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3/19까지
조선은 ‘기록덕후의 나라'입니다. 대표적인 기록물로 우리가 잘 아는 조선왕조실록이 있고요. 오늘 소개해드릴 의궤도 놀랄 만큼 집요하고도 성실한 기록물인데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외규장각 의궤, 그 고귀함의 의미>는 기록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역사 지식 없이도 흥미롭게 보실 수 있는 전시입니다. 오늘 편지에서는 이 전시를 좀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배경지식을 담았습니다.
의궤는 조선시대 때 국가 공식 행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국가 공식 행사를 치르기로 결정하면 이를 준비하는 ‘도감’이라는 부서를 구성하는데요. 오늘날의 TF팀과 비슷합니다. 의궤는 바로 이 TF팀인 도감에서 국가 공식 행사를 치른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한 보고서라고 할 수 있어요. 이렇게만 설명하면 의궤의 가치와 양을 가늠하기 조금 어려울 수도 있겠는데요.
우선 의궤에 담긴 집요함이 놀랍습니다. 행사 준비에서부터 마칠 때까지의 모든 과정을 글과 그림으로 매우 철저하게 기록했거든요. 행사에 쓰인 물건들, 행사 당시 장면 등을 묘사한 그림을 보면 모두 놀라실 겁니다. 심지어 행사를 준비한 사람들의 이름도 엔딩 크레딧처럼 모두 기록되어 있어요.
행사 당일 현장 모습은 반차도(班次圖)라는 이름의 그림으로도 남겼습니다. 신하들이 차례대로 늘어서 있는 그림인데요. 수천 명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놀라운 건 이들의 복장과 손에 들고 있는 물건, 주변 풍경, 심지어 표정까지 세밀하게 묘사했다는 점입니다. 그림의 특성상 좌우로 긴 두루마리 형태로 제작했는데요. 길이가 10m 이상 되는 그림도 있습니다.
외규장각은 의궤를 보관하던 장소입니다. 어람용(御覽用) 의궤를 따로 보관하기 위해 정조 시기에 지은 건물이에요. 어람용이란 임금만 볼 수 있는 일종의 '국왕 독점 리미티드 에디션 의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대 최고 실력을 갖춘 화가와 장인을 동원해 최고급으로 제작한 책 중의 책이죠. 글씨 하나를 쓸 때도, 종이를 묶기 위해 실을 두를 때도 온 정성을 다했을 겁니다. 이 과정을 장황(粧䌙 책을 단장粧해 줄로 동인다䌙라는 뜻)이라고 하는데요. 기록을 목적으로 만든 의궤가 작품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귀한 보물에 시련의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외규장각이 완공된 지 80여 년이 지난 1866년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범한 ‘병인양요’가 벌어졌는데요. 이때 강화도에 상륙한 프랑스 군대가 외규장각에 있던 ⟪의궤⟫를 포함해 각종 서적들을 약탈해 간 겁니다. 어람용 ⟪의궤⟫ 제작과 관리에 공을 들인 조선왕실 입장에서는 황망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병인양요 이후 조선에는 급변하는 국제정세 밀어 닥쳤고요. 프랑스 군대가 자국으로 가져간 ⟪의궤⟫도 마치 거친 물결에 휩쓸려가듯 행방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휴전 직후인 1955년 젊은 역사학도 박병선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습니다.프랑스에서 역사학과 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박병선 선생은 이후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근무했는데요. 1967년 선생은 도서관 자료에서 ‘1867년 (프랑스)해군이 기증한 책 340여 권이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내용을 확인했습니다. 선생은 이 책들이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에서 약탈해 간 자료라는 사실을 직감했죠. 하지만 도서관을 샅샅이 찾아도 이 책들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시 시간이 한참 흘러 1978년이 되었습니다. 박병선 선생은 프랑스국립도서관 분관 창고 직원에게 한자로 된 책을 본 적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바로 창고로 달려가 확인해보니 과연 그곳에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외규장각 도서가 있었던 거죠. 병인양요 이후 100년이 훨씬 지나 우리 문화재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박 선생은 바로 언론과 한국대사관에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도서관의 비밀을 외부에 알렸다는 이유로 선생은 일을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박병선 선생은 비록 도서관은 나와야 했지만, 이제 개인 자격으로 도서관에 방문해 외규장각 책들의 차례와 내용을 파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국 땅에서 우리의 보물을 발견한 이가 역사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이 다행이었다고 할까요. 박 선생은 이때의 연구를 바탕으로 1985년 ⟪조선조 의궤⟫란 책을 냈습니다.
1992년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위한 한국과 프랑스 사이 협상이 시작했지만, 금세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한국으로 외규장각 자료가 돌아온 건 다시 세월이 한참 흐른 2011년에 일입니다. 병인양요 때 약탈 당한 후 145년만의 귀환이었죠.
2011년 프랑스에서 ⟪의궤⟫가 돌아온 직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45년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라는 제목으로 전시가 열린 적이 있습니다. 올해 다시 ⟪의궤⟫를 주제로 전시를 개최한 것은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해요.
[그림01]
⟪장헌세자영우원천봉도감의궤⟫에 수록된 <반차도> 중 일부입니다. 이름이 어렵게 느껴지실 텐데요. 양주 배봉산에 있던 장헌세자의 묘인 ‘영우원’을 수원으로 옮기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입니다. 장헌세자는 우리가 ‘사도세자’로 알고 있는 정조의 아버지입니다. 이 행사는 1789년(정조 13년) 7~10월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자리에 아버지의 묘를 옮기고 싶어 했던 정조의 뜻에 따라 추진되었습니다.
[그림02, 03]
장헌세자의 묘를 옮기는 의식은 국장과 같은 수준으로 치러졌습니다. 행렬의 2/3쯤 되는 지점에 국장 때 쓰던 대여(大輿 : 국장 때 사용하는 큰 상여)가 배치된 점을 보면 알 수 있어요. 그림에서 보듯 수십 명의 상여꾼들이 장헌세자의 대여를 들었는데요.(그림02) 대여 위에는 앞소리(상여를 메고 갈 때 부르는 의식가儀式歌, 선소리라고도 합니다.)를 하는 앞소리꾼(또는 선소리꾼)이 올라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앞소리꾼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네요.(그림03) 무슨 일일까요. 대여를 이동하는 상여꾼들이 자기 지휘에 맞춰 소리를 잘 따라하는지, 또는 딴짓을 하거나 힘들어 하는 사람은 없는지 살피는 것 같습니다. 누구라도 한 명 딴청을 부리다 걸렸다면 혼이 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림 04, 05]
대열의 가장 뒤쪽을 호위하는 ‘후상군(後廂軍)’입니다.(그림04) 기록에 300명의 군사가 이날 참여했다고 하는 데요. 그림을 살펴보다 재미있는 장면을 발견했습니다. 줄을 맞추고 선 군사들이 무기로 보이는 물건을 같은 방향으로 들고 서 있는데요. 맨앞 오른쪽 세 명은 뒤에 선 동료들과는 다르게 들고 있어요.(그림05) 어떤 이유일까요. 아무리 봐도 무기의 방향이 틀렸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군대는 ‘칼 같은 각’을 제일로 치는 데 말이죠. 이 대열엔 정조 임금도 함께 했다고 전합니다. 지엄한 국왕이 계신 국가 행사인데도 군기가 조금 빠진 군사가 참여했던 걸까요. 긴 행렬 마지막쯤에 서 있으니 누가 보기라도 하겠어라는 심정으로 방심했던 것 같습니다. 말을 타고 가는 지휘관이 뒤로 돌아봐 불호령을 내리기 전에 뒤에 선 동료가 얘기라도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의궤(儀軌)’라는 단어를 다시 살펴봅니다. 저는 뒷 글자 ‘바큇자국 궤(軌)’에 중요한 의미가 담겼다고 생각해요. 국가의 중요한 행사를 치르는 사람으로서 후대에 비슷한 프로젝트를 준비할 누군가를 위해 남긴 바큇자국 같은 마음을 심은 글자로 여겨져서요. 앞선 사람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그 길을 따라가는 뒷 세대 사람도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록과 자료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