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시절, 딱히 공부하라 재촉하는 사람도, 공부할 필요도 없었던 영어가 눈에 띄게 늘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제대로 된 사교육 한번 받아본 적 없는 제가, 지금 기준으로 늘어봐야 얼마나 늘었겠습니까만 최소한 영문독해만큼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눈이 틔였었죠. 웬만한 고등 수준의 영어지문은 직독직해까지 가능했으니, 문법이라곤 맨투맨 한 권 뗀 게 전부인 제겐 분명 신비한 경험이었습니다. 참고로 저는 '공고'를 나왔습니다. 비법이 무엇이냐? 두둥, 무식도 비법이라면 비법일까요, 영어 독해책을 한 권 사서 맨 뒤의 해설지를 뜯은 후, 영어 지문과 나란히 펼쳐두고 비교하가며 공부한 게 전부입니다. 어떤 패턴으로 글자들이 반복되는지,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하는지, 긴 문장이 어떤 형태로 번역되는지,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어가며 익히는, 아주 유치 찬란한 방법이었죠. 처음에는 이해 반, 우격다짐 반으로 100개의 지문을 훑어 넘겼고, 잘 이해가 안 되니 처음부터 2번, 3번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4번째 반복에 들어갈 때쯤, 더 이상 한글 해석이 필요치 않더군요. '앞에서부터 영어를 읽기 시작하면 뒤에 뭐가 따라올지 자동으로 예상하는' 이른바 직독직해의 단계에 들어선 겁니다. 바로 언어에 내재되어 있는 관성, 어려운 말로 '소쉬르의 랑그'를 몸에 익힌 것이죠. 그 시절이 자양분이 되어 지금까지 영어 때문에 골머리를 썩어본 일은 없습니다.
'관성이란 외부로부터의 힘이 없을 때, 처음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성질을 말한다'
관성이란 흔히 물리학에서나 나오는 개념정도로 여깁니다만, 실은 인간사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제 경험처럼 언어에도 있고, 늘 애를 먹는 습관에도 있고, 그림 속에도, 음악에도, 역사에도, 그리고 무엇보다 '생각'에도 존재합니다. 의식하지 않는 한, 우리는 늘 같은 방식으로 생각합니다. 생각을 물로 비유하자면 늘 같은 길을 따라서만 흘러간다는 의미입니다. 정의는 이겨야 하고, 진리는 하나뿐이며, 공산주의는 악이고, 희생은 고귀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동남아인들은 우리보다 열등하고, 서양인들은 우리보다 우월하며, 서구철학은 동양철학보다 합리적이고, 흑인들은 위험하다고 생각하죠. 틀리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배워왔고, 이 관성을 끊어내는 일이 대단히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거창한 개념들부터 일상적인 반응에 이르기까지, 우리도 모르게 '생각의 관성'에 이끌리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낯선 것과의 조우에서 이성이 시작된다. - 하이데거'
얼마 전 업무적으로 변화가 있었습니다. 좌파에서 우파로의 변절만큼이나, 파격적인 전환이었습니다. 그렇게 입장을 바꿔놓고 보니, 무턱대고 욕만 하던 시절엔 보이지 않던 요소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벽에 막혀 한 발자국도 진행치 못하던 물음도, 엉뚱한 데서 실마리를 찾게 되었고요. 시시비비를 떠나, 생각의 관성이란 게 얼마나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가를, 새삼 자각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창의성이란 '상수를 변수로 만드는 능력'이라 했습니다. 생각의 관성에 매여있는 한, 뮤즈는 영원히 우리 어깨에 내려앉지 않을 겁니다. 하이데거의 조언을 키 삼아, 낯선 것에, 익숙지 않은 생각에, 불편하고 거북한 감정에 한 걸음 다가가 보는 것은 어떨까요. 괴로울지언정, 절대 쓸모없는 경험은 아닐 거라는데, 오백 원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