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거니 Apr 03. 2022

자유로이 시간 속을 여행하라

시간과 공간을 마음껏 누리면서 살고 싶다

반 백수가 되고 가장 큰 기쁨은 시간을 내 품으로 가져왔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온다. 그저 '마음대로 살 수 있어서 좋다' 이런 느낌이라기 보단 '온전히 시간을 누릴 수 있다' 쪽에 가깝다. 사실 시간이 많다고 해서 뭐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경제적이든 물리적이든 분명한 제약이 있다. 다만 매 순간순간 쫓기지 않으니 한층 더 깊이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아침에 일어나 침대 한편에 자리한 햇빛 한 조각. 전에는 득달같이 일어나 털어대기 바빴다. 시간이 없었으니까. 출근 전 준비 시간은 다른 때와는 밀도가 다르다. 조금이라도 동선이 꼬이면 지각이다. 그래서 잠깐 이불속에서 잠시 절망하다가 억지로 몸을 일으킨다.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래야 하니까. 적당한 게으름이야말로 몸과 마음이 원하는 온전한 온도다.


그래서 전체주의적인 성격을 띠는 집단은 가장 먼저 시간을 통제한다. 개개인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방법이니까. 영향력은 쉽사리 권력의 구축으로 이어진다. 그중에서도 수면시간을 좌지우지하는 게 가장 큰 권력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잠을 자야 하니까. 군대가 가장 노골적이고, 학교나 회사도 등교시간 및 출근시간을 통해 이를 보여준다. 출근시간이 정해져 있다면 사실상 언제 일어나야 하는지가 고정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똑같은 시간에 자고,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야 할 이유는 없다. 시간의 통제란 실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사회가 요구한 덕목 중 하나다. 많은 사람이 같은 시간에 같은 일을 해야 기계가 돌아가고 집단이 돌아가는데, 예외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 집단주의적 환경에서 예외를 인정받으려면 아예 사회적 기능을 상실하거나 아니면 피라미드의 정점에 올라야 한다. 한마디로 백수거나 사장님이거나.


이제 산업화 시대가 지나고 정보통신 시대라는 말도 식상해질 시점이다. 온라인 및 모바일 혁명으로 인해 시공간의 제약 없이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정말 시간과 공간은 개인의 소유가 되었나? 유현준 교수는 이슬람교를 예를 든다. 종교의 권위는 근본적으로는 시공간의 통제에서 온다. 그래서 거대한 사원에 사람들을 정해진 시간에 모은다. 이슬람교에는 정해진 시간에 메카를 향해 절을 하고 기도를 해야 한다는 교리가 있다. 모두의 공간을 소유할 수 없으니 시간이라도 맞춰서 권력을 가지려는 의도에서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재택근무가 활성화되었음에도 여전히 출근은 정해진 시간에 해야 한다. 다만 공간의 자유는 어느 정도 확보가 되었다. 몇 시까지 접속하기만 하면 집에서든 거점 오피에서든 진행을 하면 된다. 그래서 관리자급 이상은 재택근무를 선호하지 않는다. 공간을 제멋대로 사용하게 내버려 둬서는 권위가 살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 관리가 용이하지 않다는 이유를 대긴 하지만 그건 솔직하지 못하다. 재택근무 도입으로 인해 오히려 개인의 성과를 더 세세하게 측정하는 게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상사에게 건네는 아부성 커피가 아니라 실제로 유의미한 결과물을 가져와야 한다. 물론 대면 업무에 따른 팀워크 형성도 중요하지만 말이다.


다만 누군가의 공간, 나아가 시간을 통제하고 싶다는 욕구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 남아있는 한 존속된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기업과 학교가 코로나 이전의 '대면 세계'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 이제 이만큼 경험해봤으면 됐으니 다시 예전처럼 살자는 말이다. 재택근무 자체에 대한 피로감도 한몫했다.


다만 이건 조금 더 면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실시하게 된 재택근무다. 당연히 활동반경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갈 수 있는 곳은 집이나 근처 카페가 될 수밖에 없다. 집은 애초에 오피스 공간이 아니었으니 업무에는 당연히 제약이 생긴다. 카페도 마찬가지다. 이미 이런 업무 방식에 익숙한 프리랜서가 아닌 이상은 말이다. 게다가 하늘길도 막혔으니 해외로 나가서 일을 하겠다는, 그런 디지털 노마드스러운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한다.


사실 이 모든 논쟁은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느냐, 혹은 할 수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개인이 공간과 시간에 대한 자유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느냐의 문제다. 시공간의 자유는 사실상 삶 자체와도 맞닿아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떠한 공간을 점유하고, 또 어떠한 시간을 살아간다.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는 없다. 3차원의 공간과 1차원의 시간, 어쩌면 이게 인간이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개념이다.


시공간의 자유가 전제되지 않으면 다른 종류의 자유도 무의미하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공간에 있을 것. 이건 자유의 가장 기본적인 모습이다. 그래서 퇴근 후에 업무적으로 연락이 오면 그토록 짜증이 나는 거다. 그때마다 계약서 상에 정해져 있는 근로 시간을 떠올리지만 사실 그건 진짜 이유가 아니다. 근본적인 자유를 침해당하는데서 오는 거부감에 가깝다.


요즘 부쩍 집을 사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내 공간에 대한 욕구다. 동시에 내게 맞는 시간을 누리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내 시간에 대한 욕구다. 그러자면 경제적 능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내게 돈이란 공간과 시간을 누릴 수 있는 수단이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가장 비싼 두 가지이기도 하다. 공간과 시간. 그 속을 마음껏 유영하고픈 건 그저 사치에 불과한 걸까?

매거진의 이전글 믿을 놈 하나 없으면 누굴 믿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