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놓고 나니 흡사 자기계발위로힐링치유공감 에세이의 제목 같다
보통 타인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하지만 유난히 관심을 가지게 되는 순간이 있으니, 바로 자신의 욕망을 나에게 투영할 때다. 내가 이러이러한 모습으로 살아줬으면 하는 (실은 본인의 욕망이 투영된) 요구를 할 때면 남들은 어김없이 다가와 지대한 관심을 표현한다. 인생의 방향키를 쥐고 힘겹게 항해 중인데 옆에 와서 자꾸 키를 손에 넣으려고 한다.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그들이 말하는 게 기술적인 영역에 있는 문제라면 귀를 기울일 법하다. 테니스를 배우고 있다면 코치의 조언에 따라 자세를 바꾸는 게 합리적이다. 그가 틀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기술에는 어느 정도 정답이라는 녀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게 찰떡같이 맞는 방법이 있는 게 아니라면 경험과 지식이 풍부한 이의 말을 듣는 게 좋다.
다만 인생의 방향성이나 취향의 문제에서 누군가의 조언을 들을 때는 귀에 필터를 하나 장착해야 한다. 아예 모든 말을 무시할 필요는 없지만 걸러서 들어야 한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으니까. 그래서 누군가가 이게 정답이라며 다짜고짜 손에 해설서를 하나 쥐어줄 때마다 속으로 '멈춰!'를 외친다. 겉으로는 알 수 없는 표정을 띄우면서.
난 참 남의 말을 안 듣는다. 어느 말에 귀를 기울일지 항상 저울질한다. 그래서 대개 인생에 대해 조언하는 그 수많은 시도는 무위로 끝나고 만다. 그러다 괜찮은 말이 등장하면 조심스레 관심의 끈을 이어 본다. 배울 게 있는 사람인 경우 호감도가 엄청나게 상승한다. 이는 꼭 이성적인 호감에 한정되지 않는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더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마구 생긴다. 누군가는 이 닫힌 문을 열어 들어오기를 실은 간절하게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꼭 뭔가를 배울 필요는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존중이 필요하다고 믿을 뿐이다. 개인적인 영역에 함부로 들어와 마구 휘저어 놓을 바에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게 편안하다. 그래서 난 '아니', '싫어'라는 말을 자주 한다. 물론 아무 때나 남발하는 건 아니다.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막이다. 의무적으로 강제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러하다.
난 자기 전에 야식을 잘 먹지 않는다. 숙면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잠들기 직전 누군가가 권하는 간식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물론 내가 제의를 거절함으로써 상대방은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가능한 한 부드럽게 밀어내려 노력한다. 다만 상대방의 감정과 체면을 무작정 지켜주느라고 내가 긴 시간 고통받을 수는 없다. 나 역시도 감정을 가진 사람이니까.
한때 '나를 지키려면 거절을 잘해야 한다'는 카피가 유행했던 적이 있다. 대책 없는 위로보다는 백배는 더 나은 조언이다. 그러다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으면?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나를 지키려면 어느 정도는 싸가지가 없어야 하고, 어느 정도는 눈총을 받을 각오도 해야 한다. 세상은 보통 개인을 둥글둥글하게 깎아놓는다. 세상은 친구나 부모, 직장동료나 낯선 이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나 또한 그 일부가 되어 누군가의 모서리를 열심히 다듬는다.
누군가에게 깊은 내상을 입힐 정도가 아니라면 뾰족함은 훌륭한 도구가 된다. 타인과 나를 구분해주고, 나라는 사람을 정의할 수 있는 특성이 되기 때문이다. 그 모서리 덕에 사랑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똑같이 행동을 하는데도 나에 대한 평가가 갈리는 모습을 보면서 어차피 모두의 마음에 들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니, 딱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나라는 사람을 버리고 모든 걸 타인에게 맞추며 살면 된다. 그 무(無) 자아의 기간을 무리 없이 버틸 수 있다면 말이다.
내가 글 쓰는 걸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독서모임에서 '전 남들과 비슷하게 살아서 저만의 뾰족함이 없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더니 한 멤버 분이 '글에서는 그런 색깔이 한껏 느껴지던데요'라고 해주셨다. 일상에서는 조금 밝은 갈색으로 염색하는 게 최대한의 일탈이었던 내가 그래도 '나의 것이오'라고 당당하게 선언할 수 있는 건 사실 글에서다. 좋아하니 반복하게 되고, 반복하다 보니 남들과는 다른 글이 나온다.
퇴사도 그중 하나다. (매번 퇴사로 결말이 나서 찔리지만 퇴사와 독립에 관한 매거진이니 이해 부탁드린다) 무작정 회사를 나와하고 싶은 일을 하며 관련한 책도 집필했다. 유튜브도 시작했고 또 다른 인생도 기획하고 있다. 나만의 색을 가지기 위해선 회사에도 '아니'라고 해야 했다. 그 안에서는 그러기가 어려우니 나와야 했다. 세상이라는 프리즘에 한껏 왜곡되어 있던 나만의 빛을 이제야 조금씩 선명하게 찾아오는 느낌이다. 그래, 나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나다움은 우아하게 앉아 얻어내는 게 아니라 사방에 발길질을 하며 쟁취해야 한다. 아니면 애초에 그럴 필요가 없을 정도의 위치에 오르거나. 군대를 제대한 이후 그제야 난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에서 해방되었음을 알았다. (여기서의 의무는 정말 강제로 해야 하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다) 설령 '피치 못한 사정'에 의해 무언가를 하더라도 그 역시 나의 선택이다. 노상강도가 머리에 총을 들이대며 요구하는 게 아니라면 대부분의 행위는 선택의 결과다. 그리고 선택은 내 어깨에 묵직한 책임을 지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