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 덕후가 본 <옷소매 붉은 끝동> : 02회
오늘은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하는 장소 몇 곳을 소개해드릴게요. 직접 산책을 나가셔도 좋을 장소들이랍니다.
02회 앞부분에 덕임과 경희가 필사 모임에 참여했다가 돌아오면서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덕임은 궁녀로 살지만 ‘선택이라는 걸 하면서 살고 싶다’는 얘기를 합니다. 이 ‘선택’은 두고두고 덕임의 정체성을 정확히 보여주는 단어인데요.
덕임은 중요하고 결정적인 순간 앞에서 수동적인 자세가 아닌 능동적인 의지로 원하는 방향을 선택하며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저 대사가 주체적인 궁녀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선언처럼 들렸죠. 바로 이 장면에서 두 사람 뒤로 정자 한 채가 보이는데요. 창덕궁 후원에 있는 ‘존덕정(尊德亭)’입니다.
앞서 01회에서도 설명드렸듯, 산과 덕임이 창덕궁에 있었을 가능성은 적은데요. 이곳 후원의 경치가 워낙 빼어나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는 촬영지로 자주 등장합니다.
실제 역사에서 정조는 즉위 다음해에 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겨 갔습니다.덕분에 창덕궁에는 실제 정조의 흔적이 여러 곳에 남아 있어요. 그중 대표할 만한 곳이 바로 존덕정이고요.
창덕궁 후원에는 멋진 정자가 많은데, 존덕정도 그중 하나입니다. 존덕정은 ‘관람지’라고 하는 연못 뒤편에 있습니다. 큰 건물은 아니고, 성인 서너 명 들어가 앉을 정도의 크기입니다. 육각형 지붕을 겹으로 올린 모습이 무척 근사하죠. 이곳은 인조 때(1644) 세워졌습니다. 그러니까 <옷소매 붉은 끝동>이 설정한 시대에도 그곳에 있었다는 얘기지요.
직접 존덕정에 가보신다면 꼭 눈여겨봐야 할 것들이 있어요. 우선 지붕 안쪽에 걸어둔 현판을 주목해주세요. 정조가 직접 짓고 쓴 글이 걸려 있거든요. 긴 글의 시작 부분은 이렇게 됩니다.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
만 개의 냇물을 비추는 하나의 밝은 달의 주인이 직접 쓰다
‘만 개의 냇물’이란 신하를 말합니다. ‘밝은 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정조 자신을 가리키는데요. 수많은 냇물을 비추는 달빛은 오직 나 하나뿐이란 사실을 잊지 말라며 신하들에게 은근 압박하는 내용이랄까요. 대단한 자신감 아니고는 쓸 수 없는 글입니다. <옷소매 붉은 끝동>이 그리는 어린 이산의 모습도 이 글씨를 썼던 훗날의 정조를 빼닮은 듯해요. 현판이 지금처럼 존덕정에 걸린 시기는 정조 즉위 후입니다.
천장 중앙에 걸린 용 두 마리 장식도 빼놓지 않고 봐주세요. 부리부리한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두 마리 용이 천장에 달려 있습니다.
존덕정에 올라가 앉으면 아름다운 주변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어요. 특히 비 오는 날의 분위기가 매우 운치 있습니다. 봄가을에 궁궐에서 축제가 열리는데, 이때 존덕정을 개방하고는 했어요. 기회가 된다면 이때 한 번쯤 존덕정에 올라가 정조의 마음처럼 달빛이 비췄을 연못 경치를 감상해보기를 추천합니다.
01회에서 어린 산과 덕임은 후원에서 처음 만난 후 헤어집니다.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아슬아슬하게 엇갈리죠. 다시 만나지 못한 채 시간은 흐르고 둘은 성장해 또 한 번 우연히 만납니다. 그리고 애틋한 마음을 키워가는데요. 그 장소가 바로 ‘동궁’입니다.
사극에서 세자를 ‘동궁’이라고 하는 걸 들어 보신 적 있죠? ‘동궁’이란 세자의 별칭 같은 겁니다. 세자는 미래의 권력자잖아요. 해가 동쪽에서 뜨듯, 세자가 머무는 방과 학교(세자시강원)를 궁궐의 동쪽에 두었는데요. 이런 점에서 착안해 세자를 동궁으로 부르는 겁니다. 세자는 이곳에 머물며 왕이 되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경희궁의 동궁에는 경현당과 문헌각, 집희당, 경선당 등의 건물이 있었습니다. 그중 책을 보관하던 건물이 ‘문헌각’이에요.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산과 덕임이 아웅다웅 다투며 사랑을 키우는 실제 장소가 어디일지 짐작해 본다면 여기 문헌각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세자는 주로 동궁에 머문다는 점에서 성장한 산과 덕임이 동궁에서 다시 만난다는 설정은 첫 만남의 장소를 후원으로 설정했던 것처럼 좋은 선택 같습니다.
경희궁의 동궁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면 좋겠지만, 현재 그곳엔 서울역사박물관이 들어서 있어 실제 모습을 찾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궁궐 중 현재까지도 동궁 영역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을 소개해드리려고 해요. 바로 창덕궁 ‘성정각’과 ‘중희당’, ‘승화루’ 주변입니다.
이곳들은 창덕궁의 동궁에 해당합니다. 세자는 ‘성정각’에서 여러 스승을 모시고 공부를 했습니다.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이산이 스승 여러 명과 함께 공부하는 장면과 비슷했을 겁니다.
‘중희당’은 세자가 머물던 방인데요. 17회에서 정조의 첫 아들, 문효세자가 세상을 뜨는 안타까운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가 바로 중희당이에요. 현재 이 건물은 사라지고 바닥에 건물의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창덕궁 후원으로 들어가기 전에 있는 매표소와 대기 장소로 쓰이는 곳이 바로 중희당 터입니다.
성정각과 맞은편에 자리한 담장을 보면 건물 세 개가 이어져 있는데요. ‘칠분서’와 ‘삼삼와’, ‘승화루’입니다. 모두 동궁 영역에 속한 건물들이죠. 세 건물이 이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규모가 매우 큰 건 아닙니다.
그중에서도 주목할 곳은 책을 보관하던 서고인 ‘승화루’입니다. 궁궐 안에는 서고가 여러 군데 있지만, 이곳은 세자만을 위한 서고였어요. 산과 덕임이 만났던 바로 그 서고처럼 말이죠.
실제로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창덕궁 후원에 주합루를 짓고, 이 건물 1층을 왕립도서관처럼 이용했어요. 지금도 후원에 들어가면 볼 수 있습니다. 부용지라는 연못을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2층 건물입니다. 왕의 도서관 이름이 주합루라는 점에 빗대어 세자의 도서관이었던 승화루를 ‘소주합루’라고도 불렀습니다.
소개해드린 ‘성정각 – 중희당 – 칠분서 – 삼삼와 – 승화루’를 한데 묶어 창덕궁의 동궁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산과 덕임이 만나 사랑을 키우는 장소로 창덕궁을 설정했다면, 바로 이 건물들이 주요 배경으로 나올 수 있었겠지요?
03회에서는 멋진 그림에 대해 이야기해볼게요.
※ 궁궐의 아름다운 산책 코스와 다양한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저의 책 <궁궐 걷는 법>(이시우, 유유출판사)을 참고해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