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잘 들어봐 봐. AI가 대중화되며 전력 소모량이 급증한 세계는 원자력 발전으로 전기 수요를 감당해야 했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핵 폐기물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지."
"어..."
"아, 좀 제대로 들어봐. 핵폐기물 처리방법을 고심하던 과학자들은 묘수를 찾아내는데, 바로 태양을 향해 핵폐기물을 날려버리는 거야. 태양이 핵폐기물을 흡수하는 거지."
"그래..."
"그렇게 잘 운용되나 싶던 어느 날 갑자기 태양이 기이한 폭발을 일으켜 태양계가 뒤틀리는데... 아, 쫌, 도대체 뭘 보길래 그러는 거야."
제 얘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핸드폰만 보고 있는 집사람에게 다가갔습니다. 역시 웹소설을 읽고 있더군요.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저러는지, 제목부터 봤습니다. '최강자 남주의 라이벌을 그만두었더니'. 집사람이 저를 향해 씩 웃더군요. 아...당혹스러웠습니다.
모르면 용감할 수 있습니다. 하룻강아지가 호랑이 앞에서 발악할 수 있는 있는 건, 호랑이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기 때문이죠. 동네에서 주먹 좀 쓴다는 양아치들이 링이나 옥타곤에서 경기 몇 번 뛰어보면, 어느덧 얌전한 고양이로 변하는 이유도 비슷하죠. 제대로 된 주먹을 맞아보면, 자기보다 몇 배나 강한 사람들을 상대해 보면 비로소 깨닫는 거죠. 주먹의 무서움을, 자신의 나약함을 말입니다.
간혹 '무지'를 에너지 삼아 한계를 뛰어넘는 이들도 드물게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현실을 깨닫고 좌절하고 무대밖으로 내려오죠. '아, 이 길이 내 길이 아닌갑다' 그러면서요. 영국의 모리즈 긴즈버그라는 학자는 이를 '좋아함의 비극'이라고 부르더군요. 좋아한다고 덤벼들었다가, 현실이란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처참히 부서지는 거죠.
육아 휴직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던 어느 날, 저도 불현듯 '용감해져' 버립니다. 어디서 그런 근자감이 샘솟는지, 갑자기 '코딩'이 하고 싶더군요. 한동안 사람이 없어서 못 구한다던 그 '코딩' 말입니다. 잘할 것 같았습니다. 혼자서 꼼지락대기 좋아하는 성격이랑도 아주 잘 맞아 보였습니다. 이미 불혹을 지나 플레이어로 뛰기엔 가성비가 안 나왔지만, 그런 단점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꽂혀버렸죠. 대박 프로그램을 만들어 나 개발자로 일어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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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파이썬(Python)이란 프로그래밍 언어부터 배웠습니다. 사람의 언어로 치면 '영어'에 해당하는 비교적 쉬운 언어였죠. 정부의 직업 교육 프로그램을 알게 돼 거의 무료로 배웠습니다. 막상 해보니 어렵지 않더군요. 20년 전 대학교 때 배우던 '컴퓨터 언어'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대 개발자'의 꿈이 눈앞에 어른거렸죠.
말이 낯설어 그렇지 '코딩'도 본질은 언어였습니다. 파이썬만 배운다고 컴퓨터로 뭐든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죠. 마치 한국어 읽고 쓰기를 배웠다고 역사를 이해하고 철학을 논할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죠. 언어가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면 하고 싶은 분야의 '라이브러리'를 찾고 그 사용법을 익혀야 했습니다. 빨래를 하기 위해 세탁기 설명서를 보고, 잡곡밥을 짓기 위해 밥솥 설명서를 익히는 것과 같죠.
재미있었습니다. 데이터분석 전문 라이브러리를 가져다 범죄율 분석도 해보고, 지역별 대선 득표율을 활용해 민심을 분석해 보고, 인구 데이터를 활용해 소멸 위기지역은 어디인지도 나타내보았습니다. '와, 이걸 내가 했어?' 싶은 그럴듯한 결과를 보며 뿌듯하더군요. 인터넷의 내용을 긁어오는 '웹 크롤링' 라이브러리를 사용해 순식간에 엑셀 자료를 만들고, 손 하나 까딱 않고 반복적인 작업을 처리해보기도 했죠. 잘만 가다듬으면 이래저래 쓸데가 많겠구나 싶더군요.
욕심은 점점 커졌습니다. 여러 프로젝트들을 거친 끝에, 이번엔 저만의 웹서비스를 만들고 싶더군요. 네이버나 다음, 브런치 같은 인터넷 서비스를 만들고 싶어진 겁니다. 앞서 배운 내용들은 재미는 있었지만 혼자서 '깨작대는' 놀이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원한 거죠.
아는 게 파이썬뿐이라 처음엔 파이썬 '라이브러리'를 활용해 웹서비스에 도전했습니다. 도전했다기보다, 그냥 책에서 알려주는 걸 '복붙'하는 방식이었죠. 하면 할수록 영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책대로 결과도 잘 안 나올 뿐 아니라, 몇 번을 반복해 겨우 얻은 결과도 '겨우 이거야?' 싶을 만큼 초라했습니다. 웹서비스 초창기에나 보던 화면 같았죠.
뒤늦게 찾아보니 이유가 있더군요. 웹 서비스를 만드는데 최적인 언어가 따로 있었던 겁니다. 자바스크립트(JavaScript)란 언어였죠. 비유하자면 스페인어 문화권에 들어가 한국어로 뭔가를 해보려 했던 겁니다. 그러니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올 리가 없었죠.
고민스럽더군요. 또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한다니 망설여졌습니다. 영어만 알고 있는데, 심지어 그걸 잘하는 것도 아닌데, 장사를 해보겠다고 스페인어를 새로 배워야 하는 상황이었죠. 새로운 언어를 배우다가 기껏 익힌 파이썬마저 잊어버리는 것 아닌가, 걱정이 컸습니다. 이미 복직도 한 상태라 여유시간도 많지 않았죠.
긴 고민 끝에 기왕에 버린 몸, 저지르기로 했습니다. 자바스크립트도 범용성이 높은 언어니 만큼, 배워두면 쓸데는 많겠다 싶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또 한 번 '몰라서 용감했던' 순간이었습니다. 이때 멈췄어야 했거든요. 이후 쏟아부은 어마어마한 시간과 에너지를 생각하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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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로 '손절'을 잘해야 한다더군요. 주식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말이죠. 인생도 다를 게 없다 싶습니다. 파이썬만 배우고 깔끔하게 손절해야 했었는데, 아쉬움에 자바스크립트로 넘어가자 실로 엄청난 시간을 쏟아붓게 됩니다. 자바스크립트란 언어 자체도 개념을 잡기 쉽지 않았는데, 웹서비스랑 맞물리자 알아야 하는 양이 말 그대로 폭증해 버렸죠.
물론 전공자들의 눈으로 보면 '자바스크립트가 뭐가 어렵다고'라며 비웃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전공자가 독학으로 익히기엔 난해한 개념들이 많았죠.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자바스크립트에는 '거시기'가 있더군요. 전라도 방언 '거시기' 말입니다. 어떤 상황에 넣느냐에 따라 거시기의 의미가 달라지잖아요. 'this'란 놈이 딱 그렇더군요. 이게 어디 들어가느냐에 따라 가리키는 대상이 달라지는데, 직관적이지가 않아 이해하는데 상당히 애를 먹었습니다. 익숙해지기 전까지 쓰는 족족 틀려 시간만 엄청 잡아먹었죠.
이런 것도 있었습니다. 비동기식처리. 웹서비스를 하면 동시에 오는 요청이 많으니까, 우선은 되는 놈 것만 먼저 처리하고, 안 되는 놈은 기다렸다가 나중에 처리하겠다는 겁니다. Promise라는 놈이었는데, 이걸 감안해 코딩을 하려니 머릿속이 뱅글뱅글 돌더군요.게다가 이것들을 활용해 OOP(Object Oriented Programming) 기반의 '붕어빵 틀(Class)'을 만들어야 하는데, 몇 번 도전하다 보면 정말 '나 오늘부터 붕어빵은 냄새도 안 맡는다'라는 의지가 저절로 샘솟더군요.
여기저기 지뢰밭이었지만 꾸역꾸역 언어는 익혔습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죠. 웹서비스를 하려면 '고객을 상대하는 영역(Front End)'과 '데이터를 처리하는 영역(Back End)' 두 가지를 동시에 만들어야 하더군요. 고객을 상대하는 영역, 곧 웹페이지도 제대로 만들려면 '삼총사(HTML, CSS, JavaScript)'부터 능숙하게 다룰 수 있어야 했죠. 데이터를 처리하는 영역도 중간에서 '중계해 주는 툴'과 데이터베이스(sql) 자체를 운용하는 법을 '별도로' 익혀야 했고요. 둘 다 동시에 하기 어려우니 이를 쉽게 해 주는 '라이브러리'가 있었는데, 이 또한 사용법을 '따로' 익혀야 했습니다. 익히려 들 때마다 매번 새로운 개념과 규칙들이 쏟아졌죠.
이건 뭐 하면 할수록 해야 될 것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느낌이었습니다. 간신히 문을 열고 들어가면, 열어봐야 할 문이 10개씩 더 등장하는 느낌이었죠. 뭔가 잘 못 됐다 싶더군요. 확 포기해버리고 싶었습니다. 드디어 현실이 보이기 시작한 거죠. 그런데 어떡합니까. 이미 너무 깊이 들어온 걸요. 칼을 뽑았으니 무라도 잘라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할 수 있는 것만 최소한으로 하자며 스스로를 달랬죠.
그렇게 여유시간을 죄다 몰아넣은 끝에, 간신히 서비스를 하나 만들기는 했습니다. 좋아하는 영화감독과 드라마작가, 그리고 소설가를 갈무리하는 사이트였죠. 나쁘지 않은 외양에 의도한 대로 작가들이 저장되는 걸 보며 나름 뿌듯함을 느꼈죠. 하지만 만족감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금세 오동작하기 시작하더군요. 데이터를 긁어온 사이트의 내용이 바뀌면, 에러가 나 한참을 수정해야 했습니다. 사용했던 라이브러리가 업데이트라도 되면, 가차 없이 오류를 뱉어내더군요. 그렇게 몇 번을 수정하고 났더니 도저히 더는 못 고치겠다 싶더군요. 몇몇 지인들에게만 보여주고 그냥 접기로 결정했죠. 이래서 '개발은 재미있지만, 유지보수는 지옥이다'라는 말이 나오는구나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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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 간단한 전화번호 앱도 개발해 보고, 인터랙티브 웹이란 것도 배웠습니다. 자바스크립트의 업그레이드 버전 타입스크립트도 공부했고 3D 웹개발을 위한 툴도 따로 공부했죠. 따져보니 그렇게 배운기간만 4년이 넘는군요.하지만 안타깝게도, 뭐 늘 안타까운 일의 연속이라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결국 실질적인 결과물은 하나도 얻지 못한 채 코딩을 접고 말았습니다. 또다시 뻘짓을 저지르고 만 거죠.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이것이었습니다. 너무도 빠르게, 너무도 많은 기술들이 새롭게 등장하더군요. 아직 채 배우지도 못했는데, 배우고 있는 기술은 금세 철 지난 기술이 되어 있더군요. 배우면서도 '이건 한물간 기술인데, 써먹을 데가 있으려나'라는 생각에 자주 시달리곤 했습니다.
필요한 기술을 채 익히지도 못했는데, 업그레이드된 다음 버전 기술이 등장할 때의 당혹감. 꾸역꾸역 새로운 걸 배우다 보면 예전에 배운 기술이 까마득히 떠오르지 않을 때의 무력감. 그런 것에 수시로 시달리다 보니, 슬슬 페이스가 떨어지더군요. 곧 도저히 더는 못 따라가겠다 싶더군요. 능수능란한 Chat-GPT를 접하며 좌절감은 절정을 이뤘죠.
어쩌면 그게 '엔지니어의 숙명'이 아닌가 싶습니다.하나의 기술을 어렵게 익혀 그걸 평생의 도구 삼아 살려하지만, 새로운 기술의 등장과 함께 도태돼버리고 마는.'하나의 기술'과 '그 기술을 익힌 엔지니어'는 일종의 운명공동체인 셈이죠. 물론 매번 새로운 기술에 적응하는 능력자도 있겠지만, 노쇠해 가는 의지와 몸으로 끊임없이 그런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죠. 이는 제가 지금 몸담고 있는 분야에서도 동일하게 벌어지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코딩을 접으며 오래 생각했습니다. 더는 뻘짓할 시간이 없는데, 그렇다면 새로운 기술에 대체되지 않을 기술은 뭐가 있을까? 앞으로도 변하지 않고 꾸준히 수요가 있을 분야는 무엇일까? 제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바로 '뒷담화'. 현대사회는 이를 '스토리'라고 부르죠. 새로운 스토리에 대한 갈망은 시대를 초월해 늘 우리와 함께했거든요. 그래 '제대로 된 스토리'를 만들 기술만 갖춘다면 미래에도 절대로 대체되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죠.
물론 글 쓰는 AI의 등장, 이미 레드오션이 되어버린 시장 상황 등 위험성도 분명합니다. 하지만 수요 측면만 생각해 보면 충분히 미래를 걸어볼 만한 기술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야기의 본질이 달라질 일은 없을 테니까요. 특별히 인생 2막을 앞둔 제 입장에선 더욱 그렇죠. 그래, 지금은 어떻게 좋은 스토리를 만들 것인가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개별 아이디어 보다도 구조적인 면에 더 치중해서 말입니다. 제발 이번엔 뻘짓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바로 집사람에게 달려갔죠. 드라마, 웹소설, 웹툰에 빠져 사는 사람인만큼 '될 만한 이야기'를 분별하는 촉이 꽤나 좋았거든요. 반응을 보고 괜찮으면 시놉시스로 만들어봐야겠다 싶었습니다.
"자, 잘 들어봐 봐. AI가 대중화되며 전력 소모량이 급증한 세계는 원자력 발전으로 전기 수요를 감당해야 했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핵 폐기물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지."
"어..."
"아, 좀 제대로 들어봐. 핵폐기물 처리방법을 고심하던 과학자들은 묘수를 찾아내는데, 바로 태양을 향해 핵폐기물을 날려버리는 거야. 태양이 핵폐기물을 흡수하는 거지."
"그래..."
"그렇게 잘 운용되나 싶던 어느 날 갑자기 태양이 기이한 폭발을 일으켜 태양계가 뒤틀리는데... 아, 쫌, 도대체 뭘 보길래 그러는 거야."
제 얘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핸드폰만 보고 있는 집사람에게 다가갔습니다. 역시 웹소설을 읽고 있더군요.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저러는지, 제목부터 봤습니다. '최강자 남주의 라이벌을 그만두었더니'. 집사람이 저를 향해 씩 웃더군요. 아... 당혹스러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