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토의 목숨을 없앤 것은 죄일 수 있겠지만, 이토의 작용을 없앤 것은 죄가 아닐 것입니다. 제가 재판에서 이를 죽인 까닭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저의 복이고, 이토가 살아 있을 때 이토에게 말하지 못한 것은 저의 불운입니다.”(<하얼빈>, 272p)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 <흑산>이 김훈 작품 세계의 가장 큰 산이라 생각했습니다. 여기에 <하얼빈>이라는 산 하나를 추가합니다. 그 산 정상에 걸 문장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 저 글을 꼽겠습니다.
작가는 책의 끝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이 작품을 쓸 때의 즐거움과 고통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이 세 단어가 다른 말들을 흔들어 깨우고 거느려서 대하를 이루는 흐름을 소설의 주선율로 삼고, 그 시대의 세계사적 폭력과 침탈을 배경음으로 깔고, 서사 구조는 역사적 사건의 전개에 따르되, 이야기를 강도 높게 압축해서 긴장의 스파크를 일으키자는 기본 설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 같은 토털 픽쳐total picture를 만드는 일은 글쓰는 자의 즐거움일 테지만, 즐거움은 잠깐뿐이고 연필을 쥐고 책상에 앉으면 말을 듣지 않는 말을 부려서 목표를 향해 끌고 나가는 노동의 날들이 계속되지만, 이런 수고로움을 길게 말하는 일은 너절하다.”
책을 덥고, ‘너절하다’란 단어를 한참 곱씹어 생각했습니다. 오랜만에 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아쉬워 아끼고, 아껴가며 읽었습니다. 영웅 안중근을 생각합니다. 곧 그가 하얼빈에서 총을 쏜 날이 돌아오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