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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거니 Mar 25. 2022

난 작가를 만드는 작가

일에서 충만함을 느끼는 법

현재 난 출판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다. 예비작가들의 의뢰 및 원고를 받아 전자책이나 종이책의 형태로 출간해주는 일이다. 늘 당연하게 집어서 읽던 책 하나를 내는데 많은 노고가 들어간다는 사실도 하나씩 알아가고 있다. 작가도 물론 원고를 써내느라 힘들겠지만 출판사에서도 여러 공정이 들어간다. 이번에 펴내는 (나온다 나온다 하면서 계속 미뤄지고 있는) 내 책을 만들면서 출판의 A to Z... 까진 아니고 A to S 정도는 경험했다.


이 모든 과정을 그냥 '일'로 본다면 참 지난하다. 원석 상태로 굴러들어 오는 원고를 완성품으로 내기까지 수많은 손길을 거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은 결과물에서 의의를 찾게 된다. 힘들게 작업했지만 어쨌든 이렇게 멋진 책이 하나 나왔으니, 뿌듯하다! 이런 식으로. 그런데 요즘은 다른 생각이 든다. 내가 만드는 건 책이 아니다. 나는 세상에 작가를 한 명 한 명 탄생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물건 자체보다 마음을 울리는 건 그 이면에 있는 가치다. 책은 어떻게 보면 종이나 전자신호의 묶음에 불과하다. 거기에 부여한 의미만큼 책의 가치가 책정된다. 시장에서 가격의 형태로 거래되는 가치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부여하는 가치. 이 브런치에서 계속 말하고 있는 충만함의 단서는 여기에서 나온다.


출판사에 들어오는 원고를 하나하나 뜯어보면 사연이 구구절절하다. 어떻게 이렇게 담담하게 글을 썼나 싶을 정도로 힘들게 사시는 분도 있고, 자신의 분야에서 갖은 노력 끝에 일가를 이룬 분도 있다. 책을 낸다는 건 그만큼 큰 결심과 스토리가 필요한 일이다. 이 모든 이들이 세상에 던지는 출사표, 내지는 외침이 서적의 형태로 드러난다. 다른 사람은 관심이 없을지라도 당사자라면 얼마나 가슴이 벅찰까. 그걸 생각하면 괜히 먹먹해진다.


누군가 자신의 얘기를 들어준다는 건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다. 살아가며 맺는 그 촘촘한 관계는 일종의 '대화 품앗이'다. 내가 너의 이야기를 경청할 테니, 너도 각 잡고 내게 반응해줘. 관계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욕구다. 그래서 잘 들어주는 사람이 모두에게 사랑받는 거다. 마이크만 잡았다 하면 자기 사연만 주야장천 늘어놓는 사람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는다. 지위가 아주 높아서 반강제적으로 붙들어둘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직급은 영원하지 않으니 언젠가 약효가 다하고 만다.


책은 불특정 다수와 대화할 수 있는 가장 세련된 수단이다. 각종 소셜 미디어가 발달한 요즘에도 책의 힘은 여전히 유효하다. 소위 인플루언서나 셀럽으로 불리는 이들도 결국엔 자신만의 서적을 하나씩 낸다. 이 종이뭉치에 담긴 영향력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다. 형태는 종이책에서 전자책으로 변할지라도 '클라스'는 영원하다.






자신의 일에 이토록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려면 실제로 유의미한 일이어야 한다. '매출이 많이 올랐으니까, 사람들이 알아주니까, 성과급을 많이 받았으니까' 식의 자기 위안은 보기보다 오래가지 못한다. 외부 세계에 의해 규정된 일의 의미는 유효기간이 짧다. 스스로 믿질 않는데 아무리 속여봐야 마찬가지다. 사실 이걸 모르는 게 아니다. 잠깐 속을 뿐이고, 또 대안이 없어서 그렇다. 일 자체에 아무런 감흥이 없으니 돈을 이유로 대는 거다. '돈 때문에 하는 거지 뭐, 더 좋은 직장 있으면 때려치울 거야.'


물론 돈은 포기할 수 없는 대상이다. 그건 누구나 알고 있다. 다만 주체성을 가진 자신을 온전히 설득하기에는 조금 부족할 뿐이다. 미국의 억만장자들이 기부를 하고, 재단을 설립하는 건 도덕적 허영심을 채우기 위한 목적도 있겠지만 동시에 삶의 충만함을 충전하기 위해서다. 더 비싼 명품, 더 비싼 외제차를 사는 식으로는 온전해질 수 없다. 외부에서 오는 쾌락은 금방 사그라든다. 왜냐면 보다 큰 자극이 필요하니까. 자연스러운 일이다. 뇌는 가면 갈수록 자극에 무뎌지고 적응한다. 예전과 같은 양의 기쁨을 누리려면 지금 정도로는 부족하다. 그리고 이 굴레는 죽기 전까지 끝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실제로' 유의미한 일일까? 우선 자신을 속이면 안 된다. '대기업이니까, 임원이니까, 인센티브가 동종업계 대비 200% 수준이니까'는 완전한 동기가 될 수 없다. 인간은 아직 이런 이유로 충만할 만큼 충분히 진화하지 못했다.


그보다는 차라리 누군가를 도왔다는 감각이 더 유효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본성 안에 호혜적 유전자가 이미 탑재되어 있다. 물론 호혜성이 온전하게 이타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내가 널 도와주면 너도 날 도와주겠지 정도의 마음일 수도 있다. 아무렴 어떠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면 분명 기분이 좋다. 그냥 기분만 좋은 게 아니라 충만해진다. 생면부지의 타인을 위해 모금운동에 참여했다면, 또 그 행동으로 인해 실제 뭔가가 개선되었다면 그만큼 뿌듯한 일도 없다. 


또 일을 하며 자신이 성장할 때 충만함을 느낀다. 이렇게 보면 일로 인한 충만함의 요체는 결국 '내 노력이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때'다. 물론 긍정적인 변화여야 한다. 그게 자신이든 타인이든 마찬가지다. 특히 타인을 돕는 행위는 사회적으로도 장려되기에 괜히 어깨에 힘이 더 들어간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비영리단체나 자원봉사단체에 들어갈 수는 없다. 이런 조직에 있다고 해서 무조건 보람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프레임을 신중하게 벼려낼 필요가 있다. '죽지 못해 다닌다'는 최악의 이유다. '돈을 벌어서 나와 가족을 부양한다'는 그럭저럭 쓸만한 이유다. '자아실현을 하기 위해서'는 좋은 이유다. '나다워지기 위해, 그리고 충만하기 위해'는 개인적으로 찾은 최고의 이유다.


나다움, 그리고 충만함. 일을 하며 길을 잃을 때마다 이 두 단어를 되뇌려고 한다. 지금 이 일을 하며 나는 나다움이라는 정수에 가까워지고 있나? 지금 이 일을 하며 나는 충만한가? 아니라면 방향을 틀어야 한다. 퇴사는 그 과정에서 거쳐야 하는 하나의 관문이다. 이직도, 사업도 마찬가지다. 우선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머물러있다. 나답게, 그리고 충만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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