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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딘 Jan 18. 2024

객관식 인생

[어쩌면 그럴 수도 Episode 5 ]


[free image by tjevans from pixabay ]


 엊그제 검색을 하다가 오랜만에 '그'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한때 저의 정신적인 멘토이자, 롤모델이었던 그는 의사이자, 주식투자자이자, 강연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독특하나 경력을 자랑했었죠. 특별히 그에게 더 의지했던 건 가진 능력에 비해 그가 너무나도 겸손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지위, 재산, 지식 등 어느 하나 빠질 게 없는 그였지만, 거동하며 거들먹거리는 걸 한 번도 본 적 없었습니다. 늘 말을 아꼈고 정제된 표현만 쓰려했으며, 어디서나 자신을 낮추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죠. '혼자 백 걸음을 앞서가는 것보다, 함께 한 걸음 내딛길 희망한다'는 그의 말을 들으며 얼마나 고개를 끄덕거렸는지 모릅니다. 겉모습이야 통통한 동네 아저씨에 불과했지만, 내면만큼은 어떤 사내 보다도 '섹시'했었습니다. 그러니 나도 저렇게 늙어가야겠다, 다짐할 밖에요.

 그러다 대략 5, 6년 전쯤이었을까요, 우연히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그가 소리소문 없이 재혼을 했다는 기사를 보게 된 겁니다. 이혼을 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 없는데, 덜컥 재혼했다고 하니 적잖이 당황스럽더군요. 실망보다는 아쉬움에 가까운 감정에 한동안 사로잡혔다, 부모의 불화로 상처 입었을 아이들 걱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저도 뭐 하는 건 별로 없어도, 두 아이의 아빠니까요. 평소 '정의'를 추구한다 믿었던 그의 이미지와 '사익' 선택한 그의 행동 사이에서, 어느 것이 그의 진실일까 혼란스러워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물론 그런 감정은 느낀 것은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사이버 세상의 반응은 훨씬 격렬했습니다. 워낙 대중에게 '시대의 지성'으로 칭송받던 사람인지라, 가장의 도리보다 사익을 좇은 그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거죠. 그를 겉만 번지르르한 개살구, 혹은 말만 그럴 듯 하지 실천에선 꽁무니 빼기 바쁜 '향원' 취급하는 게 전반적 평이었습니다. 맘카페에서 오간 반응은 실망을 넘어 거의 저주에 가까웠었죠. 


 그런데 냉정히 짚어보면, 그가 그리 못할 짓을 한 것도 아닙니다. 속사정이야 우리가 알리 없지만,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으니 이혼했을 테고 좋은 인연을 만났으니 인생 3막을 시작한 거 아니겠습니까. 내로남불 아니냐 비난할지 모르겠지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솔직히 그거 우리도 다 하는 행동 아닌가요? '카르페디엠'이네, 'YOLO'네 입술이 부르트도록 부르짖던 삶을, 그라고 선택 못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흠 많고 우유부단하고 제 밭으로 물 돌리기를 밥 먹듯 하는 종자, 그게 인간 아니던가요. 한 사람의 인간으로 지극히 인간적인 선택을 했다 해서, 그의 따뜻했던 발자취와 선한 의지와 아름다운 통찰까지 싸잡아 매도하는 건, 불합리하다 못해 잔인한 행동 아닐까요.

 '생의 불확실성에 제 힘으로 맞서는 순간, 아이는 어른이 된다. - 김어준'

 그를 향한 비난은, 실은 아쉬움이었을 겁니다. 멀찌감치 앞서나가 이 '불안의 숲'을 어떻게 헤처 나갈지 친절히 안내해 주던, '샤먼(영적 지도자)의 추락'에 탄식했던 건 아닐런지요. 끝까지 순결한 지성으로 남아 우리에게 올바른 선택지를 건네주길 바랐는데, 그 기대가 꺾이자 분노했던 건 아닐런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그저 한 사람의 인간일 뿐인 그에게, 유독 가혹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 밀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저도 하고, 당신도하고, 우리 모두 하는 선택을, 그도 한 것뿐인데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객관식 인생'을 사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 불쑥 문제를 던져놓으면 또 다른 누군가가 그에 맞는 답안을 제시하고, 고민 끝에 그중 하나를 내 생각인양 택하는 방식 말입니다. 프레임이니, 맥락화의 함정이니, 어젠다 세팅이니, 다 그런 허점을 노리고 시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남이 던져놓은 개념 속에서 허우적 대는 삶이 과연 내 삶이기는 한 걸까요.
 유시민이, 강신주가, 도올이, 김어준이 스승은 될지 몰라도, 영원히 샤먼으로 남을 순 없습니다. 그들도 인간인 이상, 반드시 흠결이 드러나는 때가 올 테니까요. 그때를 대비하는 차원에서라도 조금씩 '나만의 답'을 연습해 보는 건 어떨까요. 오답일 확률이 높을 테지만, 최소한 그때부터 우리는 '어른'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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