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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 용의자

by 무딘

“뭐여! 야! 야! 워디 가는겨! 야! 쟤, 왜 저런댜!”


일권의 애타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성큼성큼 오발탄에게 다가가는 리.

후배를 혼내느라 한창인 오발탄의 책상 옆에 우뚝 멈춰 섰다.


뒷짐을 진 채 혼나던 후배가 리를 흘깃 보자, 이를 눈치챈 오발탄이 고개를 돌려 리를 봤다.

오발탄의 얼굴은 이미 화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넌, 뭔데? 뭐, 할 말 있어?”


리는 장비 쌕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더니 오발탄의 눈앞에 내밀었다.

에메랄드빛이 영롱한 열쇠였다.

순간, 오발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으흐흠. 근데, 뭘 어쩌라고 이 새끼야!”


오발탄이 신경질적으로 열쇠를 쳐내려 하자, 손을 살짝 피한 리가 열쇠의 뒷부분을 꾹 눌렀다.

그러자 열쇠에서 레이저가 나오며, 책상 위에 글자가 나타났다.


‘열쇠 발급자 및 소유자 : 오발탄’


“제가 처리하는 환생 세계로 ‘비인가 환생자’가 들어왔어요. 화염견으로 변하는 ‘마! 물!’이었죠. 근데 그놈이 이 열쇠를 써서 환생체의 자물쇠를 열더군요.”


눈에 안 띄게 슬금슬금 다가오던 일권이, 리의 이야기를 듣고는 얼음처럼 그대로 굳어버렸다.

순간, 사무실이 나지막이 술렁거렸다.


“으흐흐흠. 어, 어라, 그, 그거 지난번에 내가 잃어버렸던 건데, 그게 왜 거기서 나왔지”


오발탄이 손을 뻗어 빼앗으려 하자, 다시 휙 손을 피해버리는 리.


“베테랑 환생 관리자가 열쇠를 잃어버리기도 하나요? 분실 신고도 전혀 안 돼 있던데요?


고개를 돌려 리의 시선을 피하는 오발탄.


“마물이 이 열쇠로 환생체의 자물쇠를 연 덕에, 환생하려던 제 영혼이 소멸했다고요! 어떻게 된 건가요? 왜 마물이 선배의 열쇠를 가지고 있죠? 설명해 주시죠. 설명해 달라고요!“


열쇠를 내민 채 리가 고함치자, 사무실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평소 과묵하던 리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감히 환생국의 최강 빌런 오발탄에게 대들다니.


침을 꿀꺽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는 오발탄.

관리자들의 눈이 일제히 그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흠, 어, 으흠. 글쎄... 그게 왜...”


잠시 턱을 문지르며 생각하는 척하는 오발탄.

그러다 눈을 부릅뜨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근데, 생각해 보니까, 이 자식이 지가 영혼을 소멸시켜 놓고, 죄를 누구한테 뒤집어 씌우려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리의 멱살을 움켜쥐는 오발탄.

바로 오른손을 뒤로 빼더니 리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악!”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유니.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다 천천히 실눈을 떠서 상황을 살피는데, 뜻밖에 리는 너무나도 멀쩡했다.

오발탄의 주먹이 리의 얼굴 앞에 멈춘 채, ‘부르르’ 떨고만 있었다.


“이, 씨... 이게!”


오발탄이 이리저리 힘을 써봤지만, 주먹은커녕 몸조차 움직여지지 않았다.


차렷 자세로 멈춰 선 리의 손등에, 어느새 두 줄의 검은 선이 나타나 있었다.

눈도 은은한 초록색으로 변해있었다.


“이, 이 새끼가, 죽을라고!”


순간 ‘우드득’ 뼈 으스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아악!’ 오발탄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곤 멱살을 움켜쥐던 손을 놓으며 뒤로 물러섰다.


자신의 오른손을 움켜쥔 채, 놀란 눈으로 리를 바라보는 오발탄.

분노와 공포가 뒤섞인 묘한 표정을 지었다.


“너 이 새끼. 감히, 감히 선배를... 니들도 다 봤지? 이 새끼가 내 손 비트는 거?”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오발탄.

유니가 티 안 나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꺼꿀이 너도 똑똑히 봤지?”

“에, 어, 저, 긍께...”


일권이 고개를 반쯤 기울이며 엉뚱한 곳을 바라봤다.


“지랄, 다 한 통속이지. 영혼을 소멸시킨 걸로도 처벌감인데, 감히 선배한테 폭력까지 써? 너 이 새끼, 넌 죽었어. 두고 봐, 내 피눈물 나게 해 줄 테니까.”


리에게 삿대질을 하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오발탄은, ‘쾅’ 후배의 의자를 걷어차며 자리를 벗어났다.


“에, 쩌그, 발탄 선배요, 쪼가 나 좀 보고 가소!”


일권이 엉거주춤 오발탄의 뒤를 쫓아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매몰차게 뿌리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오발탄.

문이 닫히자마자 ‘쾅’ 벽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뒷머리를 긁적거리는 일권.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그들에게 쏠린 사이, 리가 아무도 모르게 검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작은 단추 같은 게 날아와, 의자에 걸린 오발탄의 외투 속으로 쏙 들어갔다.


‘자, 이거. 위치 추적기야.’


도일의 목소리가 리의 귓가를 맴돌았다.



*****



환생계, 동양의 어느 야구장 안.


“야! 큰일 났어! 여기 또 이러네.”


외야 쪽을 점검하던 통통한 관리팀 직원이, 좌측 펜스 앞에서 잔디를 발로 밟으며 소리쳤다.

3루 쪽 불펜을 점검하던 다른 직원이 황급히 달려와 잔디를 들여다봤다.


“아, 미치겠네. 진짜 왜 이러는 거지?”


무릎을 꿇고 잔디 상태를 살피던 직원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외야 귀퉁이부터 잔디가 죽어, 대략 5미터가량이 부채꼴을 이루며 노랗게 말라 있었다.


“야, 진짜 큰일인데, 단장님 시찰 나올 시간 다 됐는데.”

“아, 씨,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네. 이쪽 잔디만 벌써 몇 번째 갈아엎은 거야. 이번엔 바꾼 지 2주도 안돼 이러네. 돌겠네, 진짜. ”


그때 3루 쪽 더그아웃에서 단장과 수행직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야, 왔다!”


경기장을 돌아보며 수행직원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는 단장.

그러다 외야 쪽 직원들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전기 카트를 타고 이들 쪽으로 이동했다.

죄라도 지은 듯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관리팀 직원들이 고개를 숙였다.


단장은 카트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무릎을 꿇더니 잔디 상태를 살폈다.

그러다 잔디 하나를 잡아 뜯더니 잔뜩 인상을 구겼다.


“아니! 내가, 내가 진짜!”


단장이 관리팀 직원들을 보며 고함을 지르려다가, 잔뜩 위축된 이들을 보고선 답답한 듯 가슴을 쳤다.

그러다 돌아서 괜히 수행직원을 향해 소리쳤다.


“아니, 잔디 관리 정말 이렇게 할 거예요? 이래 가지고 어떻게 WBB를 유치해. 얼마나 관리가 엉망이면 2주도 안 돼서 잔디가 다 죽냐고? 내일 WBB 진행팀이 답사 오기로 했는데... 아, 몰라. 장비서가 알아서 처리해요. WBB 진행팀을 구워 삼든, 잔디에다 초록색 락커를 뿌리든.”


신경질적으로 잔디를 던져버리며 카트에 올라타는 단장.

그의 곁에서 수행비서가 관리팀 직원들을 차갑게 쏘아봤다.


카트를 타고 점점 멀어지는 단장 일행.

그들을 지켜보며 관리팀 직원들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에이, 씨바 꺼. 자꾸 죽는 걸 우리 보고 어쩌라고.”


퉁퉁한 관리팀 직원이 노랗게 말라버린 잔디를 신발로 밟아대며 화풀이를 했다.


“쿵, 쿵, 쿵”


관리팀의 신발이 아슬아슬하게 검은 개미의 옆을 밟았다.

놀란 개미가 황급히 잔디를 헤치며 달아났다.


그러다 작은 땅굴을 발견하고는 얼른 그 안으로 숨었다.

발길질이 계속 이어지자, 몸을 돌려 굴속으로 들어가는 개미.


굴을 따라 빛이 미치는 곳까지 계속 내려가는데, 갑자기 주변이 ‘번쩍’하고 환해졌다가 바로 어두워졌다.


놀란 개미가 그대로 멈춰서 앞을 응시했다.

기다려도 별 변화가 없자 몇 걸음 더 내려가는데, 순간 또다시 앞이 환해졌다.

더듬이를 잔뜩 치켜세운 채, 뚫어져라 앞을 노려보는 개미.


개미의 앞으로 ‘커다란 눈’이 나타났다.

노란 눈동자가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눈꺼풀이 껌벅거릴 때마다, 동공에서 날카로운 번개가 지직거렸다.



*****



“아, 네, 옥상에 있습니다.”


환생 관리국 건물 옥상에서, 리가 도심을 내려다보며 답했다.


‘삐릭’, 통신이 끝나자, 고글을 벗어 목에 걸치는 리.

피곤한 듯 뒷목을 주물렀다.

하늘이 오늘따라 핑크빛 노을로 진하게 물들어 있었다.


“자, 여기.”


옥상으로 올라온 유니가 리에게 파피루스를 하나 건넸다.

리가 파피루스를 받아 펼치자, ‘저승 4대 힘에 관하여’라는 제목이 스르륵 나타났다.


“네 말대로 일권 선배가 보던 책도 있긴 한데, 이게 더 보기 편할 것 같아서.”


화면을 내리며 쓱 훑어보니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이라는 4가지 메인 챕터 아래,

‘기술의 형태’, ‘수련 방법’, ‘구현 방법’ 등이 동영상과 함께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필요하다니 주긴 하는데, 이런 건 봐서 뭐 하게. 감찰사나 사제들이 필요하지, 우리 같은 관리자들은 알아봐야 쓸 수도 없다고.”


유니가 주먹으로 리의 옆구리를 쿡 찌르자, 파피루스를 ‘촤르륵’ 말아 올리며 ‘씨익’ 웃어 보이는 리.

파피루스를 왼손 손바닥 위에 올리더니 유니 앞에 내밀었다.


‘어쩌라고?’라는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뜨는 유니.

리가 시선을 집중하자, 순간 파피루스가 손바닥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오오!”


동시에 오른손을 유니를 향해 펼치자, 이번엔 유니가 바닥에서 1미터쯤 붕 떠올랐다.

리의 손등에 예의 검은 두 줄이 나타나 있었다.


“우와악!”


허공에서 거꾸로 뒤집힌 유니가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다.

‘아차’ 싶었던 리는, 얼른 유니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리를 노려보는 유니.

그러다 검지 손가락으로 리의 눈을 가리켰다.


“그 눈! 그 초록색 눈! OJT때도 그러더니만 또 그러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기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리.


“설명하긴 좀 힘든데, 아무튼 지난번에 마물을 만난 뒤로 계속 이러더라고요. 물건을 붕붕 띄우고, 막 날아다니고.”

“막 날아다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리.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하다는 듯 리를 쏘아보는 유니.


‘글쎄. 에테르를 억누르는 무슨 결계 같기도 하고.’


그때, 관리국 의원이 목소리가 유니의 귓가를 스쳤다.


‘후다닥’ 달려와 리의 왼팔 옷깃을 들추는 유니. 5개의 회전형 자물쇠 중 하나가 사라지고 없었다. 유니는 인상을 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것 때문인가?”

“모르겠어요, 나도. 그래, 궁금해서 자세히 좀 알아보려고요. 내가 무슨 능력을 쓰는 건지. 나는 어떻게 이런 기술을 쓰는 건지.”


“쾅!”


그때 일권이 문을 박차며 옥상으로 뛰어들어 왔다.

그의 얼굴은 하얗게 사색이 되어 있었다.


“워매, 우린 다 망해부렀시야. 완전 망해부렀다고!”


일권이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잡아 뜯으며 파피루스를 내밀었다.

얼른 받아 들어 펼치는 유니.

리도 유니의 어깨너머로 파피루스의 내용을 함께 읽었다.


‘징계서.

징계 대상자 : 환생 관리 14팀

사유 : 영혼 소멸 및 사내 폭력.

징계 : 자격정지 6개월, 의무 복무 ‘천년’ 연장

기타 : 이의가 있을 시, 일주일 내 소명자료 제출 요망.

시효 : 자료 제출 없을 시, 징계 즉시 발효’


‘허걱’ 놀라며 입을 가리는 유니.


“오발탄, 그 염병할 인간, 고위직 사제 쪽에 끈이 있다더만, 빈말이 아니었나벼.

왐마, 천년이 뭐 단가 천년이... 그럼 그렇제, 내 주제에 천계는 무슨 천계여.”


일권이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리가 아무 짓도 안 한 거 관리자들이 다 같이 봤는데, 사내 폭력은 무슨 사내 폭력이래요? 어쩜 한쪽 말만 듣고 이런 징계를...”


유니가 신경질적으로 파피루스를 말아 올리며 짜증을 냈다.

갑작스러운 징계 소식에 리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오발탄의 반격을 예상하긴 했지만, 이렇게 세게 나올 줄이야.


한동안 말없이 각자 허공만 바라보는 세 사람.

‘후두둑’ 사자 독수리가 세 사람을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아...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근데 저를 징계하는 것까진 이해하겠는데, 왜 팀 전체에 징계가 내린 건지...”

“리의 복무기간에 따라 우리 복무기간도 달라지니까. 결국 우리는 팀 단위로 움직이게 돼 있어.”


풀이 죽은 리의 어깨를 토닥이는 유니.


“아야, 긍게 암만 억울해도 상의를 하고 뎀벼야지, 상의를! 글케 무턱대고 저질러 불면.”

“에이, 그게 어디 리의 잘못인가요? 마물이 들어왔다잖아요, 마물이. 그것도 오발탄의 키를 들고. 그것 때문에 영혼이 소멸했으면 그것부터 조사하는 게 맞지 않아요?”


눈에 쌍심지를 켠 채, 유니가 소리를 질렀다.

일권이 유니에게 뭐라고 대꾸를 하려다 말고, 그냥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우덜끼리 암만 이래 봐야 아무 소용없당께. 오발탄이 거시기 뭐 스파이란 증거라도 찾지 않음 모를까, 말싸움만 해가지고는 우덜이 고스란히 뒤집어쓰게 돼 있다고.”

“증거...라고요?”

“그랴, 증거.”

“리, 뭐 떠오르는 거 있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리를 바라보는 유니.

리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모습에 유니와 일권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증거가 있으면 된단 말이죠? 그럼, 찾으면 되죠. 증거를.”


목에 걸쳤던 고글을 다시 쓰는 리.

버튼을 누르자 훅 지도가 떠올랐고, 지도 끝 쪽으로 빨간 점이 깜빡거렸다.

오발탄의 외투에 몰래 넣었던 ‘위치 추적기’ 신호였다.


“암형문 근처에 8 자 형태의 건물이 보이는데, 그게 뭐죠?”

“8자형 건물? 그거 환생 관리자 숙소 같은데.”

“역시... 그럼, 저 잠시만 다녀올게요.”


목표를 정했다는 듯, 후다닥 옥상 난간을 향해 뛰는 리.


“응? 응? 워디, 워디로 가는겨? 계단은 쩌그, 쩌그 있는!!!”


순간 리가 옥상 난간 밑으로 훌쩍 뛰어내리자, 놀란 일권과 유니가 동시에 달려와 난간 밑을 내려다봤다.


바닥으로 떨어지나 싶던 리는 U자를 그리며 다시 하늘 위로 솟아오르더니, 그대로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는 두 사람.


“뭐여, 우덜이 저런 것도 할 수 있는가.”


일권이 놀란 표정으로 유니에게 묻자, 어깨를 으쓱거리는 유니.


“참말로 골칫덩이 맞구만. 골칫덩이 맞아.”


일권이 점이 되어버린 리의 뒷모습을 보며,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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