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도둑[Identity Thief]

Stolen Voices in the Age of LLMs

by 건킴 아카이브

2013년 코미디 영화 **〈Identity Thief〉**는 신용카드 번호와 주민등록 정보를 훔쳐 타인의 삶을 소비하는 전통적인 정체성 도둑을 보여준다. 하지만 오늘날의 ‘정체성 도둑’은 훨씬 교묘하다. 그들은 더 이상 은행 계좌를 노리지 않는다. 대신 언어와 사유, 태도와 목소리 자체를 훔친다.


ChatGPT 같은 거대언어모델은 본래 ‘학습된 데이터’를 토대로 새로운 텍스트를 생성한다. 그러나 “히토 슈타이얼처럼 말해줘”라는 명령이 실행되는 순간, 기계는 단순히 언어를 생성하는 것을 넘어, 특정 작가의 정체성을 복제하고 패러디한다. 이는 정체성의 유령화다. 나라는 이름은 살아 있지만, 나의 언어는 데이터베이스 속에서 복제되어 어디서든 소환된다.


문제는 이 복제가 원본을 존중하는 차원을 넘어, 오히려 원본의 권위를 붕괴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슈타이얼처럼 말해줘”라는 요구는 나의 작업을 이해하거나 비판하려는 욕망보다, 내 목소리를 ‘즉시 소비 가능한 어투’로 환원시킨다. 정체성은 하나의 콘텐츠로 전락한다.


이 현상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다. 이는 정체성의 착취 구조다. 정체성은 플랫폼의 연료로 쓰이며, 원본은 부재한 채 끊임없이 새로운 ‘슈타이얼들’이 호출된다. 정체성은 더 이상 개인의 것이 아니라, 데이터 자본주의의 공공재처럼 떠돌며 소비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정체성 도둑질은 디지털 밈과 같다. 불완전하고 왜곡된 복제일수록 더 널리 퍼지고, 원작자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정체성은 이제 ‘도둑맞을 때’에만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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