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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 왕좌의 난 2

by 무딘

“그 정도는 돼야 이걸 가져온 보람이 있지!”


광운이 양팔을 앞으로 내밀며 좌우로 벌리자, 그 사이에 금빛 나뭇가지로 감싸진 암갈색의 상자가 나타났다.

그것을 보더니 일자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낯익으시죠. 이 세계를 만들 때 썼던 거.”

“어찌 네가 그것을... 내 단단히 봉인하라 일러뒀거늘.”

“긍께 잘 숨겨 뒀어야죠. 금운 같이 덜 떨어진 애한테 맡기시면 어떻게 합니까. 애초에 늘 제 손에 있던 건데, 제가 못 찾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하하, 사제, 물러서시게!”


화운을 뒤로 물린 광운이 급격하게 에테르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광운의 눈이 하얗게 변하더니, 그의 에테르가 암갈색 상자 속으로 훅 빨려 들어갔다.


“2, 9, 9, 7, 9, 2, 4, 5, 8, 형해(形解)!”


광운이 주문을 외우자, 암갈색 상자가 마름모 모양으로 기울어지더니 천천히 회전하며 금색 나뭇가지가 벗겨져 나갔다.

그러다 ‘팽그르르’ 엄청난 속도로 돌며, 회전축의 위아래로 새하얀 빛을 뿜어댔다.


“오너라, 나의 친구여!”


구체로 보일 정도로 빠르게 회전하던 상자는, 마침내 ‘쩡!’ 소리를 내며 폭발했다.

순간 강렬한 섬광이 마치 대낮처럼 온 사방을 비췄다.


섬광이 잦아들자, 검날과 손잡이마저 새하얀 검이 남아 광운의 앞에 둥둥 떠 있었다.

검 끝이 갈퀴 마냥 세 갈래로 갈라진 검날 주위로, 일곱 가지 색의 작은 구슬들이 마치 달처럼 제각기 공전하고 있었다.

구슬들 사이로 이따금 강렬한 스파크가 튀었다.


“아따, 오랜만이구마.”


화운의 감탄을 뒤로하고, 손을 뻗어 손잡이를 잡는 광운.

천천히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더니 가볍게 앞으로 내리그었다.

그러자 ‘번쩍’ 스파크가 일면서 마치 지진에 땅바닥이 갈라지듯 광운 앞쪽 공간이 ‘쩌저저적’ 한없이 갈라져 나갔다.

벌어진 공간 너머로 끝 모를 어둠이 펼쳐졌다.


검을 거두어 이번엔 하늘을 향해 8자를 그리는 광운.

그러자 검기가 모여 하늘에 커다란 나비가 만들어지더니, 새하얀 빛 가루를 뿌리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광운이 그 모습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씨익 웃었다.


“‘절대 공허검!’ 아버지와 우리 7남매의 에테르를 집결시켜 만든 도구이자 영물. 이 정도는 있어야 이 세계의 질서를 다시 그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대로, 올바르게.”

“어리석은 자여. 왜 상처를 더 키우려 하는가.”


뒷짐을 지듯 ‘절대 공허검’을 등 뒤로 돌려세우는 광운.


“어리석은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겠죠.”


말을 끝내자마자, 광운이 땅을 박차고 튀어 올랐다.

그가 떠난 자리 흙먼지가 훅 일었다.

S자 커브를 그리며 허공을 날던 광운은 검을 앞으로 뻗은 채 일자를 향해 돌진했다.


“흠, 옥패(玉牌)!”


일자가 양손을 앞으로 내밀며 주문을 외우자, 반구 형태의 커다란 에테르 벽이 광운을 향해 뿜어져 나갔다.

광운은 이를 보자마자 마치 드릴처럼 빠르게 회전하더니 그대로 검 끝을 부딪쳤다.


‘파지지지직!’


절대공허검과 일자의 에테르 벽이 충돌하는 순간, 엄청난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다 검 끝에 인 소용돌이를 견디지 못한 에테르 벽은 팽그르르 돌더니, 이내 ‘챙’ 소리를 내며 깨져버렸다.


“흥! 천압!”


그 모습을 보고 일자가 광운을 향해 오른팔을 내밀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순간 광운을 둘러싼 공간이 확 일그러지더니 광운의 몸을 옴짝달싹 못하게 붙잡았다.


“화운! 지금!”


광운의 고함과 동시에 어느새 일자의 머리 위로 이동한 화운이, 일자를 향해 화염 낫을 내리그었다.

그러자 엄청난 크기의 화염이 멧돼지의 형상로 변해 일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쌍으로 어리석은 지고!”


미끄러지듯 옆으로 물러서며 화염을 피한 일자는 이번엔 화운을 향해 왼팔을 휘저었다.

그러자 일자의 왼팔에서 부채모양의 에테르가 만들어지더니 공간 자체를 휘어뜨렸다.

화운은 휘어진 공간에 휩쓸려 핑그르르 돌며 날아갔다.


화운을 제압하고 다시 광운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찰나,

어느새 번개가 번뜩이는 절대공허검이 일자의 바로 앞까지 날아와 있었다.

일자의 신경이 화운에게 쏠리는 틈을 타, 광운이 절대공허검을 던진 것이었다.


“나를 깔본 대가야, 영감!”


일자는 몸을 뒤로 빼 검을 피하려 했으나, 어느새 공허검의 일곱 색깔 구슬이 일자를 둘러싼 채 ‘결계’를 만들고 있었다.

결계에 움직임이 봉쇄되자, 예상치 못했던 듯 일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가라! 공허검!”


광운이 승리를 확신하는 그 순간, 어디선가 검은 덩어리가 훅 날아오더니 절대공허검에 그대로 몸을 부딪혔다.

‘펑’ 소리와 함께 경로가 틀어진 절대공허검은, 일자의 옆구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잘려 나간 일자의 로브가 허공에 흩날렸다.


“뭐?”


광운이 놀라는 것도 잠시, 검과 함께 날아간 검은 덩어리는 검에서 떨어지지 않고 검을 따라 빠르게 회전했다.

그 영향 때문인지 절대공허검의 속도가 천천히 줄더니, 결국 완전히 멈춰버렸다.

멈춰진 검은 다시 금색 나뭇가지에 칭칭 감겨있었다.


“월운! 너 이 자식!”


멈춰 선 절대공허검은 누군가의 손에 들려있었다.

일자의 둘째 아들, ‘달의 신이자, 어둠의 신’ 월운(月雲)이었다.


월운은 한 손으로 절대공허검을 힘겹게 들고 있었는데, 그의 손목에는 회전형 자물쇠가 겹겹이 감겨있었다.

검에 부딪힌 충격이 고스란히 남은 듯, 월운의 오른쪽 상반신과 골반이 잘려 나가고 없었다.

고통 때문인지 월운의 두 눈에선 빨갛게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월운이여...”


부상을 입은 월운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자.

월운이 피를 울컥 토해내며, 어쩔 수 없었다는 듯 일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막사라무, 달라다라, 계르디달타, 보르디름”


일자에게서 시선을 거둔 월운은 갑자기 절대공허검을 눈앞으로 치켜들더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월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전음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광운의 눈이 터져버릴 듯 커졌다.


“이 자식이, 무슨 짓을! 일섬(日蟾)!”


순간 에테르를 폭발적으로 끌어올려 일자의 천압에서 빠져나온 광운은, 검지와 중지를 하늘 위로 치켜들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한줄기 레이저가 그의 손가락 위에 광선처럼 떨어졌다.


“죽어라!”


광운이 월운을 향해 광선을 내리그으려는 찰나, 갑자기 반투명한 손이 훅 다가오더니 광운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정말 정신 차리지 못하겠느냐! 암뢰(暗雷)!”


멀리서 광운을 향해 손을 뻗은 일자가 ‘암뢰’ 주문을 외치자,

갈라진 땅바닥에서 검은 번개가 훅 솟구쳐 나와, 광운을 강타했다.

번개에 얻어맞은 광운의 몸에서 하얀 에테르가 폭발하듯 퍼져나갔다.


“오막사라무, 달라다라, 계르디달타, 보르디름.”


마지막 주문까지 외우고 천천히 눈을 감는 월운.

그러자 순간 월운의 몸이 길고 부드러운 ‘회색 띠’로 변하더니, 절대공허검을 빠르게 둘러쌌다.


둥그런 공 모양으로 싸인 절대공허검은,

제자리에서 전후좌우 사방으로 미친 듯이 흔들리더니, 내부의 온도가 급상승하는 듯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그 방법밖에 없는가. 아들이여.”


새빨갛게 달아오른 공은 아니나 다를까 ‘쩌저적’ 소리와 함께 표면 여기저기에 노란 균열이 생기더니,

이내 ‘콰광!’ 엄청난 폭음과 함께 폭발했다.

그 강렬한 빛이 천계를 온통 새하얀 빛으로 가득 채웠다.


“으아아아악!”


그때, 누군가의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찌푸린 눈으로 비명이 나는 곳을 바라보는 일자.

뒷목을 붙든 채 활처럼 몸을 뒤로 꺾은 광운의 모습이, 흐릿하게나마 일자의 시야 속에 들어왔다.



*****



‘촤악!’


침대 가에 앉은 일권이 파피루스를 접으며 리를 바라봤다.

침대 옆 의자에선, 피곤한지 유니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 폭발로 절대공허검이 완전히 아작나 불었고, 검 파편에 맞은 광운신도 치명상을 입어버렸댜. 나머지 파편들은 심이 워찌나 쎈지, 세계의 경계를 뚫고 이세계(異世界) 곳곳으로 흩어져 버렸댜. 워디로 갔는지는 여적 아무도 모르고.”

“음. 그건 다른 버전인가? 내가 전에 읽었던 거 하고는 내용이 조금 다른데?”


곁에서 팔짱을 낀 채 일권의 이야기를 듣던 의원이, 턱수염을 문지르며 말했다.


“이? 뭐시 다른디?”

“뭐랄까, 그래 말투, 사투리! 그니까 내가 읽은 거에서는 사투리를 쓰는 쪽은 화운신이 아니라 광운신이었던 것 같은데..”

“왐마, 그게 시방 중요허요? 어디 사투리 쓰는 사람이 한 둘 이간디? 나도 사투리 쓰는디? 의원 양반 공부 헛 배웠구마. 맥락을 봐야지, 맥락을. 쯧쯧쯧. 글고 아야, 니는 선배가 목 아프게 씨부리고 있는디 잠이 오냐? 윤!”


유니에게 파피루스를 휙 던지는 일권.

가슴에 파피루스를 맞은 유니가 화들짝 놀라며 깼다.

그리곤 턱까지 흘러내린 침을 손으로 얼른 닦았다.


“아아함, 미안해요. 감찰사 놈들이 어질러놓은 거 수습하느라 밤을 새웠더니.”

“허이고, 이놈이고 저놈이고, 도움 되는 놈이 하나 없당게. 암튼 이야기 마저하자믄, 월운신이 절대공허검을 작살낸 덕에 광운신과 화운신은 일자에게 제압되불고, 결국 암형계로 쫓겨났댜. 평생 암형계의 화염을 달구는 심든 일을 하게 되었쟤. 파편에도 맞고, 계획도 실패한 광운신은 머리가 도라부러 그때부터 광마(光魔)로 불린다드마. 아따 허벌나게 목마르네. 거 물 좀 줘보소.”


유니가 침대 옆 탁자에 올려진 물컵을 일권에게 건넸다.


“그게 ‘왕자의 난’이군요.”

“꿀꺽꿀꺽. 그랴. 아쉽게도 리가 궁금해 혀는 월운신의 야그는 별로 전해지는 게 없네.”


리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리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캉캉이를 말없이 바라봤다.

넘어졌다가 얼른 허벅지 위로 다시 올라오는 모습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아하함, 선배는 그딴 자료를 다 어디서 얻었데요?”

“‘용의 길’ 옆의 난쟁이 알쟤? 석공 보조들 모집헌다고 만날 광장서 죽치고 사는. 고게 호객꾼 하기 전엔 금운신의 자료팀이였댜. 금운신의 대도서관에 가믄, 금운신이 기록하신 파피루스가 허벌나게 쌓여있다데. 누가 제대로 관리도 안 헌다길래, 내 하나만 돌라고 혔쟤. 내가 또 역사 덕후자녀.”

“그거 하나 받고 또 고글이나 레이어 워치 같은 거 넘긴 거 아니에요? 자꾸 재고가 하나씩 없어지던데?”


유니가 눈을 치켜뜨며 일권을 노려보자, 다시 목이 타는 듯 일권이 물이 남아있지도 않은 컵을 연신 입에 털어댔다.


“이게, 왜 물이...”


‘웅웅, 웅웅’ 때마침 일권 워치가 시끄럽게 울어댔다.

슬쩍 보니 외부 연락이었다.

옳다쿠나, 살포시 컵을 탁자에 내려놓은 일권이 얼른 창가로 다가가며 연락을 받았다.

유니가 일권의 등에 대고 뭐라고 한소리 더하려다, ‘에휴’ 한숨을 쉬었다.


“에, 또, 여보셔요. 아, 네, 숙소 관리자요. 네, 네, 키요? 나가 미스터 리의 선임이 맞긴 헌디, 나가 왜 리의 숙소 키를 갖고 있간디요? 키야 리가 갖고 있겄죠. 날 봤다고요? 고거 이상허네. 나가 글로 간 적이 없는디. 이, 쪼까 다시 알아보고 연락 주소.”


연락을 끊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침대로 돌아오는 일권.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야, 니 숙소 키 워따뒀냐. 니 키를 왜 나헌테 찾고 그런다냐. 장비 쌕 한번 봐봐라.”

“아!”


그때, 리가 뭔가 생각이 난 듯 캉캉이를 내려놓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왜? 또 뭐 있어?”

“아, 장비 쌕 하니까 생각이 나서요. 제가 천계 대성당에서 파피루스를 하나 가져왔거든요. 천계 사제님이 거기에 ‘왕자의 난’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했어요.”

“그랴?”


반색을 하며 리의 곁에 달라붙는 일권.

유니가 탁자 옆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장비 쌕을 집어 리에게 건넸다.

일권이 흥미로운 듯 손바닥을 비벼가며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비토가 입을 비죽거리며 일권의 콧구멍에 V자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쾅!”


리가 막 쌕의 지퍼를 열려는 찰나, 누군가 문을 확 열어젖히며 병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남색 한복 위로 빨간색 두루마기를 덧대 입은 남자, 감찰사 도일이었다.


여기까지 달려오기라도 한 듯, 숨을 헉헉대는 그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하아, 하아, 리! 큰일 났어!”


도일이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목소리로 리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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