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암석 마물이 유니를 먹으려던 걸 멈추고 위를 바라보자, 그의 머리 위로 붉은 화염 망토가 너울거리는 게 보였다.
“한가한가 보지?”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리자, 정체를 눈치챈 암석 마물이 황급이 몸을 숙여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마치 왕의 행차를 본 하층민들처럼.
“마제시여!”
암석 마물이 큰 소리로 외치자, 근처에 있던 다른 마물들도 마제를 보고는 우르르 자리에 엎드렸다.
마제는 뒷짐을 진 채, 멀리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등 뒤로 투명한 줄에 묶인 대석공이 마치 놀이공원 풍선처럼 두둥실 떠 있었다.
“파티할 시간은 따로 준다잖아. 먼저 할 일부터 해야지?”
마제가 손을 뻗어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손가락 끝으로 멀리 하얀색 문이 보였다.
“존명!”
바닥에 엎드린 채, 유니를 등 뒤로 돌리는 암석 마물.
등 한쪽 끝이 쭉 늘어나더니 유니를 머리만 남겨놓고 감쌌다.
꼭 포대기로 아기를 등에 업는 것처럼.
유니가 이리저리 몸부림을 쳐봤지만, 단단히 묶여 꼼짝할 수가 없었다.
“쯧쯧, 누가 아귀 출신 아니랄까 봐. 좋다. 일 처리나 확실히 하거라. 가라!”
마제가 명령을 내리자, 암석 마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좌우 둘러보며 ‘누와우우웅!’ 알 수 없는 소리를 질렀다.
그리곤 쿵쾅거리며 앞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엎드려 있던 다른 마물들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우르르 그의 뒤를 쫓아갔다.
변이 한 뒤 갈피를 못 잡고 머뭇거리던 다른 조 마물들도, 하나, 둘 이들을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마물들의 행렬 너머로, 멀리 하얀색 문이 보였다.
암형문과 똑같이 생긴, 두 문짝만 덜렁 남아있는 커다란 문.
‘승천문’이었다.
그들의 행렬을 잠시 지켜보다, 마제도 미끄러지듯 허공을 날아올랐다.
마제의 줄에 묶인 대석공이 바람개비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
“젠장, 젠장!”
젤리 같은 공간에 두둥실 뜬 채, 리가 고함을 질렀다.
그의 앞으로 수십만 개의 직사각형 포털이, 마치 LED 램프가 촘촘히 박힌 스크린처럼 좌우로 쫙 펼쳐져 있었다.
“도대체 어디로 나가는 건데!”
리의 얼굴 옆에 둥둥 뜬 채, 비토가 허공에 대고 연신 주먹을 내질렀다.
이게 벌써 3백 번째 문이었다.
수십만 개의 포털을 보고 ‘하나씩 들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걸리지 않겠어?’라고 생각하고 무턱대고 뛰어들던 참이었다.
포털들은 쌍을 지어 연결됐는지, 하나로 들어가면 다른 하나로 튀어나왔다.
쌍으로 된 포털이니 실제로는 절반만 들어가 보면 찾을 수 있었다.
비토가 수첩을 꺼내 들어가는 문과 나오는 문을 빠르게 표시했다.
수십만 개의 문이라 표시하기가 쉽진 않았지만, 비토는 자신감에 넘쳤다.
자신은 기하학에 능한 정령이라면서.
“또, 바뀐다, 또. 아...”
허나, 몽마의 계략은 녹록지 않았다.
빠르게 포털로 드나들며 거짓 포털을 체크해 나가던 찰나, 갑자기 포털들이 막 뒤섞이기 시작했다.
바닥에 흩뿌려 놓은 카드가 뒤섞이듯이.
그리곤 언제 그랬냐는 듯 오와 열을 맞춰 다시 직사각형 모양으로 정렬됐다.
순식간에 체크했던 포털들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미친 척 속도를 높여가며 두 번 더 시도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위치가 뒤섞이도록 해놓은 일종의 결계였다.
“몽마, 이 개자식!”
한없이 펼쳐진 문들을 향해 고함을 지르는 리.
뚫어져라 문을 노려보더니, 결심한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해보자 이거지. 달라다라 워제아니...”
리가 나지막이 주문을 외우자, 순간 노란 에테르가 리 주변으로 훅 모여들더니, 리가 순식간에 2단계로 변신했다.
그의 등 뒤로 작은 태양이 만들어져 이글거렸고, 노랗게 변한 그의 머리카락이 물속처럼 너울거렸다.
“리, 어쩌려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 비토.
“다 깨부수는 수밖에 없어. 가짜라면 분명 부서질 거야. 온전히 남아있는 게 어떤 건지 봐줘.”
직사각형 포털 벽(wall)을 향해 양팔을 내미는 리.
손바닥을 펴자, 그의 손끝에서 노란색 번개가 어지럽게 지직거렸다.
“자, 한 번에 간다, 섬뢰(纖雷)!”
리의 주문과 동시에, 손끝에서 엄청난 양의 번개 줄기가 쏟아져 나왔다.
문을 바라보며 비토가 침을 꿀꺽 삼켰다.
*
“끼이이이익!”
중간계 도로 중간으로 ‘사마귀 형상의 마물’이 갑자기 뛰어들자, ‘조개차’ 운전사가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쿵’, 충돌 후 한참을 미끄러지다 멈추는 조개차.
운전사가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자, 차창 밖으로 상체만 남은 마물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저, 저, 저게 뭐야...”
놀라는 것도 잠시, ‘챙’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나더니 차 안으로 손이 쑥 들어와 운전사의 멱살을 잡았다.
사마귀처럼 생긴 팔이 우악스럽게 그를 잡아당겼다.
“으아악!”
차 핸들을 붙잡은 채, 끌려 나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운전사.
“선풍각(颴風角)!”
그때, 차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휙 날아와, 사마귀 마물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기습을 당한 마물이 데굴데굴 도로 위를 굴렀다.
“반월파!”
바닥에 닿자마자 팽이처럼 휙 돌며, 부채로 초승달 모양의 검기를 날리는 검은 그림자.
날아온 반월파에 마물의 몸이 그대로 두 동강 났다.
마물의 남은 하체에서 용암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잠시 멈춰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검은 그림자는, 이내 뒤를 돌아 운전사 쪽으로 다가왔다.
남색 한복 위, 덧대 입은 붉은 도포가 바람에 펄럭거렸다.
그렇다. 감찰사 도일이었다.
“별것도 아닌 게. 쳇.”
콧잔등을 찌푸린 도일은 운전석으로 몸을 기울여 운전사의 동태를 살폈다.
운전사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지금 이곳은 위험해요. 무조건 수운신이 계시는 곳으로 가세요!”
도일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운전사.
도일이 차 보닛 위, 마물의 상체를 치워주자, 운전사가 가볍게 목례를 하더니 액셀을 밟았다.
‘부우웅’ 조개차가 도일로부터 빠르게 멀어져 갔다.
“그곳이라고 안전할진 모르겠지만...”
조개차의 뒷모습을 보며 혼잣말을 하는 도일.
부채를 접어 이마의 땀을 닦아내는데, 순간 ‘구구구구’ 공기가 진동하는 굉음이 들려왔다.
얼른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운석같이 거대한 화염 덩어리가 조개차 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아, 아...”
아니나 다를까, 화염 덩어리는 멀어져 가던 조개차를 그대로 덮쳤다.
한 발이 아니었다.
‘쿵! 쿵! 쿵!’ 연이어 날아온 거대한 불덩이가 조개차뿐 아니라 도로 자체를 완전히 막아버렸다.
차마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는 도일.
그때, ‘구구구구’ 도일의 머리 위에서 또다시 굉음이 들렸다.
얼른 위를 쳐다보니, 도일에게도 커다란 불덩이가 날아오고 있었다.
“보법, 갈지(之!)”
Z자 형태로 뜀뛰며 빠르게 장소를 벗어나는 도일. ‘쿵! 쿵!’ 화염구가 도일이 있었던 도로 위로 떨어졌다.
화염구를 피한 뒤 다시 하늘을 보니, 익룡 같은 마물 수십 마리가 도시 곳곳을 향해 불덩이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아, 저건 또....”
그때, 도일의 왼쪽에서 뭔가가 반짝거렸다.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어 이를 피하는 도일. 도일을 지나친 뭔가가 바닥에 ‘콱’하고 박혔다.
곁눈질로 슬쩍 보니 화살이었다.
뼈다귀를 쪼개 만든.
도일이 얼른 자세를 잡고 화살이 날아온 곳을 돌아봤다.
사마귀처럼 생긴 마물 하나가 자신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었다.
화살촉에서 붉은 화염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핑!’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화살이 날아왔다.
화살의 방향을 확인한 도일은, 피하지 않고 화살을 향해 곧장 달려들었다.
“보법, 백척간두(百尺竿頭)!”
화살을 향해 붕 뛰어오른 도일은, 날아오는 활을 밟고 한 바퀴 빙글 돌더니, 부채를 펼쳐 마물에게 던졌다.
‘핑그르르’ 톱날처럼 빠르게 회전하며 날아간 부채는, 마물을 머리통을 그대로 둘로 쪼개 버렸다.
한 바퀴 빙글 더 돌아 바닥에 내려서는 도일. 멈춰 선 채 오른손을 위로 들자, 부메랑처럼 허공을 날아온 부채가 도일의 손에 착 안겼다.
‘키야아아악!’
그때 도로 너머, 인근 공터에서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고개를 돌려 보니, 또 다른 감찰사가 뼈다귀 창을 든 외눈박이 마물들과 싸우고 있었다.
한 마리는 간신히 제압한 듯했지만, 다수의 공격에 겨우겨우 방어만 하는 모양새였다.
“저 자식들이!”
부채를 흔들어 용암을 털어낸 도일은, 감찰사를 도와주기 위해 위로 휙 뛰어올랐다.
그 순간, 검은 덩어리가 하나가 훅 도일을 덮쳐왔다.
얼른 몸을 돌렸지만, 완전히 피하지 못해 왼쪽 어깨와 부딪혔다.
‘핑그르르’ 돌며 바닥에 내려서는 도일.
“크으윽.”
충격이 어찌나 강한지 어깨뿐 아니라 손까지 저릿저릿했다.
“네 놈이냐. 자꾸 내 부하들을 건드는 게.”
고개를 들어 보니, 바닥에 반쯤 파묻힌 화염구 위로 또 다른 사마귀 마물이 서 있었다.
조금 전 상대했던 마물보다 덩치는 두 배 정도 컸고, 온몸에 반짝이는 옥색 갑옷을 두르고 있었다.
양 팔뚝에 붙어있는 날카로운 톱니가 햇볕에 반짝거렸다.
“네 머리는 내가 직접 먹어주마.”
사마귀 형상의 마물이 오른팔을 들어 자신의 목 뒤로 돌렸다.
‘득득득’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척추에서 등뼈로 연결된 ‘채찍’ 같은 무기를 뽑아냈다.
‘키아약!’
그때 인근에서 마물의 비명 소리가 또다시 들렸다.
얼른 보니 감찰사가 용케 한 마리 더 제압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의 존재를 알아챈 마물들이 점점 더 그를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거기에 신경 쓸 때가 아닐 텐데!”
바닥으로 뛰어내리며 ‘뼈 채찍’을 허공에 빙글 돌린 마물이, 팽이처럼 몸을 회전하며 도일을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휘익’ 공기 가르는 소리와 함께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는 채찍이 도일을 향해 날아들었다.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었는데도 뼈 사이가 쭉쭉 늘어나며 순식간에 도일의 얼굴까지 날아왔다.
“헛!”
얼른 부채를 펼쳐 뼈 채찍을 막는 도일. ‘텅!’ 분명 막았지만 어찌나 충격이 강한지 몸 전체가 뒤로 밀려났다.
빠르게 뒤로 구르며 싸울 자세를 취하는 도일.
마물에게로 돌아간 뼈 채찍은 쉴 틈도 주지 않고 스프링처럼 늘어나며 재차 도일을 덮쳤다.
“반월파!”
채찍부터 끊어버릴 생각으로, 사선으로 물러나 반월파를 쏘는 도일.
하지만 웬일인지 반월파는 만들어지다 말고 맥없이 흩어졌다.
동시에 도일의 의도를 눈치챈 뼈 채찍이, 90도로 경로를 꺾어 도일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들었다.
“젠장!”
백덤블링 하며 아슬아슬하게 뼈 채찍을 피하는 도일.
하지만 뼈 채찍이 가슴 쪽을 스치며 도일의 감찰사 복이 수직으로 찢겨나갔다.
서너 차례 백덤블링하며 뒤로 물러서는 도일.
“겨우 그 정도야? 이거 채찍을 꺼낸 보람이 없는데. 쿡쿡쿡”
뼈 채찍을 거둬들이며 빈정거리는 사마귀 마물.
백덤블링을 멈춘 도일이 욱신거리는 가슴을 내려다봤다.
수직으로 찢긴 남색 한복 사이로 검붉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손에 든 부채도 첫 공격에 이미 망가졌는지, 여러 개의 부챗살이 부러져 있었다.
에테르를 주입해 봤지만, 이미 기능을 잃은 듯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으아악!”
그때, 인근에 있던 감찰사의 외마디 비명이 들려왔다.
도와줘야 했지만 도와주긴커녕, 고개조차 돌릴 수 없었다.
당장 눈앞의 마물이 그 정도 여유도 없을 만큼, 엄청나게 강했다.
단 일합에 도일의 무기를 망가뜨릴 정도로.
언제 또 채찍이 날아올지, 날아온다면 과연 망가진 부채로 막을 수는 있을지 불확실했다.
부상 부위도 단순히 스친 정도가 아닌지, 갈비뼈가 욱신욱신 댔다.
이대로라면 더 싸워봤자 결과는 뻔했다.
마물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꿀꺽 침을 삼키는 도일.
“자, 슬슬 지겨워지니까 그만 끝내자고.”
허공에 뼈 채찍을 붕붕 돌리는 마물.
도일이 그를 잠시 지켜보더니, 결심한 듯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리곤 오른손으로 감찰사 복을 북 찢어 벗어던졌다.
운동으로 단련된 근육질의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래,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짧게 한숨을 내쉰 도일은, 갑자기 양손 엄지손가락을 깨물더니 가슴 앞에서 알 수 없는 인을 맺었다.
그리곤 마물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주문을 외웠다.
“금술(禁術), 개안(開眼)!”
순간, 도일의 눈이 번쩍 하더니, 도일의 몸에서 초록색 에테르가 연기처럼 훅 뿜어져 나갔다.
거센 에테르 바람에 찢어진 옷자락이 어지럽게 펄럭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