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와일드의 장편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그려진 세가지 요소
안녕하세요, 아키패션(Archifashion)의 디자이너 건킴(Gunkimm)입니다.
순수, 중독, 그리고 타락이라는 주제로 의뢰를 받아 사진 작업을 진행했는데요. 세가지 개념을 가시화 하기 위해선 뚜렷한 예시가 있어야 된다는 생각에, 이전에 읽었던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빌려 제작 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에 대하여 짧게 소개하자면, 아일랜드에서 태어나고 자라 예술에 대한 집념이 있었고, ‘예술의 가치는 무한속에 존재하나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라는 말과 함께, '예술은 그 무엇보다 고귀하다'는 신념을 갖고 한 평생 예술에 가까워지기를 갈망하며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합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작가(건킴) 관점의 중요 내용]
19세기 후반 신사문화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며, 도리언이라는 젊고 순수하며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는 청년이 두 인물,‘바질 홀워드’ 그리고 ‘헨리’를 만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바질 홀워드’는 화가로서 도리언의 미모를 매우 높이 사며 그의 아름다움을 캔버스에 고스란히 담기 위해 심의를 기울여 작업을 한다. 도리언은 자신이 그려진 캔버스를 보며 그 아름다움에 빠져들고, 시간이 지나도 늙지 않을 캔버스 속의 본인을 질투하며 슬픔에 잠긴다.
그의 영원한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이 그림에 투영되듯, 특정 사건으로 인해 그림 속 자신이 대신 늙는 다는 것을 도리언은 확인할 수 있었다. 도리언은 마법과도 같은 현상을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으며, 그림을 그려준 장본인 바질에게도 숨긴다.
시간이 지나며 도리언은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인생의 쾌락을 누리며 살고, 쾌락이 더하면 더할수록, 그리고 비도덕적이면 비도덕적일수록, 그림속의 도리언은 퇴폐하고 있었다.
끝내 긴 세월이 지나도 도리언은 젊은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기에 주변사람들에게 괴물취급을 받았고, 술, 여자, 마약 등 쾌락에 찌들어 본인의 그림 앞에서 좌절감에 칼로 그림을 찌른다.
순간 그림은 젊은 도리언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찢어진 그림 앞에 그림속의 노파가 죽은채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작가(건킴) 관점의 느낀점]
보편적인 해석 속에선 캔버스속 자신의 모습은, 도리언의 양심과 도덕성으로 비추어 지고있지만, 내가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바질과 도리언이 갖고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집념과 집착이다.
그의 영원한 아름다움은 장미와도 같아, 꽉쥐면 쥘수록 본인에게 상처를 입힌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에 중독되어 본인은 퇴폐해가며 아름다움만큼은 잃지 않는다. 이 말은 즉, 그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의 건강 혹은 행복이 아닌 ‘아름다움’에 있지 않을까.
나는 종종 악마와 영혼을 바꿔서라도 세계 정상에 있는 디자이너 혹은 예술가가 되고싶다고 말한다. 자신이 망가지면서 까지 무언가를 쟁취하는 모습이 누군가에겐 미련하고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생각 할 수 있지만, 꼭 현실적이고 안전함만이 이상적이지 않다고 믿는다. 또한 세상은 내가 꾸려나가기 나름이다, 내 가치관을 중심으로 내 세계를 잘 형성하고, 내가 믿는 것 그리고 형성한 것이 진리인 세상 속에 살면 그게 곧 도리언의 초상화이지 않을까 싶다.
순수했던 도리언이 아름다움에 중독되어 타락하는 장면을 사진+회화로 표현한다.
<중독> Addiction/Toxic
- 독성이 있는 물질을 먹거나 들이마시거나 접촉하여 목숨이 위험하게 되거나 병적 증상을 나타내는 것.
- 술·담배·아편 등을 자주 즐겨, 그것을 마시거나 피우거나 맞거나 하지 않으면 정신적·신체적으로 정상적 상태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것.
여기서의 버섯과 해파리는 땅에서 그리고 바다에서의 독성분을 표현한다. 순수한 도리언에게 천천히 접근하여 서서히 독성분을 퍼뜨리는 '헨리 경'
<타락> Depravity/Corruption
- 올바른 길에서 벗어남.
- 죄를 범하여 불신의 생활에 빠지는 일.
'올바른 길'을 정의 내리는 것 부터 모순적이다. 아름다움을 쫓고 쾌락을 누리며 본인의 건강이 해쳐지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관점은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들어,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A는 사회가 암묵적으로 정해놓은 '올바른 길(도덕성)'을 누구보다 잘 지키며, 살지만 근본적으로 행복하지 않고 꿈꿔오던 이상과는 가장 먼 사람 중 하나가 된다. 그는 아무도 모르는 세상 속에 사회가 형성한 '올바른 길' 속에 살다 도전 한번 해보지 못하고 생의 마지막을 맞이한다. 반면에 B는 쾌락에 취해 행복감에 파묻혀 자신의 몸이 손상되는 줄 모르고 행복감에 취하여 한평생 살다가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다.
이 두 전재를 봤을 때, 우리 대다수는 A라는 사람이 불행해 보일 수 있지만, 도덕성을 지키고 오래 사는 것이 더 좋은 삶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B와 A가 같은 기간동안 살았다고 가정해보자. 쾌락에 취해 진리는 모르고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사랑과 행복에 빠져있는 사람 B, 혹은 세상의 이치를 잘 이해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지만 행복하지는 않은 A. 사람들은 과연 전자만큼 압도적으로 A의 삶을 선택할까?
여기서 좋은 삶이란 삶의 지속 시간인가? 혹은 건강한 육체인가? 행복감인가?
행복하고 일찍 죽는건 안좋은 삶인가?
행복하고 오래 살지만 육체는 건강하지 않으면 좋은 삶이 아닌가?
불행하지만, 오래 건강하게 살면 좋은 삶인가?
도덕적으로 살지만 세상에 존재하고 싶지 않은 당신이 범죄 한번으로 죽을 때 까지 행복 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것인가? 그리고 범죄를 저질르고 행복할 수 있다고 해서 그럼 당신의 삶은 좋은삶에서 제외된것일까?
그렇다면, 도덕적으로 살지만 행복이 없어 스스로 세상을 떠나는 삶이 범죄를 저지르고 행복한 삶보다 좋은삶인가?
어떤 범죄이냐에 초점을 두는 사람들이 있을것이다. 범죄의 죄질에 따라 그럼 좋은 삶으로 평가 받을 수 있는걸까?
살인, 절도, 분륜, 마약 이들은 어느정도는 수용되고 어느정도는 수용이 안되는 것인가?
여기서 하고자하는 말은, 좋은 삶은 정의하기 어렵다는 것이고, 상대적 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것은 상대적이다. 우리는 객관적 정보가 있다고 믿지만, 가장 기초적인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 마저 상대적이고, 우리가 존재하는 이 우주마저 상대적이다. 감히 옳고 그름을 쉽게 정의하는것에 대한 회의감을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