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 나갔더니 아이들이 탁자에 나란히 앉아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뭔 이야기를 하나 싶어 가만히 들어보니, 초등학교 4학년인 둘째가 친구 행동이 도저히 이해 안 된다며 열변을 토하더군요. 욕을 입에 달고 살고 친구들도 수시로 괴롭힌다면서요. 그걸 듣고 큰 애가 조언을 해주는데, 영 맥락이 안 맞았습니다. 잠시 지켜보다 끝내 한마디 꺼내고 말았습니다.
"원래 영아기에 부모가 적절한 좌절 경험을 주지 않으면, 아이가 경계성 성격장애가 될 수 있어..."
제 말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큰 애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핸드폰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둘째는 조건반사처럼 입으로는 '눼에눼에'를 반복하며 양손으로 귓속에서 뭔가를 빠르게 끄집어내더군요. 한마디도 머리에 남기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천명! 이런, 우라질.
"테슬라가 전고점을 깼데."
"지금은 테슬라보단 엔비디아지."
믹스커피를 타서 자리에 앉았는데 도란도란 모여있는 후배들의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주식이야기로 시작한 대화는 각종 코인 동향을 거쳐 펀드로, 부동산으로, 그리고 익숙한 한숨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벌이로 언제 서울에 집을 사냐'가 한숨의 이유였죠. 그 심정 이해는 가지만, 돈보다는 다른 가치를 쌓는 게 더 중요할 연차들이기에, 대화가 마냥 곱게 들리지만은 않았습니다.
커피를 반쯤 비워내고 은근슬쩍 대화에 끼어들었습니다. 요새 '해외주식은 뭐로 하냐, 환전 수수료는 어떠냐'로 시작한 말문은, '요새 AI를 활용한 툴들이 많이 나왔다는데 그 걸 해보면 어떠냐', '작곡을 공부해서 곡을 써보는 건 어떠냐', '외부의 세계는 내가 어쩔 수 없으니 내면의 세계를 단단히 하는 게 좋지 않겠냐' 등, 예의 '꼰대질'로 이어졌습니다. 잠시 듣는 척하던 후배들은, 아니나 다를까 눈치를 보다 하나 둘 흩어지더군요. '저 선배 또 시작이다' 싶었겠죠.
제가 말이 많은 편은 아닌데, 비슷한 상황이 오면 혼자 안쓰러워 꼭 나서게 됩니다. '그러지 말자, 타인의 과제다' 다짐을 하면서도 결국 참견 충동을 이기지 못하죠. 이것도 병이다 싶습니다.
사실 이 참견병은 유래가 있습니다. 만년필의 잉크가 가득 차야 글이 써지듯, 한때 미친 듯이 인문학 지식을 욱여넣던 시절이 있었거든요. 그때 꾹꾹 눌러 담았던 지식들이 자기가 '들어갈 자리'를 찾으면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죠. 그때가 입사 후 어느덧 8년을 지나가는 시점이었을 겁니다.
초임지에서 한창 '본사 근무'에 대한 로망에 들떠 있었을 때, 본사에서 내려온 선배에게 물었습니다. 본사에서 하는 현업은 어떻냐고요. 그때 선배는 딱 한 단어로 정의하더군요. '부품'이라고요. 정신없이 돌아가는 제작 공정 속 하나의 톱니바퀴가 되는 게, 우리 일이라고요.
본사 발령 후 3년 정도 지나자, 선배의 말이 이해됐습니다. 오더를 받아, 내게 주어진 기능을, 수행하기만 하면 됐습니다. 의지에 따라 퀄리티를 높일 여지는 존재했지만, 다분히 자기만족이었죠. 인정해 주는 사람도 없고,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었죠. 아니, 오히려 자기 일을 방해한다고 귀찮아하지 않음 다행이었죠. 당연히 일의 만족도는 갈수록 떨어졌고, 반복적인 업무에 금세 무기력해졌습니다. 자연스레 '남의 떡'에 눈이 가더군요.
업을 기획하고 조직원을 리드하고 결과물에 책임지는, '리더형 업무'가 회사 내에도 있었습니다. 유튜브 시대가 열리며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입사할 때만 해도 이는 사회적으로도 선망받는 직업군에 속했죠. 회사 내에 직무를 변경할 수 있는 '내부 공채' 제도가 있었는데, 그걸 해봐야겠다 싶더군요. 대학교로 치자면 '전과 제도'를 이용해 전공을 바꾸는 거였죠. 합격해도 '비주류 업무'에 배정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톱니바퀴 신세' 보다는 재미있겠다 싶었습니다. 솔직히 거들먹거릴 명함도 탐이 났고요.
집사람과 상의 후 시험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직무 관련 내용이야 주워들은 게 있으니 말로 때우면 될 테고, 문제는 부족한 인문학 지식이었습니다. 작문 시험을 봐야 하는데, 평생 듣고 배운 내용이 이과(理科) 쪽 지식인지라 쓸 '꺼리'가 없었습니다. 역사도 잘 몰랐고, 사회는 무관심했죠. 그나마 심리학 쪽에 관심이 있었는데 그마저도 흐리멍덩했습니다. 그런 공구 상자로는 한 단락도 이어가기 힘들었죠.
그래, 본격적으로 책을 파고들었습니다. 출퇴근 때는 오디오 강연을 듣고, 여유 시간에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때 주로 했던 독서법이 '초서독'이었는데, 책을 읽고 중요하다 싶은 내용은 메모해 따로 모았습니다. 심리학, 철학, 사회학, 과학, 미술, 문학, 역사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게걸스럽게 먹어치웠습니다. 오랜만에 파일철을 들춰보니 크게 잡아 300개 정도가 정리되어 있더군요. 이후에 추가한 내용도 많으니 전부는 아니겠지만, 당시 꽤나 열심히 달려들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호박벌(Carpenter Bee)은 신체 구조상 본디 날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은 먹이를 구하려 하루 16km를 날아다닌다. 중요한 건 신체적 한계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다. 고통과 수고가 따르겠지만 마음가짐이 그들을 날도록 만든다."
'나는 호박벌이다, 날 수 있는 몸은 아니지만 날고야 말 테다'라고 되뇌며,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빠져나가는 것보다 집어넣는 게 많다 보니 실제로 쌓이는 단어와 굵어지는 문장들이 생기더군요. 그런 시간이 2, 3년쯤 지나자 슬슬 자신감이 붙었습니다. 상황 따라 써먹을만한 어구들이 선뜻 떠오르니, 이거 도전해볼 만하다 싶었죠.
하지만 삶은 '우연과 변수와 아이러니의 집적물'이라 하지 않았던가요. 결과적으로 호박벌이 되려던 꿈은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2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되던 '내부 시험'이 전격 중지됐죠. 본격적인 쇠락기에 접어든 회사는 전반적인 다이어트에 돌입했습니다. 인력도 감축으로 방향을 틀었고요. 대외 환경변화를 쫓아가는데 급급한 상황이라, '개인의 경력 개발'같은 호시절의 논리는 자리 잡을 곳이 없었습니다.
6, 7년쯤 지나 단발성으로 '내부 시험'이 부활한 적이 있었지만, 이미 중견 사원에 접어든 터라 다시 '바닥부터 길 용기'가 나지 않더군요. 탐냈던 직업적 명성도 솔직히 예전 같지 않았고요. 결국 시도조차 못한 도전을 포기하며, 그렇게 제 인생에 또 하나의 뻘짓이 추가되었습니다.
그렇게 실패로 끝나고 만 뻘짓은, 뜻밖의 부작용까지 낳고 맙니다. 앞서 말했던 '참견병', '습관성 조언병'이 생긴 거죠. 선각자들의 깨달음과 통찰을 주워듣다 보니, 마치 제가 그분들의 수준이라도 된 양 착각하게 된 겁니다. 마치 국회의원 취재를 오래 하면 본인이 국회의원인 것처럼 거들먹거리고, 경영진 보좌를 오래 하다 보면 마치 경영진이라도 된 양 동료들을 하대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진보 세력을 비난하는 이들은 이런 태도를 '지적 오만'이라고 부르더군요.
사춘기 자녀의 반항 때문에 고민하는 선배에게는 '청소년기의 발달과제는 정체성의 형성이다. 이를 위해 첫 번째 밟는 과정이 부모가 주입한 기준 파괴인데, 그것을 부모는 반항으로 인식한다', 일이 너무 많아 우울하다는 후배한테는 '행복하기 위해선 세 가지 중 하나를 해야 한다. 재미를 추구하거나, 몰입을 추구하거나, 봉사처럼 자신의 사회적 가치가 확인되는 일을 해라', 빚을 내 아파트를 살까 말까 고민하는 동기에게는 '신용 본위 화폐제도는 빚으로 화폐의 과소를 판단하는데, 지금 가계대출이 1000조 원이다. 역대 최고라는 점을 명심해라', 엔지니어 일에 회의를 느끼는 후배에게는 '언어는 인식을 규정한다. 알고 있는 어휘의 수만큼 세상의 크기가 달라지니, 낯선 어휘를 늘리는데 힘써야 한다' 라며 제대로 시건방을 떨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의 이야기를 마치 제 것인 양 잘도 이용해 먹었군요. 말할 때마다 출처를 밝히긴 했지만, 출처보다는 발화자(發話者)에 방점이 찍힌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이런 정보도 아는 나, 정말 쌔끈(?)하지 않니?'라는 속내가 은근히 깔려있었죠. 왜 옳은 말은 하는데 이유 없이 재수 없는 사람 있잖습니까. 제가 딱 그 꼴이었죠.
그나마 눈치는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장황하게 늘어놓는 제 이야기가 '흡수되지 않는다'는 걸 곧 깨달았죠. 진지하게 듣는 동료들은 가뭄에 콩 나듯 했고, 대부분이 건성으로 듣거나, 듣다 말고 모래알처럼 흩어졌습니다. 얼토당토않는 논리를 앞세우며 끝끝내 각을 세우는 후배들도 여럿 등장했죠.
이상했습니다. 내가 지금 상황에 적합한 최적의 충고를 건네는데, 도대체 왜 들어먹질 않지? 조금만 챙겨 들어도 본인들에게 이익이 될 텐데, 왜 귀 기울이지 않는 거지? 하나같이 마음이 가난하지 않아 그런가? 내 이야기가 너무 어려워서 그랬나? 그러다 후배와의 의견 충돌로 얼굴을 붉힌 어느 날, 퇴근 버스에서 이 한마디가 기억났습니다.
말의 내용이 아니라 자격을 따지는 순간, 종종 폭력은 시작된다.
- 이동진 [밤은 책이다] 중
알겠더군요. 왜 제 설명에 귀 기울이지 않는지를요. 단순했습니다. 제게 '말할 자격'이 없었던 겁니다. 한국에서는 '말의 내용'보다 '화자의 자격'이 우선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겁니다. 저만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인라 여겼지, 청자에 입장에서는 그저 '노바디(nobody)'에 불과했죠. 그들에겐 제 말을 귀담아들을 이유도 명분도 없었던 거죠.
입장을 바꿔보니 명확해지더군요. 저부터도 그랬습니다. 교수나 연구소장, 네임드 기자나 어느 기업 대표쯤 돼야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모르는 사람이 떠들면 색안경부터 끼고 봤죠. '네 깟게 알아봐야 얼마나 알겠어'하고 말입니다. 그러니 '노바디'인 엔지니어 선배 말이 무슨 설득력이 있었겠습니까. 더군다나 직무 관련 지식도 아니고 인문학 지식인데 말이죠. 그냥 예의상 들어주는 척하는 거지, 단 1cm도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게 '말할 자격'에 대해 인식한 뒤론, 웬만한 충고는 그냥 삼킵니다. 먼저 청하지 않은 경우, 적절한 해법이 떠오르더라도 가급적 참죠. 그렇게 말해봐야 도움도 안 될뿐더러, 괜히 저만 뻘쭘해지니까요. 말을 하면서도 '지금 나, 누구한테 말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상황에 씁쓸해질 테니까요. 이미 병증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빗장이 풀리기도 합니다. 물론 뱉어놓고 여지없이 후회하죠.
방에서 글을 쓰다 눈도 쉴 겸 잠시 거실로 나갔습니다. 아이들이 탁자에 나란히 앉아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더군요. 뭔 이야기를 하나 싶어 가만히 들어보니, 초등학교 4학년인 둘째가 친구 행동이 도저히 이해 안 된다며 열변을 토했습니다. 욕을 입에 달고 살고 친구들도 수시로 괴롭힌다면서요. 그걸 듣고 큰 애가 조언을 해주는데, 영 맥락이 안 맞았습니다. 잠시 지켜보다 끝내 한마디 꺼내고 말았죠.
"원래 영아기에 부모가 적절한 좌절 경험을 주지 않으면, 아이가 경계성 성격장애가 될 수 있어..."
제 말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큰 애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핸드폰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둘째는 조건반사처럼 입으로는 '눼에눼에'를 반복하며 양손으로 귓속에서 뭔가를 빠르게 끄집어내더군요. 한마디도 머리에 남기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천명! 아빠의 '습관성 조언병'에 이미 익숙한 아이들이 능숙하게 방어태세에 돌입한 거였죠. '됐거든! 어서 갈 길 가십싸와요'의 비언어적 표현인 거죠. 흥, 칫, 뿡이다! 콧방귀를 뀌고 제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또 입맛이 씁쓸해지는군요.
솔직히 아쉬움이 남습니다. '말할 자격'은 증명서를 통해 얻기도 하지만, 시간이 만들어주기도 하거든요. '인문학, 세상 쓸데없네'라고 섣불리 결론 내버렸던 저는, 이후 관련 공부를 등한시했죠. 조언용으로는 쓸모없더라도 '자기 성찰' 용도로 꾸준히 공부를 이어왔더라면, 그리고 이를 대중과 나눴더라면, 그 시간이 제게 말할 자격을 만들어 주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7년 전 쓰다만 인문학 블로그를 계속 이어왔더라면, 지금쯤 조그마한 마이크 정도는 제 앞에 놓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잘 풀렸다면 '슈카'나 '괘도'가 됐을지도 모르죠. 돌고 돌아 다시 같은 자리에서 시작하려니, 그때의 섣부른 결정이 영 아쉽습니다.
뭐, 어쩌겠습니까. 후회도, 뻘짓도 제 인생의 일부죠. 또 다른 10년 뒤를 기약하며, 오늘도 글을 쓸 수밖에요. 그때는 제게도 생기면 좋겠습니다. '말할 자격' 말입니다. 아니,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서로를 다독일,
'무대'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