와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수천 개의 물방울이 리의 얼굴에 우수수 튀었다.
그 거대한 위용에 리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하늘 위, 절정에 올라선 용은 갑자기 아가리를 쫙 벌리더니, 방향을 바꿔 그대로 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입에 삼켜버리겠다는 듯 이빨을 번뜩이며.
‘우왁!’
깜짝 놀란 리가 두 팔로 얼굴을 가렸다.
*
“나온다!”
할머니가 리에게 붙은 부적을 떼자마자, 리의 몸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의 왼쪽 팔뚝에서 예의 검은 덩어리가 ‘스윽’ 삐져나왔다.
마치 아메바 같은 형상을 한 채.
“웜마, 나오요! 얼른 다시 붙이소!”
일권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소리치자, 할머니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리의 몸을 잡아당겨 천정을 바라보게 눕혔다.
행여 리의 발에 차일까, 얼른 유니가 침대로 다가와 캉캉이를 품에 안았다.
“게르디달타, 아난다 아메하바. 게르디달타 아난다 아메하바!”
미친 듯이 떨어대는 리의 몸 위로, 할머니가 두 팔을 내밀며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그녀의 몸이 파랗게 빛나더니, 그녀의 두 팔에서 반짝이는 푸른색 입자가 사방으로 훅 퍼져나갔다.
잠시 침대 위를 둥둥 떠다니던 입자들은, 서로 뭉치고 얽히며 알 수 없는 글자로 변하더니, 마치 눈송이처럼 리의 몸 위로 떨어져 내렸다.
흙바닥에 흡수되는 눈처럼 리의 몸으로 하나, 둘 흡수되자,
신기하게도 미친 듯 떨어대던 리의 몸이 차츰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덩치를 키워가던 검은 덩어리도 자물쇠 속으로 스르륵 빨려 들어갔다.
“오! 오오!”
이를 지켜보던 의원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감탄사를 뱉었다.
비토도 리의 머리 위에서 기쁨의 물개박수를 쳤다.
“흐음. 이제 좀 조용해졌구먼.”
내밀었던 팔을 거두며 호흡을 고르는 할머니.
침대 한편에 기대놓았던 지팡이를 집어 들더니, 갑자기 비토의 배를 쿡 찔렀다.
당황한 듯 얼른 리의 스카프 속으로 숨은 비토.
눈만 빼꼼히 내민 채 할머니를 째려봤다.
“오랜만이구나. 너도.”
모처럼 살짝 미소를 지은 할머니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무섭게 인상을 쓰더니 리의 침대에서 휙 몸을 돌렸다.
“겨울이 다시 오는구먼. 겨울이. 쯧쯧쯧쯧. 가세!”
의원과 유니를 잠시 번갈아 째려보더니, ‘킁’ 콧바람을 내쉬며 병실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할머니.
문밖에 서 있던 노승이 의원과 유니를 향해 고개를 까딱거리며 인사했다.
할머니가 병실을 완전히 빠져나가자, 그는 한번 더 머리 숙여 인사하더니, 조용히 문을 닫았다.
“휴우우.”
“하아.”
“워메. 죽겠는 거.”
문이 닫히자, 긴장이 풀려 동시에 한숨을 내쉬는 세 사람.
맥이 풀린 일권이 리의 침대 가에 털썩 주저앉았다.
유니도 목이 타는지, 캉캉이를 일권의 무릎 위에 내려놓고는 탁자로 가서 물컵을 집어 들었다.
“워메, 저 할마씨는 뭐 단가, 영매여?”
“말 조심해. 수운신이셔.”
“수운신?”
“푸웁! 코올록! 콜록, 콜록, 콜록!”
의원의 말을 듣고 놀란 유니가 사래가 들렸는지 연신 기침을 해댔다.
“수운신? 중간계 대빵 수운신?”
“그래, 수운신. 나도 딱 한번 멀리서만 봬서 긴가민가 했는데, 천승(天僧)님을 보고 눈치챘지. 천승님이 수운신을 보좌하는 일종의 보디가드거든.”
“콜록! 아, 아니 수운신이 콜록, 할머니였다고요?”
“그래, 가끔 저렇게 인격화해서 돌아다니기도 하시더라고. 뭐, 인격화한다고 성질 머리는 어디 가지 않는 것 같지만.”
“이깐 놈이 뭐시라고, 수운신이 다 찾아 불고. 아따, 인자 중간계 전체의 골칫덩이가 돼 불었구마.”
일권이 짜증이 나는지 리의 다리를 주먹으로 툭 쳤다.
그러자 리가 ‘으으흠’ 인기척을 냈다.
그게 반가웠는지 캉캉이가 총총걸음으로 막 뛰어가더니 리의 코를 ‘앙’ 깨물었다.
“으악!”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상체를 일으키는 리.
리의 가슴 위에 있던 캉캉이가 ‘또르르르’ 굴러 리의 다리 사리에 푹 파묻혔다.
“리!”
유니가 얼른 달려와 리의 침대 옆에 섰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리.
“어때, 좀 괜찮은 거야?”
유니가 리의 다리 사이에 파묻힌 캉캉이를 끄집어내며 물었다.
캉캉이가 머리를 좌우로 빠르게 털어댔다.
“용은? 그 할아버지는?”
“용? 할아버지? 뭔 꿈이라도 꿨는 갑제? 왐마 팔자도 좋소. 누구는 반 송장을 둘러업고 뛰느라 피똥을 쌌는디.”
일권이 고개를 홱 돌리며 투덜거렸다.
“애처럼 삐지기는. 저리 비켜봐.”
의원이 유니와 일권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리의 오른쪽 손목을 잡았다.
그 위에 자신의 손가락을 대며 진맥을 했다.
“말이야 바른 말이쟤, 나 아니었음 이 자슥 디졌당께. 나가 출장 허가도 못 받았는디, 징계도 무릅쓰고 나 아는 석공을 꼬드겨 부랴부랴 쫓아갔응께 망정이쟤. 나 없었으믄 저거 발작하다가 백 프로 터져불었을 것이네.”
일권이 리를 보며 눈을 부라리자, 비토가 일권의 눈앞으로 날아와 무표정한 얼굴로 박수를 쳤다.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라는 의미로.
그게 거슬렸는지 일권이 팔을 휘둘러 비토를 날려버렸다.
“쉿, 조용히 좀 해라. 진료하는 거 안 보이냐!”
의원이 나무라자 입을 비죽거리며 리를 째려보는 일권.
리의 어깨 뒤에 숨어 비토가 혀를 ‘베’ 내밀었다.
“흠. 자네, 진짜 운 좋은 줄 알아. 무슨 천운인지는 몰라도, 때마침 수운신께서 자네를 봐주신 덕분에 에테르의 운행이 많이 안정되었어. 조금 전까진 터지기 직전의 폭탄 같았다고.”
의원이 손을 놓자,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쪽 손목을 감싼 채 이리저리 문지르는 리.
“자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자물쇠가 3개나 없어졌어. 자물쇠가 사라질 때마다 에테르 운행이 급격히 나빠지는 걸 보면, 이거 분명 안전장치야. 나머지 두 개 마저 풀리면 당신 백 프로 폭발한다고. 내 장담해!”
리의 왼팔 옷깃을 잡아 올리며, 의원이 단호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왼쪽 팔뚝에는 이제 회전식 자물쇠가 두 개만 남아있었다.
그걸 보며 심란한 표정을 짓는 유니.
“그래, 오발탄이고 나발이고, 소멸되면 그게다 뭔 소용이야. 일단은 몸 관리 잘하면서 소명자료나 차분히 준비해 보자고. 제발 그만 속 썩이고, 이 인간아.”
리의 복부에 가볍게 주먹을 먹이는 유니.
리가 미안한 듯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왼쪽 팔뚝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두 개의 자물쇠만 남은 팔뚝이 어쩐지 허전해 보였다.
“그랴. 엊그제 중간계서 오발탄을 봤다는 사람들이 있응게, 인자 오발탄은 내가 맡을라요. 자네는 유니를 거들어 자료나 잘 준비하드라고. 인역이 죽어불믄 그 업까지 우리가 다 감당해야 돼야. 제발 생각 좀 하드라고!”
침대 가에 앉은 일권이 리의 허벅지를 툭툭 주먹으로 치며 말했다.
그게 재미있어 보였는지 캉캉이가 다가와 일권의 주먹을 붙잡으려 ‘깡충깡충’ 뛰었다.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두 분 모두. 정말로.”
팔뚝의 자물쇠를 손으로 문지르며 풀이 죽은 목소리로 리가 말했다.
그게 안쓰러웠는지, 일권이 몇 마디 더 쏘아붙이려다 그냥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궜다.
유니도 덩달아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봤다.
“근데, 선배. 저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왜, 또, 뭐가?”
일권이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며 말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 울상이었다.
“저, ‘왕자의 난’이란 게 뭐죠? 천계 성당에서 봤거든요.”
“‘왕자의 난’? 그런 게 중요해? 지금? 이 시점에?”
유니가 미간이 찢어져라 인상을 쓰며 리를 노려봤다.
진짜 철딱서니 없는 인간이구나, 나무라는 눈빛으로.
“미안해요. 그런데 왕자의 난 그림에서 봤거든요. 이 자물쇠를. 저처럼 팔뚝에 ‘자물쇠를 찬 남자’를 말이죠.”
왼팔을 앞으로 내밀며 자물쇠를 보여주는 리.
유니와 일권이 깜짝 놀라며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러다 동시에 리의 팔뚝으로 시선을 옮겼다.
비토가 자기도 봤다는 듯, 로봇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입을 비죽거리며 리를 바라보는 일권.
리의 표정이 더없이 진지 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방을 풀었다.
그리곤 가방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다, 파피루스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의원과 유니가 코를 막으며 뒤로 물러섰다.
파피루스를 촥 펼치자, ‘이계 8 신 계보’부터 시작되는 깨알 같은 글자가 빽빽이 쓰여 있었다.
‘+이계(異界) 8 신 계보+
일자(一者) – 부 – 신들의 아버지 – 운영 : 명천계
ㄴ 광운(光雲) – 자 – 해, 빛의 신 – 운영 : 암형계
ㄴ 월운(月雲) – 자 – 달, 어둠의 신
ㄴ 화운(火雲) – 자 – 불, 형벌의 신 – 운영 : 암형계
ㄴ 수운(水雲) – 녀 – 물, 균형의 신 – 운영 : 중간계
ㄴ 목운(木雲) – 자 – 나무, 양육의 신 – 운영 : 환생계
ㄴ 금운(金雲) – 자 – 쇠, 건설의 신
ㄴ 토운(土雲) – 녀 – 흙, 기원의 신 – 운영 : 분열계’
******
명천, 암형, 중간, 환생, 분열 5계가 본격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던 태초(太初)의 어느 밤.
명천계의 수평선을 사이에 두고, 하늘에는 일자가 땅에는 그의 아들들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네 이놈들! 감히 나를 거스르려 하는가?”
별빛이 반짝이는 명천계의 아득한 밤하늘 위로, 희고 부드러운 로브를 걸친 일자(一者)가 노기를 뿜어대며 두둥실 떠 있었다.
아직 도시의 구획만 어슴푸레 나눠진 채,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대지 위에는,
두 명의 신들이 우뚝 서서 일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전투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하나는 일자의 첫째 ‘빛의 신 광운(光雲)’,
다른 하나는 셋째 ‘불의 신 화운(火雲)’ 이었다.
광운은 일자처럼 하얗게 빛나는 로브를, 화운은 몸에 착 달라붙은 붉은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다만 일자와는 다르게 각기 11자 모양의 금색 영대를 가슴 앞에 드리우고 있었다.
두 신은 거대한 운석에라도 부딪힌 듯, 원형으로 둥그렇게 패인 땅바닥의 중심에 서 있었다.
커다란 원형 궤적의 끝에는 네 명의 또 다른 신들이 쓰러져 있었다.
마치 폭발에 떠밀려 날아간 것처럼.
균형의 신 수운(水雲), 양육의 신 목운(木雲), 건설의 신 금운(金雲), 기원의 신 토운(土雲)으로,
월등한 무력의 소유자, 광운과 화운의 협공에 당해 모두 검게 그을리거나 팔다리를 잃은 상태였다.
“하하하, 드디어 나타나셨구나, 우리 아버지. 형제들끼리 주먹다짐을 하게 된 건, 다 아버지가 늦은 때문입니다.”
“처맞을 줄 알면서도 덤벼분 것들이 잘못이쟤. 킁!”
멧돼지처럼 커다란 덩치의 화운이 코를 ‘킁킁’ 거릴 때마다, 긴 화염이 그의 코에서 뿜어져 나왔다.
“결국 이리되었는가. 어찌 이리도 어리석은가. 내 분수에 맞게 각자의 자리를 나누었다 몇 번을 말하지 않았던가.”
“에이에이, 그건 아니죠, 아버지. 그렇게 말하시면 참말로 서운 하당께요. 아무것도 없는 이 어둠 속에서 명천계니, 암형계니 하나씩 세계를 만들 때마다, 누가 제일 고생했습니까. 저랑 화운 아닙니까. 솔직히 쟤들이야 꼼지락대기만 했지 뭘 했습니까. 그런데 저더러 저 아둔한 목운의 밑으로 들어가 촛불 역할이나 하라니요. 이건 너무하는 거죠.”
“깨고 부수고 붙이고 치우는, 지저분하고 숭한 일은 나가 도맡아 해부렀는디, 나 보고는 암형계서 쓰레기 태우는 일이나 하라고요? 젠장맞을, 킁!”
화운이 커다란 화염 낫을 등 뒤에서 꺼내 들더니, 손잡이 쪽을 바닥에 쾅 내리쳤다.
그러자 둥그런 화염이 원형을 그리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 모습에 일자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게 어찌 누구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겠느냐. 허공 속에 생명을 숨을 불어넣는 일이지. 또한 쓰레기를 태우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일이거늘. 애초에 내 그러고자 너희들을 만든 거라 누차 말하지 않았더냐.”
일자는 양팔을 대자로 펼치며 에테르를 끌어 모았다.
그의 몸이 점점 하얗게 빛나더니, 머리카락과 수염뿐 아니라 실크옷까지도 에테르의 흐름에 이끌려 거칠게 출렁거렸다.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웠구나. 욕심에 눈이 멀어 제 미천한 능력조차 과신할 정도로.”
점점 끌어 오르던 에테르는 이제 불꽃처럼 일자를 둘러싸고 하얗게 타올랐다.
“말 안 듣는 아이는 매로 다스릴밖에. 합!”
일자가 기합을 내뱉자, 하얀색 에테르가 폭발하듯 구(球) 형태로 뿜어져 나갔다.
광운과 화운이 얼른 발을 땅에 박으며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그럼에도 에테르에 떠밀려 한참이나 뒤로 밀려났다.
땅바닥에 기다랗게 긁힌 흔적이 남았다.
“크으, 노인네, 역시 무시무시 하구만. 그래그래, 이 정도는 돼야 이걸 가져온 보람이 있지.”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는 광운.
양손 새끼손가락을 깨물며 가슴 앞에 X자로 인을 맺곤, 두 팔을 앞으로 내밀어 사이를 점점 벌렸다.
그러자 양손 사이 공간이 아지랑이 일듯 일그러지더니, 그 안에서 정육면체의 상자가 툭 튀어나왔다.
금색 나뭇가지 무늬가 몸통 전체를 이리저리 휘감고 있는, 암갈색의 상자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일자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