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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딘 Jul 03. 2024

'총수'란 종교를 끊다.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다 예전에 함께 근무했던 선배를 만났습니다. 그의 밑에서 부사수로 근 1년간 일하며 희로애락을 함께했었죠. 모처럼 보니 반가워, 냉큼 다가가 인사했습니다.


"선배, 잘 지내시죠. 살 좀 빠지신 거 같은데요?"

"어, 그래... 뭐..."


 특유의 뚱한 표정을 짓더니, 같이 있기 싫다는 듯 휙 지나가 버리더군요. 낯설었습니다. 늘 제게 보이던 호쾌한 웃음이 그날따라 없더군요. '왜 저러지?' 갸웃거리던 순간, 문득 떠올랐습니다. '급진 좌파++'인 그의 정치성향이요. 그리고 얼마 전 제가 그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는 사실이요. '에이 설마, 그것 때문일까' 고개를 흔들었지만, 전에 없이 단호한 뒷모습에서 그의 배신감이 느껴졌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냉수를 마시는데 주르륵 콧물이 흘렀습니다. 그러고보니 멍하니 머리도 무거웠죠. '감기다!' 확신하는 순간, 재채기 하는 동료의 모습이 겹쳐졌습니다. 아, 진짜, 병원 가라니까. 마스크도 안 쓰고 재채기 해대더니만, 에휴. 병원에 가볼까 싶어 집사람에게 물으니, 갈 거면 미리 병원에 전화를 해보라는군요. 이번주부턴 일반 병의원도 파업에 참여할 수 있다나요. 짜증이 나더군요.


 고작 감기에 걸린 저도 이런데, 큰 병을 앓는 환자들은 어떨까요.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 아니겠습니까. 정부도, 의사들도 각자의 '옳은 소리'를 앞세워 싸우는데, 희한하게 피해는 싸움의 주체가 아닌 제 삼자들이 보는 상황. 이상합니다. 정말 저 '옳은 소리' 안에 일말의 오류도 없는 걸까요. 거창하게 헤겔의 '정반합'까지 가지 않더라도, 두 '옳은 소리'가 공유하는 '만돌라의 영역' 따윈 정말 없는 걸까요.


 하긴, 그것이 '옳은 소리'의 본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내 언어, 내 논리가 아니라면 어떤 것도 수용할 수 없다는 자세 말이죠. 한때, 저도 그런 '확신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합리성', '정당성'이란 마약에 취해, 옳지 않은 색과는 붓도 섞지 않으려 했었죠. 당연히 제가 그런 경지를 도달한 건 아니고요, 이를 알려줄 '구루(Guru)'가 따로 있었습니다. 그를 알게 된 게 벌써 10년이 넘었군요.


[ image created by MS Image Creator ]


 이전 글에서 이야기했듯, 한동안 일종의 '전과(轉科) 시험'을 준비하며 많은 책들을 읽었습니다. 경제를 앞세운 보수 정권이 들어서며 광우병이네, 언론 탄압이네 말들이 많았기에, 자연스럽게 인문사회분야 책도 많이 접했죠. 유시민 작가가 쓴 '청춘의 독서',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도 재미있었지만, 특별히 김진혁 PD가 쓴 '지식의 권유'를 보며 세상 보는 눈이 많이 틔였습니다.


 '사실'과 '진실'이 어떻게 다른지, '어젠다 세팅'이 무엇이고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지, '공시성, 통시성, 시각의 다양성'은 무엇이고 이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등, 기득권이 우리 사회를 요리하는 방식과 그로부터 거리를 두는 방법들에 대해 배웠습니다. 특히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친일과, 그들이 애국우파로, 산업 역군으로 변모하는 과정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땐 화까지 나더군요. 이래서 뿌리가 다른 우리 정치판은 맨날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나는 꼼수다'를 소개받았습니다. 입이 거칠고 시끄럽긴 하지만, 한창 시퍼렇던 보수 정권에 꽤나 날카로운 비판을 날린다는 평이었죠. 게다가 재미있고 통쾌하다나요. 워낙 입소문을 타던 때라, 저도 호기심 삼아 들어봤는데 솔직히 실망스럽더군요. 기존 대담형식에 익숙해 있던 제게, 욕과 비난과 비웃음이 난무하는 대화는 거북 그 자체였죠. 생경한 음식에 구역질이 나듯, 정신적인 구토가 났던 걸로 기억합니다.


 내 취향은 아니다 싶어 거리를 뒀지만, 한편으로 리더격인 '김어준'에 대해선 호기심이 일더군요. 딴지일보의 자칭 '총수'라는 건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과연 어떤 사람이길래 저리도 겁 없이 '나대는' 걸까, 궁금했습니다. 몇 권 안 되지만 그가 냈던 책을 읽어보고 그가 했다는 강연을 인터넷에서 찾아들었죠.


 '인물'이더군요. 습관처럼 내뱉는 '18'로 폄하하기엔, 그의 그릇이 너무 크더군요. 특히 관념선에 머물러 있던 학자들의 언어를, 일상의 언어로 끌어내리는 데는 가히 탁월한 능력을 지녔더군요. '자기 객관화', '자존감과 자신감'을 언급하는 부분에선 전율까지 느꼈습니다. 정치와 사회를 평가하는 데 있어선, 이른바 '무학(無學)의 통찰'이 번뜩였죠. 그의 캐릭터를 드러내는 말들을 몇 가지만 꼽아 볼까요. 


'삶의 불확실성에 제 힘으로 맞서는 순간, 아이는 어른이 된다'
'삶이 계획된 대로 이뤄질 거라 생각하는 건 착각이다. 결정적인 순간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삶의 행로는 크게 달라진다.'
'사람들이 나이 들어 허망해질 때는 하나도 이룬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이룬다고 이룬 것이 내가 원했던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때다.'
'삶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결정하는 2가지 근본 원인은 욕망과 공포다. 여기서 공포는 불확실성에 기인하는데, 이 불확실성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좌파와 우파를 나눌 수 있다.'


 사람이 달리 보였습니다. 감히 나 같은 게 가타부타 평가할 인물이 아니다 싶었습니다. 호기심은 더욱 커졌고, 그래 거부감을 견디며 '나는 꼼수다'를 꾸역꾸역 다시 들었습니다. 청국장의 고약스러운 냄새 뒤에 고소한 맛이 숨어있는 것처럼, 그들의 난잡한 언어를 견뎌내자 마침내 특유의 통쾌함이 드러나더군요. 일방통행 중인 보수정권의 모순과 오류를 날카롭게 찔러대는데 '귀르가즘'까지 느껴지더군요. 답답한 정치를 '음모와 유희'로 재해석하는 그의 방식을 쫓으며, 난생처음으로 정치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죠. 


 그때부터 그의 눈으로 세상을 봤습니다. 나는 꼼수다, 파파이스, TBS 뉴스공장, SBS 블랙하우스, 다스뵈이더 등, 그가 하는 모든 프로를 챙겨보며 그의 '가이드'를 쫓았습니다. 'Qui bono', 곧 '누가 이익을 보는가'로 사건을 재해석하는 그의 접근법에 완전히 사로잡혔죠. 그의 주장은 늘 논리적이었고,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을 포착했으며, 권력의 욕망을 일상의 언어로 이해하도록 도와줬죠. 혹여 기득권의 이기심이 드러나거나, 배운자들이 지적 오만을 풍기면 거침없이 '18'을 날렸고요. 그러니 빠져들밖에요. 그러니 사랑할밖에요.


 조금 과장하자면 저는 그에게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부처의 아우라를 느꼈습니다. 불의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옳음을 쫓아 돌진하는 '투사'처럼 보였죠. 보수정권의 타깃이 되어 해외로 도망쳤을 땐 진심으로 그의 안위를 걱정했고, 최순실의 국정농단을 꼬집었을 땐 침을 튀어가며 격분했고, 헌정사상 최초로 탄핵이 확정됐을 땐 제 일처럼 기뻐했습니다. 그가 언더에서 오버로 올라왔을 땐, 드디어 세상이 올바로 돌아간다고 생각했었죠. 약간의 비약을 보태자면, '총수 김어준'이라는 종교에 빠져도 단단히 빠져버렸던 겁니다.


[ Image by Gerd Altmann from Pixabay ]


 그렇게 근 10년 가까이 우리 사회를 읽는 일에 있어, 그의 눈에 의지했습니다. 워낙 오랫동안 종교처럼 따랐더니, 그의 주장을 의심할 생각조차 못했죠. 이해가 안 되면 내가 뭔가를 놓쳤겠거니, 상황상 그가 아직 설명하지 못한 부분이 있겠거니 생각했습니다. 워낙 온라인 팬덤이 강했고 제 주변에도 그를 신뢰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게 당연하다 여겼죠.


 그러다 우연히 강준만 교수의 칼럼을 읽게 됩니다. 자세히는 말씀 못 드리지만, 그 시기는 제가 '진보와 진리는 결코 동의어가 아니다'라는 걸, 직장 생활 속에서 어렴풋이 깨닫던 시기였습니다. 진보를 기치를 내 건 이들이 보이는 나태함과 무능함, 그리고 이율배반적 행동에 적잖이 실망하던 시기였습니다. 칼럼의 내용은 한마디로 이렇게 요약됐었죠.


"총수는 사과하지 않을 특권을 가진 듯하다."


 중요한 사회적 사안과 관련해 음모론을 잔뜩 늘어놓고, 사람들 사이에 의심과 불신을 증폭시킨 뒤, 음모와 다른 진실이 밝혀지더라도 결코 사과하지 않는다는 거였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는 진보세계에서 마치 '특권을 가진 존재'처럼 여겨지고, '추앙'받는다고 그는 지적했죠.


 에이, 그럴 리가, 내가 그를 봐온 세월이 몇 년인데. 그저 또 한 명의 '질투쟁이'가 등장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뉴스타파에서 발행한 '세월호 침몰'관련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침몰이 일어났던 시점을 전후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시계열로 분석해 설명해 주더군요. 침몰이 일어난 '순간'에만 매몰되지 않고, 침몰 전후의 인과관계를 촘촘히 엮어가며 침몰의 원인을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사건을 '점'으로 해석하지 않고 '선'으로 해석하니, 사건의 실체가 보다 명확하게 드러나더군요.


 충격이었습니다. 내용 자체보다도, 파파이스에서 흥분하며 봤던 AEIS 조작설, 앵커 투척을 통한 고의 침몰설과는 너무도 달랐거든요. 심지어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총수 그룹'의 주장과는 판이하게 달랐거든요. 제 눈에는 뉴스타파의 분석이 훨씬 논리적으로 보였습니다. 인재가 겹치고 겹쳐 일어난 사고라 생각하니 훨씬 납득이 갔습니다. 문득 이런 게 '음모'라는 거였구나, 깨달아지더군요. 음모를 듣고도 음모인지조차 몰랐었구나, 처음으로 자각하게 됐습니다.


https://newstapa.org/article/XIzrP


 어느 것이든 여전히 가설에 불과하니, 누가 옳고 그르다 말할 순 없을 겁니다. 그러니 사과하고 말고를 논 할 계제는 아니죠. 하지만 강준만교수의 칼럼과 '정치무당 김어준'이란 책을 읽으며 한 가지는 분명해지더군요. 제가 저 '자신의 눈'이 아닌 '총수의 눈'으로 세상을 봐왔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그의 주장과 같지 않다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지 않아 왔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그가 제공해 줬던 그럴듯한 논리와 주장을 앞세워, 마치 '절대 선(善)'인양 거들먹거려 왔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결국 그와 관련된 모든 콘텐츠를 끊었습니다. 그의 호탕한 웃음, 걸걸한 해설과 멀어진 지 꽤 됐습니다. '총수'라는 종교로부터 마침내 벗어난 거죠. 꽤나 길었던 또 하나의 뻘짓이 그렇게 마무리된 거죠. 말할 꺼리는 줄고, 명쾌한 논리도 사라졌지만 머리는 오히려 맑아진 기분입니다. 뭐, 멍청해진 거라 해도 할 말은 없겠군요.


 솔직히 그가 옳은지 그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제 깜냥으론 판단할 수조차 없겠죠. 자기 보다 더 큰 원의 크기를 잴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더는 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진 않습니다. 그의 논리로 세상을 판단하고 그의 머리로 세상을 살아가고 싶진 않습니다. 어차피 찰나에 불과한 한번뿐인 인생, 내 시선으로, 내 생각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부족하거나 때로 그릇된 판단일지라도 말입니다. 그게 진정 부처님이 불자들께 남기신,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자세 아니겠습니까. 


[ image made by MS image creator ]


 얼마 전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다 예전에 함께 근무했던 선배를 만났습니다. 그의 밑에서 부사수로 근 1년간 일하며 희로애락을 함께했었죠. 모처럼 보니 반가워, 냉큼 다가가 인사했습니다.


"선배, 잘 지내시죠. 살 좀 빠지신 거 같은데요?"

"어, 그래... 뭐..."


 특유의 뚱한 표정을 짓더니, 같이 있기 싫다는 듯 휙 지나가 버리더군요. 낯설었습니다. 늘 제게 보이던 호쾌한 웃음이 그날따라 없더군요. '왜 저러지?' 갸웃거리던 순간, 문득 떠올랐습니다. '급진 좌파++'인 그의 정치성향이요. 그리고 얼마 전 제가 그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는 사실을요. '에이 설마, 그것 때문일까' 고개를 흔들었지만, 전에 없이 단호한 뒷모습에서 그의 배신감이 느껴졌습니다.


 선배는 여전히 진보의 잣대로 세상을 보고 있을 겁니다. 함께 '총수의 혜안'을 주고받으며 기뻐하고, 놀라고, 분노했던 그 시절처럼 말입니다. 저만의 논리로 감히 진보 진영에 '비난의 칼'을 들이민 제가, 그의 눈에 좋아 보일리 없었겠죠. 이해는 하지만 좀 안타까웠습니다. 지천명을 지난 나이에도 여전히 '내 생각'과 '남이 내 안에 집어넣은 생각'을 구분 못하는 그가 말입니다. 해명이라도 할까하다 그만뒀습니다. 그또한 그만의 삶의 방식일지 모르니까요.




 생각에는 3가지가 결핍되어 있다. 우연과 시간과 감정. 


 생각만 가지고 섣불리 덤벼들었다가 예고도 없이 날아든 저들의 작용에 우리는 뜻밖의 결과를 맞곤 하죠. 후배들이 겁 없이 투자에 뛰어들려 할 때, 가끔 해주는 멘트입니다. 이거 'Originated from 무딘'입니다. 순전히 제 머리에서 나왔죠. 가끔씩 이런 아이디어도 떠오르는 걸 보면, 아주 '폐급 두뇌'는 아니다 싶습니다. 맞죠? 아니라고요?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고요? 의심이 가득하신 분들께는 이 대사로 답을 대신하고 싶군요.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 속이 후련했냐!' (영화 해바라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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