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장!”
열려있는 환생문을 통과해 어느 실내로 뛰어나오는 리.
한쪽 면을 가득 채운 통창 유리가 제일 먼저 리를 반겼다.
유리창 너머로 경기가 한창인 야구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따악!’
‘와아아~’
선수가 친 공이 멀리 뻗어나가자,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통창에 바짝 붙어 경기장을 꼼꼼히 둘러보는 리.
검은 가운을 입은 마물을 찾았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그런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5번 타자 유격수 권성근, 5번 타자 유격수 권성근.”
안내방송과 동시에 ‘덜컥’하고 등 뒤의 문이 열렸다.
히히덕거리며 들어오던 한 쌍의 남녀가 리를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놀란 여자가 손에 든 팝콘 몇 알을 바닥에 흘렸다.
“어? 뭐야, 분명 잠갔는데. VIP 3B... 맞잖아? 여기 우리가 예약했는데, 아저씨 뭐예요?”
남자가 문 번호를 살펴보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위협적으로 물었다.
곁에 있던 여자는 얼른 소파로 다가와, 행여 훔쳐 갈세라 얼른 자신의 가방을 품에 안았다.
“아, 어... 미, 미안합니다. 방을 잘못 들어왔네요.”
엉거주춤 그들을 지나쳐 나오는 리.
‘옷 입은 거 봐봐. 신고해야 되는 거 아냐?’ 뒤에서 두 사람이 속닥거렸지만, 리는 못 들은 척 밖으로 나왔다.
함성이 들리는 방향으로 계단을 올라오니, 금세 홈 플레이트 쪽 관중석 상단에 도착했다.
응원봉이며 나팔 같은 것을 든 관중들이, 노래를 불러가며 응원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7번 타자 대타 데이비슨, 7번 타자 대타 데이비슨.”
고글을 고쳐 쓰고 다시 관중석 이곳저곳을 살폈지만, 어디서도 마물의 신호는 잡히지 않았다.
“젠장, 이걸 어떻게 찾는담.”
관객석 계단을 내려오며 계속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리.
가끔 몇몇 관객들이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리를 흘깃거렸다.
‘따악!’
‘오우우우우...’
그때, 경쾌한 타격음에 이어, 관중들의 탄식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몇몇 관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입을 막았고, 또 어떤 이는 응원봉으로 마운드를 가리키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리는 리.
마운드 위에 투수가 쓰러져 있었다.
전광판에선 타자가 친 공이 직선으로 날아와 투수의 머리를 그대로 맞추는 장면이 슬로비디오로 재생되고 있었다.
그 모습에 관객들이 또 한 번 탄식을 내뱉었다.
‘삐, 삐, 삐!’
그 순간, 갑자기 리의 레이어 워치가 울리기 시작했다.
얼른 워치를 보니 ‘킥’이 시작됐다는 알림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킥이다! 어디냐?”
눈을 부릅뜨고 경기장을 훑어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슈웅’ 소리와 함께 세상이 일제히 멈춰 섰다.
놀란 관중도, 투수를 향해 뛰어나오던 의료진도 그 모습 그대로 멈춰버렸다.
그러다 3루 불펜 쪽에서 검은 형체 하나가 5미터가 넘는 파울망을 훌쩍 뛰어넘어 경기장 안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
그는 투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머리카락과 눈, 코, 입이 이상하게 뒤틀린, 조금 전의 그 마물이 맞았다.
리의 고글 화면에선 마물의 정체를 파악하느라 ‘서치 마크’가 계속해서 바삐 돌아갔다.
그를 보고 리도 붕 날아올라 포수 뒤쪽으로 내려섰다.
리의 양팔에도 어느새 두 줄의 검은 선이 나타나 어깨까지 뻗어 있었다.
“이봐! 하지 마!”
마물이 투수에게 다가 몸을 숙이려 하자, 막 타석을 지나던 리가 고함을 질렀다.
타석엔 흑인 타자가 방망이를 어깨에 걸친 채 투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마물이 괴기스럽게 목만 뒤로 돌려 리를 바라봤다.
볼 쪽에 붙어있는 그의 비뚤어진 입이 ‘씨익’ 이빨을 보이며 웃었다.
그러더니 그의 양 어깨에서 반투명한 보라색 팔이 쑤욱 뻗어 나왔다.
“하지 말라니까!”
리가 앞으로 손을 뻗어 그를 막으려는데, 순간 옆에서 뭔가가 휙 날아와 리의 오른쪽 볼을 그대로 갈겼다.
묵직한 무언가에 맞고 바닥을 구르는 리.
얼른 중심을 잡고 몸을 일으키는데, 이번엔 등 쪽에서 강한 열기가 느껴져 얼른 몸을 옆으로 피했다.
그러자 농구공 만한 화염 덩어리가 리의 옆구리를 스쳐 지나갔다.
“뭐...”
얼른 자세를 잡고 양쪽을 번갈아 쳐다보는 리.
타석 쪽에는 방망이를 든 흑인 선수가, 3루 더그아웃 쪽에는 야구 글러브를 낀 흑인 선수가 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둘은 들고 있는 장비들만 다를 뿐, 쌍둥이처럼 생김새가 똑같았다.
“뭐야, 니들도 마물이냐?”
리가 양팔을 뻗어 그들을 들어 올리려는 찰나, 리의 고글에 빨간 느낌표가 정신없이 깜빡거렸다.
느낌표를 따라가 보니, 투수 옆의 마물이 허리를 90도로 숙여 외투를 벗고 있었다.
마스크가 붙어있던 허물 같은 외투를 벗어버리자, 흰머리에 붉은 지팡이 짚은 ‘노파’의 모습이 드러났다.
머리를 좌우로 빗으며 매무새를 가다듬는 그녀의 어깨 위로, 초록빛 에테르가 화염처럼 일렁거렸다.
“경고! 경고! 암형계 A-급 마물! A-급 마물! 달아나시오! 달아나시오!”
동시에 리를 노려보던 흑인 선수들도, 멈춰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정수리부터 종이 찢어지듯 둘로 갈라지더니, 야구선수 껍질이 벗겨져 나갔다.
그리곤 오랑우탄과 거미가 결합한 듯, 팔이 여섯 달린 근육질의 마물이 모습을 드러났다.
“휴, 살 것 같구만. ‘세계의 저항’이 뭐라고 이렇게 귀찮은 짓을 시키는지. 하여간 오발탄, 그 녀석 말을 믿는 게 아니라니까. 쯧쯧쯧. 저봐, 해결한다더니 저놈 그대로 쫓아온 거 봐.”
리를 보며 혀를 차는 노파.
그러다 귀찮다는 표정으로 리를 향해 지팡이를 ‘부웅’ 휘둘렀다.
그러자 지팡이 끝에서 검은 막대가 분리되어 나오더니, 리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조각은 순식간에 갈가리 분해되어, 수백 개의 날카로운 침으로 변했다.
‘크아앙!’
동시에 탈피한 ‘거미원숭이’들도 양쪽에서 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 마리는 당장이라도 목덜미를 물어뜯을 듯, 개처럼 송곳니를 드러낸 채 달려들었고,
다른 한 마리는 화염이 일렁이는 방망이를 치켜든 채 리를 향해 뛰어올랐다.
얼른 양팔을 뻗어 두 원숭이를 공중에 멈춰 세우는 리.
원숭이를 움직여 침을 막으려 했지만, 그러기엔 침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젠장, 동시에 셋을 어떻게...”
인상을 쓰며 어찌할까 머리를 굴리는데, 순간 ‘저승 4가지 힘에 관하여’에서 읽었던 내용이 머리를 스쳤다.
‘진짜 될까?’ 의심스럽긴 했지만,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에이 씨 모르겠다, 진파(震波)!”
리는 얼른 한쪽 무릎을 꿇으며 바닥에 손을 짚더니, 힘주어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땅바닥이 꿀렁하며 1m 넘게 일어나더니, 리를 중심으로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원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빠르게 날아오던 침들은 땅바닥 파도에 모조리 처박혔고, 두 마물은 땅바닥 파도에 부딪혀 중심을 잃었다.
“천압(天壓)!”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양팔을 치켜들며 리가 외치자,
하늘에 집채 만한 정육면체 공기 덩어리 세 개가 만들어지더니, 마물들의 머리 위로 그대로 내리 꽂혔다.
‘크아악!’
정육면체 공기 덩어리에 짓눌려 고통스러워하는 거미원숭이들.
피를 토하며 버둥거리더니, 이내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지팡이를 치켜들어 공기 덩어리를 막던 노파도, 압력이 점점 거세지자 더는 버티지 못하고 빠르게 몸을 뒤로 뺐다.
‘쿠쿵’ 공기 덩어리가 바닥에 떨어지며 땅을 흔들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리를 노려보는 노파.
“히야. 너, 강하구나.”
그때, ‘슈웅’ 소리와 함께 멈춰진 시간이 풀렸다.
진파와 천압으로 난장판이 된 운동장을 보고 관객들이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며 놀라는 리.
“야... 이게 진짜 되네.”
혼잣말하며 고개를 끄덕거리던 리는 주먹을 불끈 쥐더니, 노파를 노려보며 인상을 썼다.
리의 눈이 선명한 초록빛으로 밝게 빛났다.
“중간계에 자네 같은 사람이 있다니. 재미있구나.”
혼자 썩소를 짓던 노파는, 지팡이를 바닥에 꼽더니 웅얼웅얼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어깨에 둘러맨 스카프가 화염처럼 출렁이더니, ‘화르륵’ 거대한 불이 그녀의 등 뒤로 솟아올랐다.
노파가 양팔을 벌리며 화염 속으로 뒷걸음질 치자 화염이 그녀를 감싸며, 4미터가 넘는 커다란 화염 골렘이 만들어졌다.
‘끼야아아악!’
거대한 화염 골렘을 본 관객들이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고,
그게 거슬렸는지 골렘이 그들에게 화염 덩어리를 던졌다.
“안돼!”
리가 얼른 팔을 뻗어 화염 덩어리를 공중에 멈춰 세우자, 기다렸다는 듯 골렘이 리를 향해 돌진했다.
‘쿵, 쿵, 쿵!’
마치 럭비의 보디체크라도 하듯, 둥그렇게 부풀어 오른 어깨를 앞세워 빠른 속도로 달려드는 화염 골렘.
순간 뒷걸음질 쳐 하늘로 뛰어오른 리는,
손을 꺾어 화염 덩어리를 땅바닥에 박아버리곤,
두 주먹을 가슴 앞에서 맞부딪혔다.
“중옥(重獄)!”
리가 공중에서 주문을 외우자,
화염 골렘의 발이 갑자기 땅바닥으로 쑤욱 들어가 박히더니,
골렘을 중심으로 공간이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왜곡된 오목 렌즈로 바라보듯,
점점 더 작게 일그러지던 화염 골렘의 몸은, 이내 ‘와지직’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크아악!”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는 화염 골램.
리는 바닥에 내려서더니 다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들었다.
“천압! 천압! 천압!”
일그러진 화염 골렘의 몸 위로 또다시 거대한 공기 덩어리가 내리 꽂혔다.
‘쿵, 쿵, 쿵’
삼중 공기 덩어리에 연이어 짓눌리는 화염 골렘.
고통에 신음하던 화염 골렘은, 이내 변신이 풀려 노파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동시에 중옥의 일그러짐도 사라졌다.
“휴우우.”
팔을 내린 채 널브러진 노파에게 천천히 다가가는 리.
노파는 쿨럭거리며 입에서 피를 토해내는 게, 싸움은 이미 끝난 듯 보였다.
“삐삐삐삐삐!”
그때, 워치에서 ‘세계의 저항’ 알림이 시끄럽게 울렸다.
예상했다는 듯 담담히 알림을 끄는 리.
노파의 얼굴 옆에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곧 세계의 저항이 시작될 거야.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얼른 끝내자고. 자, 니들은 정체가 뭐지? 왜 오발탄이 너희를 돕는 거지?”
“으... 자네... 쿨럭쿨럭 정말 강하구나.”
‘쿠우우와아앙!’
그때 천둥소리 같은 크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뭔가가 하늘 위로 ‘슈웅’ 지나갔다.
“딴소리하지 말고. 왜 오발탄이 너희를 돕는 거냐고!”
리가 멱살을 잡자, 게슴츠레 뜬 눈으로 리를 올려다보는 노파.
그러다 갑자기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파란색 액체가 새어 나와 볼을 타고 흘렀다.
“압스... 드... 에...”
파래진 입술로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노파.
“뭐라고?”
알아듣기 힘들게 웅얼거리자, 리가 몸을 기울여 노파에게 귀를 가져다 댔다.
“압소시온, 데, 에널쟈!(absorcion de energia)”
온몸을 쥐어 짜내듯 소리치는 노파.
그러자 노파가 내뿜은 음파가 리의 몸을 훅 덮쳤다.
순간, 마치 몸과 영혼이 분리되듯, 리의 초록 에테르가 몸에서 훅 분리되어 밀려 나왔다.
그러더니 기다렸다는 듯 노파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쿠우우와아앙!’
그때, 또다시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뭔가가 하늘 위로 빠르게 지나갔다.
미사일을 양 날개에 장착한, 전투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