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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궁궐을 걷는 시간 Feb 23. 2023

추천 전시 <조선, 병풍의 나라2>

아모레퍼시픽미술관(~4월 30일)

입춘을 하루 앞두고 전시를 보고왔습니다. 어느 절기 사이에 있었을 세상 풍경이 속절없이 잡혀 병풍 그림으로 걸려 있더라고요. 시간이 가고, 계절이 바뀌는 자연의 순리가 옛날 사람들도 분명 아쉬웠던지 ‘시들지 않는 꽃’과 ‘지지 않는 달’과 ‘녹지 않는 눈’이 거기 있었습니다. 당장의 눈앞 장면을 붙들어 병풍에 가둬 놓은 걸 보면 말이죠.

아직 전시 기간이 넉넉히 남아 있지만, 관심 있으시다면 서두르는 게 좋을 듯해요. 인기 전시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거든요.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병풍을 소개합니다. 오직 임금만이 소유할 수 있었던 병풍이에요. 전시장 방문 팁도 전합니다.



방 안에 고이 모셔둔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세계, 병풍


왜 많은 이들이 시간과 비용을 내면서 영화를 볼까요. 가깝게는 바로 이웃의 이야기, 멀게는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사건, 심지어 아득한 곳에 있는 우주까지 보고 싶었기 때문 아닐까요. 스크린에 안에 펼쳐놓지 못하는 세상은 없으니까요.


옛 사람들이 병풍에 그림을 붙여 곁에 둔 이유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방 안에 앉아 있으면서도 세상을 향한 호기심을 달래기에 병풍 그림 만한 게 또 있을까 싶어요. 다양한 인간의 모습은 물론, 신과 (현실 또는 전설 속) 동물, 관념의 세계에서 현실의 풍경에 이르기까지, 병풍의 각 폭에는 우주 온갖 사물과 현상으로 가득합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스크린으로 영화를 즐기듯, 조선인들은 병풍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그림을 감상하며 방문 바깥의 세계를 상상했을 겁니다.



병풍의 가치는 단지 다양한 대상을 그려넣었다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2폭에서 12폭까지 이어지는 각 폭마다에는 이상적 세계를 향한 간절함을 담기도 했고(<일월오봉도>, <무릉장생도>), 인기 소설 속 주요 장면을 펼쳐놓기도 했으며(<구운몽도>, <삼국지연의도>), 국가 공식 행사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임인진연도>, <화성원행도). 활짝 핀 꽃의 모습이라든가(<홍백매도>), 지방과 세계지도(<평양성도>, <경기감영도>, <곤여전도>)를 담기도 했죠. 세상의 넓이가 그렇듯 병풍에 풀어 놓은 그림의 주제 또한 깊고, 넓고, 높았습니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병풍을 주제로 한 <조선, 병풍의 나라2>를 전시 중입니다. 50여 세계를 담은 작품 50여 점이 나왔습니다. 그중 가장 눈에 띈 병풍을 소개합니다. 전시를 더욱 즐겁게 볼 수 있는 몇 가지 팁도 함께 정리했습니다.


배경의 자리에서 무대의 주인공으로


<조선, 병풍의 나라2> 전시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 <일월오봉도 8폭 병풍>(이하, <일월오봉도>)이라고 하겠습니다.


<조선, 병풍의 나라2>에 전시 중인 <일월오봉도>


지금껏 궁궐을 수도 없이 갔지만 <일월오봉도>는 늘 저만큼 떨어진 채 있어 자세히 볼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림 앞에는 어좌가 놓여 있었으니 <일월오봉도>는 늘 퍼즐 한 조각이 맞춰지지 않은 것처럼 딱 의자만큼 가려진 채 보였거든요. 국립고궁박물관에도 <일월오봉도>를 전시 중이지만 가까이 접근해 볼 수는 없었고요. 이번 <조선, 병풍의 나라2> 전시는 <일월오봉도>를 말 그대로 코앞에 두고 볼 기회였어요. 대개 병풍은 조금씩 접어 세워두는데, 전시에 나온 모든 작품들은 어깨를 쫙 펴듯 완전 평면 형태로 설치했습니다. 덕분에 병풍 구석구석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죠.


사진01 창덕궁 인정전 실내에 있는 <일월오봉도>(왼쪽)와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 중인 <일월오봉도>(오른쪽)


궁궐 속 <일월오봉도>


<일월오봉도>는 해와 달, 다섯 봉우리, 폭포와 파도, 적송 등을 좌우 대칭 형식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고, 나라가 영원히 번영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그림에 담았죠. 그림 전체는 매우 엄숙한 분위기고, 푸른색과 붉은색 등을 이용해 약간 어두운 톤으로 그렸습니다. 


그림의 특성이 이렇다 보니 <일월오봉도>는 임금과 동급이었어요. 즉 그림이 곧 왕이었고, 왕이 있는 자리에는 항상 <일월오봉도>가 놓였습니다. 정확한 위치는 사진01에서 보는 것처럼 어좌 뒤였습니다. <일월오봉도>는 궁궐에 하나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임금이 평소 머무르며 업무를 보던 건물, 잠을 자던 방 등에도 사진01처럼 <일월오봉도>를 세워두었습니다.


국왕이 궁궐 밖으로 외출할 때도 <일월오봉도>를 가지고 나갔습니다. 행차 중 잠시 쉬거나 지방에서 행사를 관람할 때도 임금이 앉는 자리에는 어김없이 어좌를 놓고, <일월오봉도>를 세웠어요.


그림 속 <일월오봉도>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참여하는 큰 행사가 열리면 이 날을 매우 디테일하게  그림으로 기록해 남겼습니다. 이는 중요한 국가 기록물이자 예술적으로도 훌륭한 작품들이었어요. 디테일한 이 그림에는 당연히 참석자 모두를 그려넣었는데요. 보통 국왕은 그리지 않고 특정 물건을 그려서 위치만 표시했습니다. 그 물건이 바로 <일월오봉도>예요. 실제 사례를 보여드릴게요.


사진02 <화성원행도 8폭 병풍>


사진02번은 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 씨를 모시고 화성에 행차했을 당시를 기록한 <화성원행도 8폭 병풍>입니다. 그중 (오른쪽에서 왼쪽으로)다섯 번째 그림은 정조가 야간 군사 훈련을 참관하는 장면인 <서장대야조도>라고 하는 데요. 그림에 수많은 인물들을 세밀하게 그려넣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정조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이때 <일월오봉도>를 찾으면 이날 임금이 어디 앉아 있었는지를 알 수 있어요


사진03 <서장대야조도>(왼쪽)와 사진04 <서장대야조도> 속 <일월오봉도>(부분, 오른쪽)


사진04번을 보면 붉은색 의자(어좌)가 놓여 있고, 바로 뒤에 <일월오봉도>가 보입니다. 바로 이 곳이 이날 정조가 앉았던 자리예요. 찾기 편하도록 제가 사진03과 04번에 동그라미를 쳐놓았습니다.


사진05 <임인진연도 10폭 병풍>


병풍 하나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사진05번은 <임인진연도 10폭 병풍>입니다. 1902년 고종의 기로소(耆老所 : 나이 70이 넘는 신하를 대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 국왕은 70세 전에도 들어갈 수 있었음. 이때 고종의 나이는 51세.) 입소를 기념하는 잔치 장면을 기록한 그림인데요. 이 병풍에도 수많은 참석자들을 그려넣었지만 주인공인 고종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럴 때 <일월오봉도>를 찾으면 고종이 어디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겠죠. 사진06번을 보시면 어좌와 <일월오봉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진06 <임인진연도 10폭 병풍>(부분)


하나 더 말씀드리면, <서장대야조도> 속 정조의 어좌는 붉은색인데 반해, <임인진연도> 속 고종의 어좌는 노란색입니다. <임인진연도> 속 행사가 열렸던 1902년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입니다. 즉 고종의 신분이 왕이 아니라 황제였다는 거죠. 그러니 어좌도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이 된 겁니다.


이 글에서 설명한 <화성원행도 8폭 병풍>과 <임인진연도 10폭 병풍> 모두 이번 전시에 나와 있는 작품들입니다. 전시에 가시면 꼭 찾아보기를 추천해요. 


드라마 속 <일월오봉도>


그림의 특징이 이렇다보니 조선시대 왕실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한 드라마와 영화 장면을 보면 <일월오봉도>는 마치 주인공과 한 세트처럼 등장하고는 했습니다. 한 작품만 간단히 살펴볼게요.



영조와 이산(정조), 덕임 등이 등장해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2021년) 기억하시나요. 드라마에 중요한 문서 하나가 등장합니다. 영조가 손자 이산을 반드시 왕위에 올려주겠다고 약속한 내용이 담긴 문서였어요. 여주인공 덕임이 이산을 위해 몇 가지 단서를 바탕으로 이 문서를 찾아내는데요. 문서가 숨겨져 있던 장소가 바로 <일월오봉도> 안이었어요.




궁궐에서 <일월오봉도>만큼 중요 문서를 안전하고도 비밀스럽게 보관할 곳이 또 어디 있을까요. 임금의 뒷자리에, 그것도 병풍 안에 두었기 때문에 당연히 아무나 접근할 수 없었을 거예요. 드라마를 보면서 무척 흥미로운 설정이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위에 소개한 <옷소매 붉은 끝동>의 에피소드는 꾸며낸 이야기 같지만, 실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운데요. 영조는 신하 채제공을 불러 ‘임오년의 죽음엔 나도, 사도세자도 아무 잘못이 없었다.’라는 내용의 문서를 쓰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 문서를 정성왕후(영조의 첫 번째 왕비)의 위패를 올려놓은 방석 안에 숨겨 놓았죠. 훗날 영조 다음으로 왕이 된 정조는 화성을 짓겠다는 자신의 결정에 반대하는 노론 신하들에게 맞서 이 문서를 공개하고 여론을 잠재웁니다. 세상을 떠난 왕비의 위패를 모셔둔 방석 또한 <일월오봉도> 만큼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었던 물건이었던 거죠.



오직 한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었던 유일한 병풍, <일월오봉도>


<조선, 병풍의 나라2>는 크게 궁중병풍과 민간병풍으로 나눠 작품을 전시 중입니다. 시기는 조선시대부터 근대시기까지고요. 병풍을 포함해 많은 예술작품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주인이 바뀌고는 하는데요. <일월오봉도>만큼은 주인이 오직 한 사람, 국왕이었습니다.


조선시대 때 국왕과 한몸처럼 여겨지던 몇 가지 물건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왕이 앉는 의자인 어좌(御座), 왕이 국가 문서에 찍는 어보(御寶), 왕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 어진(御眞) 등입니다. 왕이 세상을 떠난 후에 신주가 종묘로 들어가는 데, 이때 이런 물건들과 함께 <일월오봉도>도 함께 보관합니다. 살아 있을 때에도, 죽은 이후에도 <일월오봉도>의 소유자는 오직 임금뿐인 거예요. 단 한 명만이 가질 수 있었던 병풍, 다른 사람들은 절대 욕심을 낼 수 없었던 그림, <일월오봉도>를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조선, 병풍의 나라2>를 즐길 몇 가지 팁

- ‘APMA GUIDE’ 어플을 핸드폰에 미리 다운받아 가면 자세한 전시 설명을 들을 수 있습니다. APMA GUIDE 어플은 전시장 전용 와이파이를 연결해야만 들을 수 있어요. 이어폰은 필수입니다.

- 전시장에 입장하면 사물함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무거운 옷, 가방 등을 맡기고 가볍게 전시를 즐기세요.

- 전시장 안에 소파를 마련해두었습니다. 마음을 끄는 병풍 앞에 앉아 오래오래 감상해보기를 추천합니다.

- 전시 도록도 살펴보세요. 구입하기에 조금 부담스런 가격(55,000원)이지만, 작품을 소장할 기회입니다. 특히 병풍 그림을 주제로 한 전문가들의 논문 22편이 함께 실렸는데요. 최근 미술사 연구 동향을 살펴볼 좋은 자료 같습니다.

- 전시장을 촬영한 사진 몇 장을 함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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