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르 파티
인터넷 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애 관련 조언은 대부분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지에 집중한다. 온갖 기술이 난무한다. 어떻게 밀당을 해야 하는지, 외모는 어떻게 가꿔야 하는지, 말투는 어떻게 하고, 연락은 어떤 빈도로 해야 하는지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런 조언이 무의미하다는 건 아니다. 다만 본질은 아니다. 그럼 연애 감정이나 사랑에 있어서의 본질, 즉 단 하나의 진리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사랑이란 이유에 선행한다는 거다. 세상만사는 이유가 결과에 앞서서 발생한다. 그런데 유독 사람의 감정만은 그렇지 않다. 먼저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기고, 그 이후에 여러 가지 이유를 붙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넌 나를 왜 사랑하니? 혹은 좋아하니?'라는 질문에는 항상 답하기 어렵다. 감정이란 그렇게 논리적으로 라벨링을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무언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외모라든지, 능력이라든지, 혹은 성격이나 코드라든지 뭐든 간에. 그걸 갖추면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그래서 앞서 말한 연애 조언은 이 지점을 공략한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별다른 이유가 없어요.' 이렇게 말하면 듣던 사람들은 떠나간다. 보통 사람들은 확실한 해결책을 원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저 사람의 마음을 얻고 싶으니까.
사실 마음이란 본인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이렇게 보면 마음이란 내가 가진 자의식과는 분리되어 존재하는 별도의 공간 같아 보이기도 한다. 감정은 실시간으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나조차도 알기 어려운 패턴을 보인다. 나는 왜 화가 나는 걸까? 나는 왜 저 사람을 사랑하는 걸까? 아무리 고민해도 그 이유를 찾기가 힘들다. 내가 충분히 성찰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게 감정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잡았다고 생각하면 멀찍이 달아나는 무지개처럼 허상을 쫓는 기분이다.
그렇다고 마냥 포기하고 주저앉을 수는 없다. 뭐라도 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의욕이 있다면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연애 관련 영상이나 글을 열심히 탐독하거나 친구에게 상담을 요청한다. 나 이러이러한 상황이야. 이제 어떻게 하면 될까? 그럼 아주 단순한 전략 전술이라도 하나씩은 얻어낼 수 있다. 이 타이밍엔 이렇게 해, 저 타이밍엔 저렇게 해.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마음 한편에서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남는다. 정말 이렇게 하면 되는 걸까?
사실 결론부터 말하면 '될 사람은 (헛다리를 짚지 않는다면) 될 것이요, 안 될 사람은 무슨 방법을 써도 안 된다'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내가 '될 사람'인지, '안 될 사람'인지는 주사위를 던지지 않으면 모를 일이다. 그 사람이 나의 마음을 받아준다면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받아주지 않는다면? 머릿속은 복잡하겠지만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수용해야 한다.
다만 이를 포기해라, 어차피 안 될 건 안된다 식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수용과 긍정이란 포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높은 차원에서 현실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철학자 니체는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을 수용하고 사랑하라(Amor Fati)고 역설했다. 고통스러운 운명 앞에서 두 팔을 활짝 벌리는 이가 초인(Ubermensch)이다. 초인은 절망이나 집착 대신 긍정과 사랑을 택한 사람이다.
삶은 곧 고통이다. 니체도, 부처도 그렇게 역설한다. 내가 가진 사랑의 감정은 수시로 뒤통수를 후려친다. 푸쉬킨이 말했듯 삶은 수시로 나를 속인다. 가슴속으로는 절절한 고통과 슬픔을 떠안더라도 이조차도 받아들이고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사랑도, 그리고 삶도 이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데도 도움을 준다. 어차피 내게 마음이 없는 사람은 내가 무슨 전략을 구사해도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다. 오히려 계속 뭔가를 하면 부담감만 커질 뿐이다. 그럴 땐 차라리 한 걸음 물러서서 나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게 낫다. 나의 마음을 분명히 전달하고 기다리기. 그게 사랑을 대하는 가장 합리적인 태도다. 반대로 기상천외한 기술을 사용해 억지로 관계를 이어 본들 그게 과연 건강하게 지속될 수 있을까?
서로가 가진 마음의 균형을 맞추는 데는 시간이 든다. 그 시간 동안 기다리는 게 참 어렵다. 결국은 거절당할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떠랴. 누군가 말했듯 내 고백을 거절한 그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한 사람을 잃었고, 난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한 명 보냈을 뿐이다. 사랑은 강력하다. 앞서 말한 모든 조언을 잊어버리게 만들 만큼. 다만 사랑의 지독한 숙취가 끝나고 지난날을 복기해볼 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