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혹시 '이예준'이란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아마 잘 모르실 겁니다.
한국 가요의 중흥기에 태어났다면
'어금니까지 모조리 씹어먹었을'
괴물 같은 여가수랍니다.
고음으로 '차력쇼'를 하는 사람들은 여럿 있지만
속삭이는 소리부터 숨을 멎게 하는 고음까지
그녀만큼 섬세하게 표현하는 이는 몇 명 못 봤습니다.
음향 엔지니어로 적지 않은 세월을 보낸 저는
그녀가 성악창법을 토대로 잘 '싸여진' 소리를 숨 쉬듯 편하게 내는 걸 보며,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건 재능이다.
노력으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천부적 재능이다'라고 말이죠.
Poets are born, not made -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
파레토 법칙이란 게 있습니다.
다른 맥락에서 시작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흔희 '8대 2 법칙'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80%의 성과는 20%의 사람이 이뤄낸다,
80%의 결과는 20%의 노력만 투자하면 된다,
80%의 양적 변화는 20%의 질적 변화로 초래된다,
뭐, 대충 이런 의미죠.
저는 글쓰기에도 파레토 법칙이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글쓰기가 워낙에 기초적, 필수적 소양이다 보니,
자기 능력의 20%만 투자하면 누구나 80% 수준의 글은 쓰는 것 같습니다.
저 같은 월급쟁이가 공모전을 기웃거리는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죠.
헌데 반대로 생각해 보면
나머지 20%의 수준을 마저 끌어올리려면
남은 에너지의 80%를 쏟아부어야만 합니다.
고만고만한 수준의 글을 쓰는 건 쉽지만,
걸작의 수준까지 올라서려면
온전히 나를 갈아 넣어야 한다는 거죠.
게다가 유념해야 할 사실은
노력에 따른 결과가
결코 비례적으로 증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렇다 할 반응 없이 지지부진하다가
어떤 지점(Threshold)을 넘어서는 순간,
폭증한다 싶습니다.
지수함수의 그래프처럼 말이죠.
이를테면 94.9%까지 쏟아부어도 별다른 변화가 없다가,
95%를 넘어서는 순간 미친 듯이 치솟는다는 겁니다.
그 시점까지 버티는 사람은
글의 질적 성장을 이뤄내는 거고,
못 버티거나 충분히 자신을 쏟아붓지 못한 사람은,
결국 고만고만한 결과물을 내놓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궁금증이 하나 생깁니다.
남은 능력의 80%를 전력으로 쏟아부으며
질적 성장이 일 때까지 그저 참고 견디는 일은
과연 아무나 할 수 있는 걸까요?
아니라고 봅니다.
전 오직 두 부류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부류는 '천부적 재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자리에 앉아 몇 날 며칠을 글을 써도 집중력을 잃지 않는,
음표 하나, 숨소리 하나까지 신경 쓰며 수 백번 같은 노래를 불러도
연습에 대한 갈증이 끊임없이 솟아나는,
음표로 빽빽한 30분짜리 피아노곡을
쉬지도 않고 악보도 보지 않고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완벽하게 연주해 내는,
그런 '미친 천재'들이 나머지 80%를 쏟아부을 수 있다 생각합니다.
결과가 좋으니까 재미있고, 재미있으니까 더 빠져들게 되는 '노력의 선순환'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거죠.
두 번째 부류는 '극한에 몰린 사람들'입니다.
이른바 '배수의 진'을 치고 싸우는 사람들이죠.
이게 아니면 안 된다,
여기서 이기지 않으면 다음은 없다,
이걸로 결과를 내지 못하면 그냥 죽는 거다,
퇴로를 끊고
땅에 묻힐 각오로 덤벼드는 사람만이
나머지 80%를 쏟아부을 수 있다 생각합니다.
재능 여부와 무관하게 말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를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은 걸작 '죄와 벌'이
아내와 형의 죽음, 그리고 도박 빚과 형의 부채까지 떠안은 극심한 결핍 속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빚어낸 문장은,
때깔부터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미쳐야 미친다(불광불급).
어차피 천재와는 거리가 먼 우리에게
노력으로 재능을 넘어설 방법은
후자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글쓰기 외에,
이야기 만들기 외에,
내게 다른 대안은 없다,
여기서 실패하면,
그냥 죽는다.
그렇게 죽을 각오로 글을 쓸 때만이,
내 모든 걸 쏟아부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이를 악물고 참고 견딜 때 간신히
글이 다른 수준으로 올라선다 싶습니다.
그 정도까지 쏟아내지 않았다면,
내 글이 환호받지 못한다고
내 이야기가 출판되지 못했다고
원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냥 담담하게
또 '그렇고 그런 80%의 이야기'를 만들었구나,
받아들이면 될 것 같습니다.
출퇴근 길 심심하실 때,
'그날에 나는 마음이 편했을까'나,
'미친 소리'라는 노래를 한 번 들어보세요.
기왕이면 라이브 버전으로요.
소름이 돋는다는 게 어떤 느낌이었는지
모처럼 기억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