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감정을 디테일하게 기록하고 형상화 한 책
안녕하세요, 영감을 나누는 공간 <치즈(Cheese)>의 진행자 건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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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출간한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은 한 여자의 범상치 않은 사랑 이야기다. 가정이 있는 남자를 사랑하고, 그와 함께한 시간을 기록했으며, 그가 떠나간 후 그의 자취를 영구적으로 남기기 위한 그녀의 태도, 그리고 그와 함께하고 있다는 감정을 느끼기 위해 취하는 행동들을 기록하였다.
그녀가 느끼는 사랑의 감정은 우리가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사랑 할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이지만, 디테일하고 극사실적으로 표현한다.
나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일원으로서 보수적인 문화에 속한 한 사람이다. 이러한 환경은 사랑이라는 형태 또한 일반화 되어있고, 그 형태에서 벗어나면 주변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런데, 요즘 퀴어물 영화 혹은 프랑스 작가 위주의 책을 읽으면서 사람의 성향이 다양한 만큼 사랑의 형태 또한 다양하고 본인에게 맞는 사랑의 가치관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본질적으로 또는 생물학적으로 열정적 사랑이라는 감정은 2~3년이라는 주기를 두고, 그 이후에 줄어들기 마련이라고 하는데, 그 속에서 사람들은 자극적인 사랑을 찾기 위해 혹은 중독이 되어 다른 사랑을 찾거나 혹은 그것으로 부터 위안을 받기 위해 다른 자극재를 찾아 중독이 되곤 한다. 우리는 어찌보면 무언가에 끊임없이 중독되고 본능과 욕구에 끌려다니는 폭주하는 기관차나 다름 없지 않을까?
하지만 이러한 열정적 사랑에 중독이 된다고 해서 슬퍼할 필요는 없다고 느낀게 이 책을 통해 느낀 감정이다.
Passion이라는 단어는 남녀 간의 절절한 애정이라는 뜻에서 우리말로 ‘열정’이라 번역하지만 이것은 수가 십자가에서 겪은 ‘고통’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러한 단어의 개념이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에 대하여 가장 잘 표현하는 것 같다. 완벽하게 소유할 수 없는 사랑의 상대, 그리고 조금의 실수로 인해 산산조각 날 것 같은 관계로 인해 활화산 과도 같은 열기의 사랑을 형성하고 그 열정에 따르는 대가는 심적 고통과 망가진 일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사랑에 대한 집착은 아름답게 표현되고, 소중한 기억의 파편처럼 느껴진다. 우리의 삶에 존재하는 열정은 살아있다는 감정을 느끼게 해주고, 존재하는 이유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한편으로 작가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사랑이라는 열정을 끊임없이 기록하고 추구하며 집착하는게 아닐까?
이러한 삶의 태도는 경제적으로 부족했던 부모 밑에서 자라며 동시에 사립학교를 가서 부유한 친구들의 가정을 관찰함과 동시에 느낄 수 있었던 이질감 때문이였을지도 모른다. 결핍으로부터 오는 감정을 다른것으로 채우는 것이 그녀의 방식이였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작가의 집착 구절을 몇개 남겨본다.
“거기에는 인터뷰인터뷰에 응한 무용수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검은 머리에 키가 크고 미끈한 다리를 가진 매력적인 여자였다. 기사를 읽어가면서 불길한 예감이 점점 커졌다. 마침내 나는 A가 쿠바에 갔을 때 사진 속의 그 무용수를 만난 적이 있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다음 순간 그 여자와 함께 호텔방에 있는 A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 순간만큼은 누군가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나를 납득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내게는 그런 일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가정이 바보 같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날 밤, 에이즈 검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이 내게 그거라도 남겨놓았는지 모르잖아’
“만약 이달 말까지 그 사람이 내게 전화를 해온다면 자선단체에 500프랑을 기부하겠다고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추가적으로 이 책의 이야기는, 아니 에르노가 사랑하던 사람과 나눈 시간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가 떠나가고 나서 상실감을 체우기 위해 그를 물리적으로 찾는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그를 상기시키고 심리적으로 물리적인 것에 가깝게 다시 불러들이기 위함이였다.
이 태도는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애도작업’에서 나오는 형태인데, 프로이트에 따르면, 애도는 우리가 떠나보낸 자에 대한 감정적 애착을 단절하고 자유로운 리비도를 새로운 대상에 재투자하는 것이다. 그래서 애도작업이 성공적이지 못하여 감정적 애착이 단절되지 못할 경우, 치료를 필요로 하는 병리학적인 우울증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애도작업의 성공은 정상이요, 실패는 비정상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애도작업의 성공이나 실패가 꼭 그렇게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뉘어야 하는지, 애도작업의 성공만이 긍정적인 것이고 실패는 반드시 부정적인 것이어야 하는지, 살아남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설령 불가피하다 하더라도, 한 번쯤 뒤집어 생각해볼 필요는 있을 듯하다. 다소 비현실적인 생각일지는 몰라도, 진정한 애도는 결코 완성될 수 없는, 그래서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돼야 하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우리가 그 사람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체험할 정도로 사랑했던 사람일 경우, 그래야만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바로 이것이 자크 데리다가 애도의 “성공은 실패한 것”이고 “실패는 성공한 것”이라고 말한 이유일 것이다. 애도가 성공한다는 것은 결국, 떠나간 사람을 잊고 극복함으로써 새 삶을 사는 것으로 귀착되니 긍정적인 것일지 모르지만, 떠나고 없는 사람을 마음이나 기억 속에서까지 비워내는 것이니, 완전히 비워내지 않는다면 부분만 남기고 비워내는 것이니, 비정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애도작업의 실패는 떠나간 사람이 남긴 빈자리와 공허를 어쩌지 못해 자신의 남은 삶을 저당 잡히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니 부정적인 것일 수 있지만,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사람에 대한 기억과 추억에 충실하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성공적인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애도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실패해야, 그것도 ‘잘’ 실패해야 한다.”고 데리다가 말한 의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떠나간 사람을 잊고 새 관계를 형성하는 ‘정상적인’ 삶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것일 수 있으며, 죽은 사람을 못 잊어 몸부림을 치며 그 사람을 자기 안에 살아 있게 하는 ‘비정상적인’ 삶이 오히려 ‘정상적’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는 사회가 우리에게 처방하는 것과는 달리, 정상과 비정상이 보는 시각에 따라서 얼마든지 자리를 바꿀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부재하는 자가 부재한다고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애도를 거부하는 것이 오히려 진정한 애도일 수 있다는 역설이 여기에서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