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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 추적

by 무딘

중간계, 감찰부 데이터베이스 안.


우주처럼 새까만 공간 속에서, 수천, 수백의 하얀 문자들이 격자 모양의 길을 따라 빠르게 좌우로 흘러가고 있었다.


좌우는 물론 상하로 이어진 글자의 행렬은,

공간이 마치 수천 개의 ‘큐빅’으로 다닥다닥 연결된 것처럼 보이게 했다.


격자 중간에 두둥실 떠서, 하얀 스크린을 들여다보는 한 남자.

남색 한복 위에 붉은 두루마기를 덧대 입은, 감찰사 도일이었다.


그가 손짓을 할 때마다 얼굴과 기사, 동영상이 나열된 화면이 다음 화면으로 휙 전환됐다.


“이 인간 진짜 재미있네.”


‘촤악’ 부채를 펼쳐 가볍게 부치는 도일.

부채 바람에 격자를 이루며 이동하던 글자들이 곡선 형태로 밀려났다.


“아이씨, 여기서 부채질하지 말라고! 에러 난다고!”


위쪽에서 작업하던 ‘자료 담당자’가 도일을 내려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도일이 부채를 얼른 접어 양 손가락으로 잡은 채, ‘장화 신은 고양이’ 마냥 눈을 깜빡거렸다.


“늦게 왔으면 얼른 검색이나 하고 꺼질 것이지. 아휴, 저 도라이 진짜, 동기만 아니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차는 자료 담당자.

옆 공간으로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멋쩍은 듯 씩 미소를 지어 보이는 도일.

그러다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싹 지우더니, 오른쪽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러자 그의 오른쪽 눈이 하얗게 변했고, 고글처럼 증강현실 화면이 눈앞에 나타났다.


손가락을 아래로 내려 리의 얼굴을 찾는 도일.

‘연락’ 버튼을 누르자 잠시 뒤 사진이 사라지고 리의 얼굴이 나타났다.


“네, 감찰사님.”

“어이, 초짜! 천 년 짜리 훈장 달게 생겼던데? 축하해.”

“네, 밀어붙이라는 감찰사님 말을 ‘믿! 고! 따! 른!’ 덕분이죠.”

“에헤이, 안 좋은 일만 생기면 나 때문이래. 그래도 ‘분실신고 안 됐다’고 지적하라는 건 효과적이지 않았어?”

“글쎄요. 뭐, 그럭저럭. 근데 무슨 일이시죠? 우리 팀이 징계를 피하려면, 제가 지금 해야 할 게 많아서. ”

“한결같이 배은망덕하긴. 너그러운 나니까 이해한다, 알았지? 자, 내가 오발탄 이 인간에 대해 뒷조사를 좀 했거든. 그런데 재미있는 게 나왔어. 최근 실종된 환생 관리자들이 하나같이 오발탄과 관련이 있더라고.”


자기도 모르게 부채를 ‘촤악’ 펼쳐 부치려다가, 순간 동작을 멈추는 도일.

멀리 자료 담당자 눈치를 보며, 은근슬쩍 부채를 접었다.


“관련이 있다고요?”

“그래. 오발탄 밑에서 일했거나, 오발탄이 일을 배정했거나, 오발탄에 의해 다른 팀으로 넘겨졌거나. 심지어 두 건에선 ‘비인가 환생 시도’가 감지됐다는 신고도 있었어.”

“흠... 역시. 오발탄이 배후에 있었군요.”

“더 재미있는 건, 그가 최근에 금운신 계열 ‘석공’들과 자주 접촉했다는 거야?”

“석, 석공이요?”

“그래 석공. 아, 석공이 뭔지 모르나? 아휴, 이 초짜를 어떡하니 진짜. 금운신의 석공들은 ‘명천계, 암형계, 중간계, 환생계, 분열계’, 5계의 구조를 만들고 보수하는 엔지니어들이야. 각 계의 손상된 부분을 수리하기도 하고, 각 계를 연결하는 포털을 놓기도 하지. 네가 맨날 이용하는 환생의 문도 금운신의 석공들이 만든 거야.”


그때, 자료 담당자가 다가와 도일의 어깨를 건드렸다.

인상을 쓰며 ‘전화할 거면 나가서 해!’라고 짜증스럽게 속삭였다.

다시 한번 씩 웃어 보이는 도일.

때릴 듯 주먹을 들어 보이며 돌아서는 자료 담당자.


“환생 관리사가 뭐 하러 석공들을 만나겠어? 뭐, 고칠 것도 아니고. 오발탄이 굳이 석공들과 자주 만났다는 건, 그가 다른 계의 인물들과 접촉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지.”

“다른 계라면... 마물?”

“그래, 마물을 포함해서. 자, 이제 진짜 본론! 오늘 술시(22시~23시) 진행되는 환생건이 하나 있는데, 이걸 누가 맡긴 줄 알아?

“오발탄이군요!”

“빙고! 아주 돌덩이는 아니구만. 네가 바짝 붙어서 감시해 봐. 네 말대로 이전 작업에서 실패했으니, 이번에 분명 만회하려 들 거야. 집에서부터 추적하면 눈에 안 띄고 좋을 테니까... 가만있어 봐라, 집 위치가 어디냐면...”

“알고 있어요.”

“알아?”

“네, 뭔가 나오면 또 연락드리죠. 그럼.”


‘띠릭’ 도일의 답도 듣지도 않은 채 끊어버리는 리.

도일이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러다 눈알을 위로 치켜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집이 어딘 줄 어떻게 알지?”


*


잠시 고글을 벗는 리.

눈을 비비며 하늘을 보자, 밤하늘 가득 커다란 보름달이 떠 있었다.


까마득히 높은 하늘 위에 둥둥 뜬 채, 중간계를 내려다보는 리.

그의 손엔 ‘저승 4가지 힘에 관하여’라는 파피루스가 펼쳐져 있었다.


리의 시선 끝으로 커다란 ‘암형문’이 보였고,

그 옆에 둥그런 도넛을 층층이 쌓아 올린 것 같은, 8 자 모양의 건물이 보였다.

조금 전까지 오발탄의 위치 정보가 깜빡거리던, 환생 관리자 숙소였다.


*


‘촤락!’


커튼을 조금 걷어 창밖을 이리저리 살피는 오발탄.

늦은 저녁이라 그런지 밖은 인적 하나 없이 조용했다.


커튼을 닫고 거실 중앙으로 이동하는 오발탄.

탁자 위에 켜진 초를 ‘훅’ 불어 끄자, 연기가 천천히 사람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좀 전에 출발했다고 연락 왔어. 나도 지금 출발할 테니 눈에 안 띄게 잘 숨어 있으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회색 연기.

오발탄이 손을 좌우로 흔들어 연기를 흩어버렸다.


책상으로 다가가 한쪽에 놓인 파피루스를 펼쳐보는 오발탄.

별 정보가 없는지 입을 비죽거리며 휙 던져버렸다.

그리곤 의자에 걸린 외투를 걸치며 숙소를 빠져나왔다.


숙소 밖으로 나와 고개를 들어보니, 커다란 달이 밤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옆으로 멀리 ‘천계의 성’이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다.

달 옆에 자그마한 점 같은 게 눈에 띄긴 했지만, 뭔지 잘 보이진 않았다.


“달에 위성 같은 것도 있었나. 퉷!”


바닥에 침을 뱉은 오발탄은, ‘휘이익’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이히힝’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날개를 단 황토색 말이 날아와 오발탄 앞에 멈춰 섰다.


말의 얼굴을 몇 차례 쓰다듬고는 능숙하게 말에 올라타는 오발탄.

고삐를 당기자, ‘휙’ 말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말이 내뱉는 콧김 너머로 중간계 동쪽, 환생의 숲이 보였다.


“이 짓도 이제 몇 번 안 남았다. 조금만 버티자고 페가.”


날쌔게 날아다니는 말 덕분에 순식간에 환생에 숲으로 도착한 오발탄은, 입구 옆 공터에 천천히 내려섰다.


말고삐를 나무에 묶은 그는, 주위를 한 바퀴 쓱 둘러봤다.

‘찌르르륵, 찌르르륵’ 귀뚜라미 소리 말고는 온 사방이 죽은 듯 고요했다.

‘흥’ 간지러운 듯 코를 문지른 오발탄은, 환생의 숲으로 종종거리며 뛰어 올라갔다.


‘쿵!’


오발탄이 환생의 숲으로 막 들어선 그때, 하늘에서 검은 형체가 하나가 숲 앞으로 내려섰다.


‘이히힝’


놀란 말이 앞발을 잠시 치켜들었다 내리며, 짜증스럽게 울었다.


*


‘샤아악, 샤악’


대나무 잎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숲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는 오발탄.

환생문 광장에 들어서자 변함없이 웅장한 자태의 환생문들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킁’ 콧방귀를 뀌며 레이어 워치를 들여다보는 오발탄.


“시간상, 나올 때가 됐는데...”


오발탄이 천천히 환생문 쪽으로 다가가는데,

아니나 다를까 중간 열의 환생문 하나가 ‘철컥’ 열리더니, 거기서 고글을 쓴 환생 관리사가 빠져나왔다.


‘휴우우’ 긴 한숨을 내쉬며 고글을 벗은 환생 관리사.

어깨를 만지작거리며 걸어 나오다, 오발탄을 발견하곤 ‘흠칫’ 놀랐다.

갑작스레 빌런을 만난 충격이 컸는지, 그는 문을 닫는 것도 잊어버렸다.


“어! 선배님. 여긴 무슨 일로. 혹시 제가 무슨 실수라도...”

“아냐, 아냐. 그냥 볼 일이 좀 있어서. 문은 내가 닫을 테니, 어여 가봐.”

“아... 그래요? 그럼... 고맙습니다.”


쭈뼛거리며 오발탄을 스쳐 지나가는 환생 관리사.

오발탄답지 않은 친절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나가는데, 순간 오발탄이 그의 목을 향해 당수를 날렸다.


“컥!”


파란 검기가 실린 오발탄의 일격에, 관리사의 목이 댕강하고 잘려 나갔다.

머리를 잃은 그의 몸은 맥없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가가, 관리사의 몸을 이리저리 뒤지는 오발탄.

그의 장비 쌕에서 에메랄드빛 열쇠를 꺼내 들었다.


“아이 씨, 계속 이렇게 할걸. 감찰사들 때문에 내걸 줬더니, 어디 찐따 같은 놈이 다 엉겨 붙고... 퇫!”


에메랄드빛 열쇠를 움켜쥔 오발탄은, 관리사의 레이어 워치도 풀어 손에 쥐었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발탄! 잠깐!”


그때, 좁은 숲길에서 그림자 하나가 광장 쪽으로 걸어 나왔다.

고글을 목에 걸친 환생 관리자, 리였다. 그의 눈빛은 옅은 초록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당신, 이 정도로 최악이었어?


바닥에 널브러진 환생 관리사의 머리를 보고 리가 고함을 질렀다.


“하, 뭐야, 날 미행한 거야? 찐따 주제에 진짜 가지가지한다. 오케이, 잘됐어. 지난번에 진 빚도 있고 하니, 내 제대로 갚아주지.”


외투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는 오발탄.

그러자 리가 바로 손을 앞으로 뻗어, 그를 공중에 붕 띄웠다.

공중에 뜬 채, 몸을 움찔거리는 오발탄.


“이런, 씨, 또.”


손을 뻗은 채 천천히 다가와 오발탄을 올려다보는 리.


“증인도 있고, 이렇게 증거도 있으니, 이젠 누명 따윌 씌우진 못하겠지. 자세한 이야기는 감찰사 도일과 나눠보자고.”


왼손으로 목에 걸쳤던 고글을 다시 쓰고, 감찰사 도일의 연락처를 검색하는 리.


‘퍽!’


그때, 숲에서부터 검은 형체가 곡선을 그리며 튀어나와, 그대로 리의 몸을 들이받았다.

‘헉’ 엄청난 충격에 숲길 쪽으로 날아가 뒹구는 리.


리에 부딪히며 위로 솟구쳐 오른 검은 형체는, 빙그르르 백 덤블링을 하며 바닥에 내려섰다.

발목까지 오는 긴 가운을 두른 남자의 모습이었는데, 머리카락과 눈, 코, 입이 기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리가 날아가며 경직이 풀리자, 오발탄의 몸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내가 다가와 그를 일으켜 주려 하자, 신경질적으로 손을 뿌리쳤다.


“저 녀석 아직 살아있다. 원하면 내가 대신 죽여주고.”

“니 거나 잘해. 내 뒤는 내가 닦을 테니까. 저기 열린 문이다. 어서 꺼져!”


일어서며 사내에게 열쇠와 레이어 워치를 건네는 오발탄.

안쪽 주머니에서 하얀 알갱이 몇 알을 꺼내더니, 입에 집어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그러자 오발탄의 눈이 새파랗게 타올랐다.


“풋, ‘천계환’ 따위에 의지하면서 쓸데없는 자존심은.”


열쇠와 워치를 받아 든 사내는, 좀 전에 환생 관리자가 나왔던 문을 향해 돌아섰다.

그때, 사내의 뒤에서 엄청난 바람이 불어오며 대나무 잎들이 일제히 흔들렸다.


“둘 다 스톱!”


소리를 듣자마자 뛰기 시작하는 사내.

리가 휙 뛰어올라 오발탄과 사내의 중간에 내려섰지만, 사내는 어느새 문 속으로 사라져 버린 뒤였다.


“뒈져 버렷!”


순간, 바로 리에게 달려들어 당수를 날리는 오발탄.

아까보다 1미터는 더 길어진 반달 모양의 검기가, 리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얼른 몸을 옆으로 돌려 검기를 피한 리는, 이번엔 양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그러자 오발탄의 몸이 위로 훅 솟아올랐다.


그의 몸이 뜨자마자 곧장 손바닥을 아래로 내리는 리.

그러자 오발탄의 몸이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크헉!”


비명을 지르는 오발탄.

리는 다시 오발탄을 공중으로 띄우더니 더 빠른 속도로 바닥에 패대기쳤다.

2번, 3번, 같은 동작을 반복하자, 버둥거리던 오발탄은 물에 젖은 수건처럼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제, 제발, 그만!”


오발탄이 자지러지듯 소리치자, 내리치다 말고 동작을 멈추는 리.


“저거, 마물 맞지! 당신이 마물 끌어들인 것 맞지?”

“쿨럭, 쿨럭, 너, 너야말로 뭐야. 이상한... 쿨럭, 힘을 다 쓰고.”


입에서 피를 토하며 말하는 오발탄.


“마물에 대해서나 털어놔. 당신 암형계의 스파이 맞지?”


다시 오발탄의 몸을 하늘로 띄우며 묻는 리.


“쿨럭, 알았어! 알았다고. 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쿨럭, 가족들이 마물에게 볼모로 잡혀있다고.”

“볼모...?”

“쿨럭쿨럭, 그래. 볼모.”


천천히 오발탄을 바닥에 내려놓는 리.

오발탄이 가슴 쪽 옷깃을 부여잡은 채 연신 기침을 해댔다.


‘볼모로 잡혔다고? 오발탄, 이 자도 피해자란 말인가? 그럼 진짜 범인은 누구지?’


인상을 쓰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드는 리.


“아, 몰라. 볼모든 뭐든 난, 모르겠어. 자세한 건 감찰사 도일과 이야기하라고.”


리는 다시 고글을 고쳐 쓰고 도일의 연락처를 검색했다.

그때, ‘빠지직’ 소리와 함께 눈을 뜰 수조차 없을 정도로, 엄청난 섬광이 눈앞에서 터졌다.

오발탄이 주머니에서 섬광환(閃光丸)을 꺼내 터뜨린 것이었다.


“으윽!”


고개를 돌려 빛을 피하는 리.

잠시 뒤 실눈을 뜨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또 다른 환생문을 여는 오발탄의 실루엣이 보였다.


“이런, 멈춰!”


얼른 손을 뻗어 그를 멈추려 했지만, 오발탄이 잽싸게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손으로 반쯤 눈을 가린 채, 뒤늦게 문을 향해 뛰는 리.

손잡이를 붙잡고 돌려봤지만, 단단히 잠긴 듯 열리지 않았다.


“이런 망할!”


홧김에 세차게 발을 구르자, 땅바닥이 꿀렁거리며 마치 파도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손잡이를 붙들고 짜증스럽게 흔드는데, 옆쪽에 ‘또 다른 환생문’이 열려 있는 게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에 마물이 들어갔던 그 문이었다.


순간, 얼마 전 ‘비인가 환생 시도’ 때, 공중으로 흩어져 사라지던 영혼의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문으로 뛰어들던 괴상한 남자의 뒷모습도 겹쳐졌다.


“환생 영혼이 위험해!”


오발탄이 들어간 환생문 손잡이를 붙든 채, 열려있는 환생문을 노려보는 리.


잔뜩 눈썹을 치켜세운 채, 두 문을 한 번씩 번갈아 쳐다봤다.


“젠장!”

어금니를 ‘으득’ 깨문 리는, 이내 열려 있는 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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